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무슨 얘길 그렇게 재미나게 하고 있냐고 묻잖아.”
서오가 험상궂게 인상을 찌푸리자, 그녀 곁을 늘 따르던 동료 사내 둘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연의 눈길이 잠시 그 사내 가운데 하나에 머물렀다.
“뭐야, 선배를 무슨 그런 눈길로 쳐다봐? 왜 그러냐. 그 얼굴로 어디 다른 사내라도 꼬여내 보려는 거야?”
거참 듣기 불쾌한 말투였다. 현한에 이어 이 여인도 입에 걸레를 물고 있는 것 같았다. 연은 차분하게 분노를 다스리며 서오를 흘겨보았다.
“오늘따라 말투가 평소보다 더 천박하네. 무슨 나쁜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 너는 왜 늘 선배한테 말이 그렇게 짧아서는 건방지게-.”
“여기 사람들 소문이 다 좀 느린가 본데, 나는 이제 북왕 전하와 아주 괜찮은 사이야. 숨길 거 하나 없이, 정식으로 그렇게 되었다구.”
“무, 뭐…?!”
서오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연의 말에 너무 놀라 입을 다무는 방법을 깜빡 잊은 것 같았다. 연은 능청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굳이 와서 핍박하려고 하는 거야? 선배 너무 겁이 없네.”
“…너 미친 거 아니야?”
서오가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연을 황당하게 바라보았다.
“진희설 님께서 전하와 이번에야말로 혼인하실 거라는 소문이 파다한데, 지금 어디서 괴상한 소릴 지껄이는 거야?”
“…….”
“말마따나 전하께서 너와 괴상한 소문이 퍼졌던 건 사실이지만, 그게 진실이든 아니든 너는 지금 네 목이나 잘 간수해야 하는 입장인 거다. 진희설 님께서 방금 네 말을 들었다면 너는 벌써 죽었을 거야.”
연은 흠, 가볍게 눈을 찡그리며 짧게 고민했다. 서오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생각해보니 이건 약간 위험한 거래였다. 연에게도 위험 부담이 있었다. 현한이 말했듯 진희설은 곧 이곳으로 올 테고, 그럼 연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연은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쪽은 화를 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래서 내 목이 달아날 거라고 하기엔… 하신후가 그렇게 두지 않을 거 같은데.”
연은 말을 뱉고 멈칫했다. 하신후를 이름으로 부른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약간 짜증이 나서 솔직한 심정을 담아 대꾸하다가 말실수를 한 것이다. 이래서 사람은, 아니, 용은 늘 차분해야 한다. 차분하지 않으니 이리 말실수를 하게 되지 않는가.
연의 말실수는 예상치 못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대로 놀라 굳어버린 것이다. 서오는 물론 서오를 따르는 사내 둘도 마찬가지였다.
다들 놀라 말을 잇지 못하는 것 같은 분위기에 연은 쭈뼛거리며 변명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말실수를 했어. 그를 이름으로 막 부르려던 건 아닌데 마음속 소리가 튀어나왔어. 다들 그게 뭔지 알지?”
연의 구차한 변명에 서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표정이 어쩐지 낯설었다. 서오는 연이 진심이며, 조금 전 말에 거짓이 없다는 사실을 드디어 믿기로 한 것 같았다.
서오는 착잡하게 말했다.
“…너 정말 조심해라.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이건 널 생각해서 하는 소리야. 어쨌든 너는….”
연이 멀뚱멀뚱 그녀를 바라보자, 서오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어쨌든 사인이니까. 우리 동족이 귀족한테 놀아나는 꼴을 더 보고 싶지 않아. 꼴도 보기 싫다고.”
서오의 목소리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지금까지 연을 아무렇게나 겁주고 혼내려 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지금이야 그렇게 대단한 귀족과 얽혔으니 기뻐서 방자하게 날뛰는 것도 이해할만해. 게다가 북왕 전하는 주군으로서야 사인에게 결코 나쁜 분이 아니지. 감사하는 자들도 많을 거야. 하지만-.”
“연정으로 얽히는 건 꿈꾸지 말라는 거야?”
연의 물음에 서오는 인상을 구겼다.
“네가 정말로 생각이 있다면, 제발 정신 똑바로 차려라.”
연은 인상을 쓴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그녀를 갖가지 표정으로 바라보는 자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서오는 가장 착잡해 보였다.
어차피 가짜 연정으로 연극을 하는 것뿐인데, 그 연극에 속아 이 여인은 이리도 불안한 눈빛을 보이고 있다. 대체 이 제국에서 무슨 일들이 벌어져 왔던 걸까. 연은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 연의 마음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었다. 연이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연은 자리를 떠나는 서오를 뒤따르는 사내를 다시 한번 눈에 담았다.
연이 그를 따로 불러낸 것은 점심 무렵이었다.
* * *
모두가 식사를 하러 떠난 장서각은 한적했다. 연은 피곤하다는 핑계로 점심 자리를 피했다. 연에게는 점심을 먹는 것 말고 따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직 몇 번 먹어보지 못했으나 이 성의 밥은 꽤나 맛이 좋았다. 그러니 연이 이리 점심도 거르고 시간을 마련한 것은 참으로 중한 결심이었다.
복도의 그늘에 선 연의 입에서 싸늘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나는 배고픈 것이 세상에서 가장 싫은데. 그런데도 내가 굳이 이리 급히 너를 불러낸 이유를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신룡이시여.”
연의 앞에는 한 사내가 꿇어앉아 있었다. 그는 서오와 가까운 듯 보였던 두 사내 가운데 하나였다. 연은 아까 눈에 담았던 그의 얼굴을 다시금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꽤 오랫동안 훌륭히 정체를 숨겨온 것 같구나. 하여 내 앞에서도 너를 감출 수 있을 거라 믿은 것인가.”
“그것은… 아닙니다. 말씀드리려 했으나-.”
사내의 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연의 몸에서 피어나온 붉은 안개가 홀연히 그를 감쌌다.
“너는 이제부터 내게 거짓을 고하지 못한다. 그것이 나의 능력이지. 나는 거짓을 듣는 것을 싫어하거든.”
물론 스스로 거짓을 말하는 것까지 싫어하지는 않는다. 아니,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다면 얼마든지 말할 수 있다. 하신후에게도 늘 거짓을 말해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자신은 이리 쉽게 남에게서 진실만을 거머쥐려 하다니. 연은 문득 스스로의 행동에 자조가 나왔다.
그러나 이자 앞에서 멍하니 자조만을 곱씹고 있을 수는 없었다. 지금은 물어야 할 것이 있었다.
“너는 나를 감시하려 이곳에 숨어들어온 자더냐.”
“…그렇습니다.”
“‘용의 산’의 신관들이 너를 보낸 것인가?”
“그렇습니다.”
사내의 대답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용의 산에서 이리 멀리까지 왔지만, 연은 여전히 그들의 군주였다. 군주라는 말은 족쇄와도 같아서 어딜 가나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들이 연을 그저 순순히 믿음만으로 여기 보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러기엔 미심쩍은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연은 아는 것이 충분하지 않았으나, 자신이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더듬을 지력 정도는 갖고 있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지? 내가 제국에 들어오기 전부터, 나를 감시할 자들의 잠입까지 모두 계획되어 있었던 것인가?”
“저는 이곳에서 지난 3년을 보냈습니다. 그전에는 제국에서 수학했고, 제국에 처음 잠입한 것은 14년 전입니다.”
“…14년이라고….”
생각보다 더 긴 시간이었다. 역시 연이 제국에 잠입하게 된 것은 아주 오래전에 계획된 일이 틀림없었다. 결코 지난 몇 년간의 논의 끝에 결정된 사안이 아니었다.
14년 전에는, 아무도 연에게 이 계획을 알려준 적이 없었다.
연이 이 사내가 제국 밖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은, 첫째로 그가 연을 바라보는 눈빛 때문이었다. 그는 마치 신관들이 그녀를 바라보던 것과 같은 눈빛을 갖고 있었다.
구원자를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하고, 자신들이 가둔 흉포한 짐승을 보는 것 같기도 하던, 탐욕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는 눈빛. 그들을 떠나 멀리 여기까지 와서야 새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 사람들은 연을 그렇게 보지 않는다. 서오도, 다홍도, 리경도, 하신후도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자의 정체를 눈치채게 만든 결정적인 증거가 있었다. 이 자에게선 삼진을 떠나기 직전 마주했던 그 ‘선대 용’의 기운이 느껴졌다. 오래된 망령의 피 냄새였다.
연은 마지막으로 가장 중한 물음을 던졌다.
“너는 지난번 삼진에서 사인들의 혼을 제물로 삼으려 했던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느냐.”
다른 물음의 답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물음은 아니었다. 연은 이 물음의 답을 조금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사내는 아무것도 답하지 못했다.
돌연 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이 반응은 이미 본 적이 있는데…. 이건 마치 삼진에서 그자가… 그 불탄 제사장 은곡이 보인 것과 똑같은 반응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