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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39)화 (39/122)

39

사내는 숨이 막히는 듯 말을 뱉지 못하고 꺽꺽거렸다. 점점 호흡이 뒤틀리고, 얼굴이 검푸르게 변했다. 그대로 두면 죽을 것이다.

“그만. 그 물음엔 답하지 않아도 좋아.”

연은 초조해져 입술을 깨물었다. 연의 힘으로도 진실을 끌어낼 수 없는 것이 벌써 두 번째였다. 은곡은 이미 죽었다. 아니, 정말로 죽은 것일까?

그가 불에 스스로 뛰어들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이 정녕 죽음을 각오한 자가 짓는 표정이었던가? 연은 답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죽음을 각오한 자의 표정이 뭔지 배운 적이 없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는 게 없구나.’

무심코 세게 입술을 깨물어 버린 것인지 피 맛이 느껴졌다. 이 피는 귀중하고 요긴한 것이다. 이리 멋대로 흘리는 것을 보면, 신관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짐작이 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언제나 연의 피였다. 고귀한 신룡의 피는 그들에게 가장 중한 힘이었으니까.

“그럼 너는 은곡이라 불리던 사내가 언제 제국으로 온 것인지 알고 있느냐.”

은곡은 제 입으로 자신이 용의 일족을 위해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진실일 것이다.

“모릅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저는 모릅니다.”

“그럼 알고 있는 자가 누구지? 그건 알고 있나? 추측 가는 자가 있다면 그것만이라도 말해.”

“…저를 여기 보내신 분들이라면 아실 것입니다.”

신관들을 뜻하는 것이리라. 연은 더 캐물을 것을 떠올리기 위해, 지푸라기를 붙드는 심정으로 머리를 쥐어짰다.

답답하고 노기가 치밀었으나 혼자 성을 낸다 해서 해결될 일은 없었다. 묻는다 해서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다면, 다른 일을 살피는 것이 우선이다. 연은 신경질적으로 말을 뱉었다.

“나는 하신후와 거짓으로 정인 관계를 맺기로 했어. 너를 여기 보낸 자들이 나와 하신후의 관계에 대해 묻거든, 그에게 가까워지려 연극에 동참한 것이라 전해. 그러니 그와 나에 대해 걱정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이야.”

초조하게 찢어진 입술을 다시 짓씹을 때였다. 연은 멈칫, 눈빛을 달리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힘을 거두었다.

사내를 둘러싸고 있던 핏빛 안개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사내의 눈빛이 꿈에서 깨어나듯 변했다. 연은 마지막으로 황급히 속삭였다.

“내 마지막 명 외의 다른 물음들은 모두 잊어라. 전부 지워.”

그 말을 끝으로, 사내가 흠칫하며 숨을 들이쉬었다. 연이 사내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덩치 큰 사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 무겁기 짝이 없었다. 연이 너무 급하게 힘을 거두는 바람에 사내의 정신이 아직 조금 혼몽한 모양이었다.

가까스로 사내를 제대로 일으켜 세운 순간이었다. 뜰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장서각의 뜰로 들어선 것이다.

아직 점심시간이 한창인데 누구지? 고민은 길지 않았다. 예민해져 있던 연은 금세 인기척의 주인을 간파할 수 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네….’

조금만 늦게 힘을 거두었다면, 들켰을 것이다. 다름 아닌 하신후에게.

그는 연이 미처 한숨 돌릴 틈도 없이, 그들이 있는 곳을 찾아냈다.

“…뭘 하고 있는 거지?”

연은 하신후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무심코 당황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있다던데. 딱 그런 경우였다. 조금 전까지 정체를 드러내고 부하를 추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신후가 보았다면 단숨에 모든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뭐, 뭘 하다니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요.”

연이 더듬거리며 쭈뼛거렸다. 그러나 하신후는 그녀의 대꾸를 제대로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들을 향해 돌연 성큼성큼 다가왔던 것이다. 표정이 좋지 못해 빠른 걸음걸이가 한층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설마 그 먼 거리에서부터 연의 힘의 파장을 알아채기라도 했던 걸까?!

연이 흠칫 물러나려는 순간이었다. 하신후가 그녀 곁에 붙어 있던 사내를 돌려세웠다.

“아무 일도 없는데 이자와 왜 이리 가까울까.”

사내는 하신후를 보고 당혹하며 주춤거렸다. 연은 급히 끼어들어 변명하듯 말했다.

“저, 저와 함께 일하는 술사가 몸이 좋지 않아 잠시 도와주고 있었어요.”

사내는 연의 변명에 급히 수긍했다.

“맞습니다, 전하. 오신 것을 몰라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연이 정체를 숨기려 열심히 둘러대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연이 그에게서 지운 것은 피로 정신을 조종한 뒤 던진 물음들이 전부다. 그러니 사내는 연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은 잊지 않았다.

둘은 합심하여 하신후에게 열심히 태연한 시늉을 해 보였다. 게다가 실제로 사내의 안색이 해쓱하고 다리가 비틀거리기까지 하여, 변명은 실로 설득력이 있었다. 사내는 둔한 다리를 끌고 얼른 뒤로 물러나며 인사를 올렸다. 실로 적절한 물러남이었다.

“…….”

“…….”

사내가 쏜살같이 자릴 떠나고 나니, 남겨진 것은 어색한 침묵이었다.

그러고 보니 하신후는 왜 갑자기 여기 나타났단 말인가? 그가 이리 갑자기 나타날 줄 알았다면, 그리 쉽게 힘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들킬 뻔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다시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물론 언젠가는 들킬 테고, 당연히 그가 알아야 할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아직은 아니어야 했다.

연은 쭈뼛거리며 하신후에게 맹하게 물었다.

“저… 아침에도 여길 오시고, 지금도 또 여길 오셨는데, 왜 그러시느냐 여쭙는 건 좀 예의가 아니겠지요?”

하신후는 연을 빤히 보다가 대답했다.

“네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찾아갔는데, 네가 없어 당혹했다. 다른 이들도 내 탓에 다 당혹했지.”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는 딱히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쩐지 평소와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연은 어리둥절하여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멈칫 의미를 깨닫고 물었다.

“식당에 갔어요? 저희 밥 먹는 곳에?”

당황하여 말씨마저 예법을 약간 잃었다. 하급 술사들이 밥을 먹는 곳에 갑자기 그가 나타났으니 다들 당황하는 게 당연하다. 연은 놀란 채로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훠, 훨씬 더 마음이 급하신가 봅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소문은 곧 저절로 퍼질 테니 너무 무리하지 마시죠.”

“네가 식사도 마다하고 다른 사내와 여기 있을 줄은 몰랐는데.”

어쩐지 ‘식사도 마다하고’라는 말에 힘이 실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른 사, 사내라뇨.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아까는 상황이 그리되어서 그런 것뿐입니다.”

하신후가 연에게 조금 더 몸을 굽혔다.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눈을 마주친 채 고개를 숙여오니 새삼 위협적이었다. 연의 가슴이 세게 뛰었다.

“하나 네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네게 휘둘리고 있지만, 눈이 먼 것은 아니야. 너는 그를 돕고 있는 게 아니었어.”

“…….”

“그는 누구지?”

“…제… 선배지요.”

“내가 그렇게 믿어야 하는 건가?”

다시 돌아온 물음에 연은 답하지 못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그는 연을 첩자라 믿고 있었고, 그 믿음이 가리키는 진실을 언제든 파헤칠 수 있었다. 그가 그리하는 순간, 연도 그에 응해야 할 것이다. 그럼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연이 답하지 못하자 하신후 역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채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참 만에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낮은 음성이 흘렀다.

“네가 그렇게 믿으라 말하면, 나는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두겠어.”

“…어째서요?”

연은 무심코 물었다.

“저라면 그리하지 못할 텐데요. 제, 제가 첩자라 믿으신다면 저와 제가 같이 있던 자를 같이 추궁해야겠지요.”

하신후의 입가에 뜻 모를 미소가 번졌다. 서늘한 표정이었다.

“나더러 그렇게 하라는 거야? 지금 내게 네가 누군지 밝히기라도 하려는 건가.”

“전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건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드리는 마, 말씀입니다.”

연은 그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가까이서 들여다본 그의 눈은 숨 막히도록 수려했다. 그러나 오늘따라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 생김의 수려함이 아니었다. 그의 눈빛이 적막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네가 정녕 알고 싶어 하긴 하는 걸까.”

“아, 알고 싶습니다. 당연히 알고 싶어요.”

연은 저도 모르게 초조해져 인상을 찡그렸다. 그가 연에 대해 무엇을 어디까지 알아챈 것인지, 어디까지 짐작하고 있는 건지 알고 싶었다. 마음이 초조해진 연은 습관적으로 입술을 짓씹으려 들었다. 그러나 하신후는 무심한 손길로 그것을 저지하며 말했다.

“네게 사과하려고 했어. 아침에 현한과 너를 두고 그냥 가버렸잖아. 그게 어쩐지….”

“…….”

“어쩐지 계속 마음에 걸리더군.”

그건 연도 그랬다. 그에 대한 모든 것이 짜증스럽고, 초조하며, 마음에 걸렸다. 대체 언제부터 이리되었단 말인가.

“그런데 네가 여기서 이런 모습으로 서 있을 줄이야.”

그와 관련된 모든 게 엉망이었다.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그조차도 엉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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