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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36)화 (36/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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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에 도착한 뒤, 하신후와 연의 길은 당연한 듯 엇갈려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는 금방 연을 떠나는 대신 앞장서 장서각으로 향했다.

보는 눈이 많아 조금 곤란했으나, 그는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서, 성안에서도 계속 손을 잡고 다녀야 하나요? 그럴 줄은 몰랐는데….”

연은 곤혹스러움에 인상을 구겼다. 그야 그럴 만했다. 마주치는 사람 수가 늘어갈수록 당혹감도 커졌다.

“네가 그렇게 하기로 선택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돼.”

하신후가 연을 힐끗 돌아보고 대꾸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네가 자꾸 그렇게 말하니 내가 못된 짓이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가 걸음을 멈추고 연을 내려다보았다. 마침 사람 없는 모퉁이였다.

“자꾸 그렇게 핀잔하면 내가 부끄러워지잖아.”

“저도 부, 부끄러우니 그렇지요.”

연은 그에게 잡힌 제 손을 휘휘 흔들어 보였다.

“보통 이렇게까지 하는 거 마, 맞나요? 너무 오, 오래 연애를 하지 않으셔서 어떻게 하는지 다 이, 잊어버리신 건 아니고요?”

그 말에 문득 그의 표정이 조금 변하였다.

“그래, 나는 오래되었지. 그런데 생각해보니 네 얘긴 들어본 적이 없군. 너는 어떻지?”

연은 당황해 입을 꾹 다물었다. 그야 연은 오래된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갖춘 뒤 지금까지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다.

고귀한 신룡에게 정인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저, 저는….”

연은 이 곤혹스러운 질문에 가장 적절한 답을 찾으려 머리를 쥐어짰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머리를 쓸수록 가슴에서 더 쿵쾅거림이 심해지는 듯했다.

하신후의 눈이 점점 가늘게 찡그려졌다. 그가 뭔가 따져 물을 듯한 순간이었다. 때마침 조용하던 복도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붉은빛이 도는 머리칼을 보니 주인을 알만했다. 지월이었다.

“전하, 여기 계셨습니까.”

지월이 하신후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러더니 연을 돌아보고서 빙긋 미소를 보냈다. 하신후가 없을 때에 비해 한결 호감 어린 미소였다. 아첨꾼처럼 보이기까지 할 정도였다.

“이분과 장서각으로 가시는 길인지요?”

지월의 물음에 하신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월은 가까운 부하라서 먼저 질문을 던져도 되는 모양이었다. 약간 고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연에게는 그리 틈만 나면 무안을 주지 않았던가.

“장서각에 마침 초대받지 않으신 손님께서 와 계셔서 제가 먼저 뵙고 전하께 말씀드리려 찾아다니던 참이었습니다. 통령으로는 말을 전할 수가 없어서요.”

통령이란 부리는 혼령을 거쳐 대화를 나누는 술식이었다. 서로 통령을 나눌 수 있도록 허가를 해준 사이에만 가능한 술식이니, 지월이 하신후의 측근임을 알리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면, 현한인가 보군.”

하신후가 중얼거렸다. 귀찮은 기색을 감추지 않는 말투였다. 그 말투의 냉랭함 때문이었는지, 지월은 잽싸게 인사를 올리고 물러났다. 물러나면서 그는 연에게도 가볍게 인사를 건네왔다. 연도 마주 고개를 숙여 보였다.

본성에서는 연이 하신후의 특별한 명을 받고 임무를 수행하려 자릴 비운 것으로 알려져 있을 터였다. 그런데 실은 그와 며칠 동안 그냥 함께 빈둥거린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다들 어떻게 생각할까? 약간 민망함이 밀려들었다.

지월이 떠나자 하신후는 연에게 슬쩍 말을 건네왔다.

“현한이 무슨 말을 하든 귀담아 듣지 마.”

연은 그를 가만히 보다가 예의상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하을령의 일기를 통해 그의 불운한 가족사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된 덕분일까. 이복동생과 사이가 나쁘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져 있는 그의 처지가 조금 가엾기도 했다.

가엾다니, 그게 적에게 갖기 적절한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언제나 그래왔듯, 연은 그에게 드는 마음이 적절한지 아닌지 충분히 고민해볼 수 없었다. 그러기도 전에 현한과 먼저 마주친 덕분이었다. 그는 지월의 말대로 장서각 뜰에서 한량처럼 그들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형님, 정말로 이곳으로 오시다니. 새 정인과 사이가 무척 좋으신 모양입니다. 예전부터 여인들에겐 늘 관대하신 분인 걸 잘 알고 있긴 했지만 말입니다.”

뜰의 긴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던 현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른한 기색 없는 담백한 몸놀림은 무인의 태도와 비슷했다. 현한에게서 희미하게 시린 날붙이 냄새가 풍겨오는 듯도 했다. 그러나 연이 알기로 그는 무장이 아니라 귀를 부리는 술사였다.

“너를 여기 청한 기억이 없는데, 여기서 보니 의아하구나.”

하신후가 무심한 음성으로 현한에게 대꾸했다. 주인이 도착한 것을 어찌 안 것인지, 장서각 안에서 기다렸다는 듯 서고지기 노인이 걸어 나왔다.

“오셨습니까, 신후 도련님. 올해는 전보다 더 이르게 오셨네요.”

도련님이라니, 생각하지 못한 부름이었다. 노인의 음성에서 그리움과 따스함이 묻어났다. 현한만 없었다면 달려와 하신후의 등이라도 두들겨줄 것만 같은 태도였다. 연은 초롱초롱한 노인의 눈빛에 생경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 따뜻한 표정에 거북함을 느낀 자도 있었다. 현한이었다.

“도련님이라니, 북왕 전하를 아직까지도 도련님이라 부르는 것이냐. 벌을 받아야 마땅한 하인이로군. 아니면 노망이라도 든 건가.”

하신후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 노인을 걸고넘어지는 것이 분명했다. 일부러 자극적인 표현을 골라 뱉은 기색이 역력했다. 유치한 수작에, 연은 현한을 흘겨보았다. 하신후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 역시 여전히 예를 갖추는 법을 깊이 배우지 못했구나.”

“저 노인이 전하께 제대로 예를 갖추지 않아 하는 말입니다. 주인으로서 그런 것을 엄히 다스릴 필요가 있으니까요.”

“너는 이곳의 주인이 아닌데, 왜 네게 그런 권한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하신후가 현한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너는 이곳의 손님이고, 손님이 내 집안의 일에 간여하는 것은 내게 예의가 아니야.”

“하지만 저는….”

손님이라는 말이 이어질수록 현한의 표정이 변했다. 굳는가 싶더니, 냉소를 띠기 시작했다. 치기 어린 분노가 스민 눈빛이었다.

현한이 아무리 도발을 해도 하신후는 받아줄 생각이 없는 듯 차분했다. 그저 피로감이 짙은 표정만 짓고 있을 따름이었다. 하니 현한에게는 더 할 수 있는 대꾸가 없었다.

“네 말대로 나는 내 정인을 여기 데려다주러 온 것뿐이다. 너도 내게 용무가 있는 것이라면, 따로 지월을 만나 상의하도록 해.”

“왜요, 제게는 그저 빈 시간을 내어줄 마음조차 없다는 것입니까? 왜 형님을 만나려는데 그 부하를 거쳐야 한단 말입니까.”

“네가 아닌 다른 이들도 다들 그리하고 있다.”

하신후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러나 그것은 연에게 늘 보이던 표정과 사뭇 달랐다. 귀찮은 기색이 역력하여, 냉소보다도 다가가기 어려웠다. 마치 사람을 들이지 않는 폐허 같았다.

“네가 나를 형님이라 부르듯, 나도 너를 언제든 회운성에 오갈 수 있도록 해주고 있지. 한데 내 시간까지 네 것처럼 굴면 그건 곤란한 일이다.”

아이를 대하듯 차분한 말투였으나, 온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연은 처음 보는 하신후의 모습이 낯설어 놀랐다.

‘원래 이렇게 말하고, 이런 표정을 짓는 자였던가?’

그가 하는 말에 딱히 모욕이나 비아냥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온기가 없어 듣는 이의 마음마저 불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연은 낯설기 그지없는 기분으로 하신후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깨달은 듯 그가 연을 돌아보았다. 멈칫 그의 표정이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연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깨닫고, 그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그가 여태 붙잡고 있던 연의 손을 슬그머니 놓았다. 왜 하필 그 순간이었을까? 눈이 마주친 순간 손을 놓아주자, 괜히 기분이 한층 이상해졌다.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연을 향해 부드럽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이만 가볼 테니, 내 책들을 잘 부탁하지.”

연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그는 그대로 뒤를 돌아 쌩하니 떠나버렸다.

왜 이렇게 어색하지? 둘만 있을 땐 어색하지 않았는데, 뭔가가 변했다. 한순간이었지만 하신후가 몹시 낯설게 느껴졌다.

연은 그가 놓아버린 제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설마 마음속으로 그에 대해 한 생각이, 그에게 들리기라도 한 걸까? 그에게 온기가 결핍되었다는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는 그가 연의 손을 놓았다. 기가 막힌 우연이었다.

어째서인지 기분이 아주 불쾌했다.

“형님이 가시니 벌써부터 외로운가 보지? 그래서야 일은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

때마침 현한의 냉소 어린 음성이 연의 귀에 들려왔다. 지난번에는 과묵한 자 같더니, 오늘은 꽤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연은 유치한 비아냥을 듣자마자 현한을 홱 돌아보았다.“그, 그래요. 당신 형님께서 당신 때문에 갑자기 저렇게 떠나버렸으니, 내가 짜증이 안 나겠습니까?”

“…뭐?”

“들으셨잖아요. 왜 갑자기 저희 서고지기 어르신께 그렇게 말을 하, 함부로 뱉느냔 말이에요. 그러니까 저, 전하께서 기분이 상하셔서 가버리셨잖아요. 저, 저랑 제대로 말 한마디 더 안 하고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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