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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40)화 (4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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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은 혼란을 감추며 입을 뗐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제가 여기 있었던 것은-.”

이렇게 점점 더 거짓이 가득해지겠지. 그리 생각하며 말을 뱉으려던 차였다. 목소리보다 더 맹랑한 소리가 말을 잘랐다.

꼬르륵-!

연의 뱃속에서 울려 퍼진 소리는 크고 단호했다. 왜 먹을 걸 제때 챙겨주지 않느냐는 울부짖음과도 같았다. 이럴 수가. 하필 이 심각한 때에 꼬르륵이라니?

“…….”

연은 하던 말을 그쳤다. 하신후의 표정을 차마 마주볼 수 없었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크흠, 헛기침이라도 뱉으려던 차였다.

꼬르르륵-!

다시 한번 배가 굉장한 소리로 배고픔을 호소했다.

“아, 아까는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았는데….”

연은 궁색하게 변명을 시작했다.

“역시 사, 사람 돕는 일이 보통 힘든 것이 아닙니다. 제 선배가 몸이 안 좋다기에 여기서 좀 돕다 보니 금세 배, 배가 고파졌네요. 아, 아휴 배고프다….”

“너보다는 네 몸이 더 솔직하구나.”

몸이 솔직하다고? 몸?

연은 멈칫 얼굴을 붉혔다. 이미 붉어졌던 얼굴이 한층 시뻘게졌다. 아니 이 사내는 무슨 말 한마디를 저리 묘하게 뱉는단 말인가.

고개를 들어 그를 흘겨보려던 연은, 무심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신후의 귓가가 약간 붉었다. 그도 자기 말이 어떻게 들렸는지 뒤늦게 알아챈 모양이었다.

“…가자.”

그의 말에 연은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

“어, 어디로요? 몸이 원하는 그, 그런 곳으로요?”

연의 물음에 하신후의 귓가가 더욱 불타올랐다. 그는 연의 시선을 피하고서 앞장서 걸어 나갔다.

“그래, 지금 네 몸이 가장 원하는 걸 줄 곳으로.”

뺨까지 붉어진 것을 보니, 더 놀리면 안 될 것 같았다.

연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기며 그를 뒤따랐다.

또다시 심각한 상황이 이렇게 지나가다니. 씁쓸한 불안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일단은 정말 밥을 먹으러 가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바가 없었다.

* * *

점심시간이 아직 끝나지 않아, 식당에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사인도 있고 그렇지 않은 자들도 뒤섞인 채였다. 기다란 나무 상에 저마다 자리를 잡은 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하급 술사 혹은 본성 내직을 맡은 하급 무사들이었다.

하신후가 나타나면 다들 술렁거릴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뭐랄까…. 너무 조용한 것 같았다.

연은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내려 슬쩍 하신후를 올려다보았다.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전하, 오셨습니까?”

지월이었다.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화려했다. 붉은 머리칼부터 복식까지 눈이 아플 정도였다. 복식만 보자면 하신후가 아니라 그가 상관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수려한 얼굴 때문에 의식하지 못했으나, 하신후는 한 번도 복식이 화려할 때가 없었다.

“전하께서 저만 두고 떠나신 뒤로 돌아오시지 않아 혼자서 염려 중이었습니다.”

“두, 두 분께서 여기 같이 오셨던 건가요? 다들 놀랐을 거 같은데….”

연의 중얼거림에 지월의 눈길이 그녀를 향했다. 그는 연과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어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미소였다. 친근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전하께선 원래 종종 이곳에도, 이보다 더 수준 낮은 곳에도 발걸음 하시거든요.”

지월의 경어가 낯설었다. 하신후의 정인이 되었으니 이제는 말을 낮추지 않기로 한 모양이었다.

한데 ‘수준 낮은 곳’이란 말을 이리 아무렇지 않게 입에 담다니. 주위에 들릴 걸 염려하지 않는 듯한 태도에 연은 불쾌해졌다.

게다가 이 자의 말은 경어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가시가 박힌 듯했다. 연은 굳이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숨길 이유가 없지 않은가.

“지, 지금 제가 지체 낮은 하급 술사라는 말을 돌려 하, 하신 거죠? 수준 낮은 곳에서 식사하는 자라고요.”

“그렇게 들리셨습니까? 그럴 리가요.”

태연자약한 지월의 말에 대꾸한 것은 하신후였다. 그는 무심히 물었다.

“나도 그렇게 들렸어. 너는 내게 정인이 생길 때마다 그런 식으로 구는 까닭이 뭐지?”

“……!”

하신후의 물음에 당황한 것은 연이었다. 당황이랄까, 황당함에 가까웠다. 자신을 편들어준 것 같기도 했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정인이 생길 때마다’라고? 아무리 연극이라 하지만 지금 정인 앞에서, 저런 말을 태연히 뱉다니.

하신후의 입에서 나온 ‘정인’이라는 단어는 마치 주기적으로 새로 마련하는 기물에 가까워 보였다. 말을 뱉은 음성도 그러했다. 무심하고 평온했다.

갑자기 밥맛이 뚝 떨어졌다. 연만이 그런 것은 아닌 듯했다. 지월도 얼굴빛이 태연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가 더 연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제가요? 제가 그랬던가요?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전하. 그리 오래된 일을 기억하고 계시다니 놀랍습니다. 제가 잘못 안 것이 아니라면 전하께서 어느 분을 곁에 두신 건 아주 아주 오래된 일 아니던가요?”

“그러한가.”

돌아온 대꾸는 끝까지 무심했다. 때마침 그들의 자리로 음식이 차려졌고, 하여 그 아슬아슬한 문답은 그대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밥맛이 뚝 떨어지긴 했으나, 연은 굳이 그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마음의 식욕은 아까 하신후를 마주쳤을 때부터 그리 좋지 않았다. 몸의 식욕이 문제였을 따름이다. 연은 퉁명스럽게 식사에 열중했다. 무슨 찬을 먹든 돌덩이를 씹는 듯 기분이 불쾌했으나, 어쩌겠는가.

딱히 하신후가 연에게 못할 말을 뱉은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와 진짜 정인 사이인 것도 아니다. 아니, 따지고 보면 그보다 훨씬 더 나쁜 사이가 아닌가. 그만 모르고 있을 뿐, 연은 언제든 그의 목숨을 노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알고자 하는 모든 진실을 알게 되는 즉시, 지금처럼 그의 장단에 어울려주는 일을 때려치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연은 한참을 고개를 푹 숙인 채 식사에만 정신을 쏟았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지월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 자리를 떠난 거지? 아예 가버린 건지 주위를 둘러봐도 보이질 않았다.

“지월은 먼저 자리를 떴다. 네가 하도 무섭게 식사에 집중하여, 너를 방해하지 않겠다며 조용히 갔지.”

가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니. 연은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동요해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왜 그렇게 화가 났지?”

그는 답을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무심한 표정이었다.

“화가 날 정도로 배가 고팠어? 그럼 아까 그 네 선배 술사와 그리 오랫동안 함께 있는 대신 여길 왔어야지.”

“전하께서야 말로 이제 보니 시, 심기가 불편해 보이시네요.”

연은 서슴없이 말을 이어나가려다 말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역시 이곳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평소에는 다들 이보다는 떠들썩했던 것 같은데. 마치 다들 평소와 같은 척하면서 내심 이곳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하신후는 정말로 그 사실을 모르는 걸까. 모르고서 여기서 태연하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걸까. 그럴 리는 없을 것 같았다. 아니면 늘 이렇게 살아서 이런 경직된 분위기에 익숙해져 있기라도 한 걸지도.

“전하께서도 식사를 마치셨으면 우리 이, 일어나요. 저는 저, 점심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시간 맞춰 장서각으로 돌아가야 해요.”

연은 자리에서 먼저 일어나 앉아 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순순히 연의 말에 따랐다.

식당 밖으로 나오니 햇살이 내리쬐고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려왔다. 식당 안의 묘하게 긴장감 어린 분위기에 비해 한결 편안했다.

“전하께서 심기가 부, 불편하신 이유를 이야기해주시면 저도 소, 솔직하게 이야기할게요. 기, 기분이 나빴던 건 맞으니까.”

연의 제안에 하신후가 짧게 웃음을 내비쳤다. 그가 웃은 이유는 제안 때문만이 아니었다.

“너, 말이 점점 짧아지네. 내버려 두면 곧 내게 네 벗들을 대하듯 말하겠는걸.”

“저, 정인이라면 당연히 이 정도는 할 수 있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예, 예전에는 그러지 않으셨나요?”

“…예전이라.”

그의 눈에 언뜻 어두운 빛이 스친 것 같기도 했다. 정말로 연애사를 떠올리고 있는 것은 맞는 걸까. 그렇다기엔 너무 온기 없는 표정이었다. 마치 현한을 대할 때와 같았다.

“내가 심기가 불편한 이유는, 오늘 여기 도착하자마자 급히 해결할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되어서다. 내일 아침 이곳을 떠나면 수일은 돌아올 수 없어.”

연의 눈이 커졌다. 회운성으로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떠난다고?

이어지는 하신후의 음성은 차분했다.

“하여 지금 내겐 너와 내가 어떤 사이인지, 내가 너를 얼마나 아끼는지 그런 걸 남들에게 구경시킬 기회가 별로 없다. 그리고 희설은 곧 여기로 들이닥치겠지. 들이닥치면 당장 너를 가만두지 않으려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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