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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34)화 (34/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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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데 너는 언제쯤 저주흔을 지워 진짜 얼굴을 보여줄 생각이지?”

갑자기 날아든 말에 연은 놀라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을 떠보려고 한 말일까?

이 저주흔은 연이 직접 얼굴에 남긴 것이었다. 비록 썩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한 것이긴 했으나 의심을 살만한 건 아니었다. 이건 연 자신의 힘이 담긴 흔적이었으니까.

“진짜… 얼굴이라니요?”

연은 결국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 얼굴은 제, 제 것이 아니란 뜻인가요? 그건 아닌데요.”

“못 알아듣는 척하긴.”

그가 서늘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정말로 모르는 것이냐는 듯 말을 이었다.

“네 저주흔은 사고로 생긴 것이지. 평범한 사고 흔적이라면 간절히 없애고자 하는 것이 보통일 텐데. 너는 한 번도 내게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어. 첩자라서 얼굴을 가리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인가.”

그의 말에 연은 내심 안도했다. 역시 그는 딱히 뚜렷한 증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정황 증거가 전부였다.

“전하께 내, 내색이라니. 그럼 전하께 없애 달라 청이라도 하라는-.”

괜스레 따지던 연은 슬며시 말을 그쳤다.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을 법했다.

만약 연이 평범한 자이고, 사고로 용모에 이리 큰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면 되도록 사고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연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제가 저지른 시, 실수로 생긴 것이니 상관없습니다. 얼굴을 볼 때마다 두 번 다시 그,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기도 하고요.”

“…….”

“어, 언젠가 스스로 기량을 높여 제 힘으로 없앨 것입니다.”

“그런가.”

“그렇지요.”

연은 찔릴 것 없다는 듯 태연히 그를 마주했다.

“그럼 내가-.”

그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연은 뒷말이 조금 궁금했으나 묻지 않았다. 이대로 이 문제를 그냥 덮어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였다.

두 사람은 잠시 나란히 마루에서 침묵을 나누었다.

시간이 흘러도 그는 다시 저주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덕분에 연의 긴장도 차츰 풀렸다. 그는 이번에도 연의 거짓에 순순히 속아 넘어간 모양이었다. 그가 생각보다 순진한 구석이 있어 다행이었다. 순순히 넘어가 주니 다행스러워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굳이 얼굴 얘기를 꺼낸 것을 보면, 그는 내심 자신의 맨얼굴을 궁금해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하긴 그럴 만했다. 본래 자신의 용모는 범인과 비할 길 없이 아름다우니, 이 정도 저주흔으로는 스스로의 미모를 다 감추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조금만 눈썰미가 있는 자라면 자신의 본 얼굴이 궁금해지는 것이 이치였다. 연은 그리 자만하며 여유롭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이리 아무것도 하지 않고 늘어져 있기만 하는데도 딱히 지루하지 않았다.

뜰에서 살랑거리는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과실의 향기가 전해져왔다. 하신후에게서도 언제나 탐하게 되었던 그 좋은 향기가 풍겼다.

햇빛과 감미로운 향기가 있으니, 연은 그것만으로도 배부른 짐승처럼 평온해졌다. 물론 진짜로 배가 불렀기 때문이기도 했다.

‘다시 만나면 하신후와 나눠야 할 말이 많을 줄 알았는데. 정작 곁에 있으니 이대로도 괜찮네.’

연은 하신후가 등을 기댄 벽에 자신도 나란히 등을 기댔다. 그가 그녀를 슬쩍 돌아보았다. 연은 그를 향해 간만에 기분 좋은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물론 그가 자신을 빤히 보기에 괜히 쑥스러워져 얼른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두 사람의 조용한 평화는 해가 지도록 길게 이어졌다.

* * *

같은 날 넓디넓은 황궁. 한 여인의 환영을 앞에 둔 하을령의 표정에는 점차 따분한 기색이 어려가고 있었다.

-남쪽에 있으면 얼마나 있었다고 신후 오라버니는 벌써 회운성으로 갔단 말입니다. 이번엔 정말로 무언가 이상하다고요. 폐하, 폐하께서도 조금 더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하신후를 북왕도 아니고 전하도 아닌 신후 오라버니라는 명칭으로 부르는 것은 이 여인 하나 정도이리라. 하을령은 슬그머니 고까운 눈빛으로 진희설을 바라보았다.

생긴 것도 멀쩡하고, 머리도 제법 잘 돌아가는 편인데. 어쩌자고 이 가엾은 벗은 소꿉친구에게 빠져서 아직도 이 모양이란 말인가.

-정말로 속상해요. 어차피 언제나처럼 저를 거절하면 될 일인데, 굳이 다른 여인까지 곁에 두는 척을 하다니요.

“거짓인 걸 알면 희설 너도 신경 쓸 필요 없지.”

진희설은 하신후하고만 소꿉친구인 것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하신후보다는 하을령 자신의 벗에 가까웠다. 한때는 꿈도 많고 욕심은 더 많으며 자신에게 없는 것을 잔뜩 가지고 있는 진희설이 좋았던 적도 있었다.

지금도 마냥 싫어할 수는 없었다. 괴로웠던 어린 시절을 함께 한 벗이었다. 그 시절을 함께 기억해줄 이도 이제는 몇 남지 않았다.

그러니 하을령은 오늘도 차마 무안을 주지 못하고 진희설의 재잘거림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신후 오라버니가 그 새파랗게 어린 태수 려경인에게 일부러 저를 붙잡아 두라 시킨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흥, 그럼 어디 순순히 그렇게 해줄 줄 알고요? 현한이 벌써 제게-.

“현한이라니, 그 아이와 따로 만났니?”

하을령의 눈빛에 숨길 생각 없는 날카로움이 어렸다. 진희설은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고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저한테 다녀가는데 그럼 어떡해… 아니, 어떡해요. 폐하도 아시겠지만 현한은 이상하게 거절하기가 어려운걸요.

“나는 모르겠는데.”

하을령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 아이가 내 오라비 곁을 얼쩡거릴 때마다 좋은 일이 생겼던 적이 없어.”

제 어미가 저지른 죄를 생각하면 자신들의 앞에 굳이 모습을 내보이는 것부터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일이다. 한데 이리 뻔뻔하게 하 씨의 본령에 드나들며 오라비에게 얼굴을 내비치다니.

애초에 성씨를 갖지 못했다고 불만을 내비쳤을 때부터 그 성정이 뻔뻔하기 그지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미의 죄를 연좌로 묻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일 아닌가.

“나는 네가 현한과 가까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벗이라면 마땅히 그리해야지.”

하을령은 차갑게 일갈하였다가, 문득 떠오르는 바가 있다는 듯 덧붙였다.

“어쨌든 현한을 만났다면 그 아이가 무슨 헛소리를 했는지는 고해 봐. 분명 목적이 있어 너를 찾아갔을 테지.”

-별말은 없었어요.

진희설이 눈치를 보며 한결 풀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냥 제가 원하는 게 있다면 도와줄 수 있다고 하던걸요. 현한은 신후 오라버니 곁에 사인 여인이 있는 게 싫대요. 그 아이가 워낙 사인을 싫어하잖아요.

“그래, 그 점 하나만큼은 나와 뜻이 같지.”

하을령의 말에 희설은 조금 용기를 얻은 듯 말했다.

-현한은 자기 나름대로 폐하와 오라버니께 속죄를 하고 싶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오라버니가 사인 여인과 어울려 추문에 휩싸이시는 걸 막고 싶대요. 사특한 여인임이 분명하니까-.

“흥, 웃기고 있네.”

하을령이 사납게 코웃음을 쳤다.

“늘 그 핑계를 대며 오라버니를 연모하는 여인들에게 손댄 걸 너도 알고 있잖니! 아직까지 그 아이를 살려둔 것이야말로 내 불찰인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번에는….

희설은 머뭇거리다가 조그맣게 내뱉었다.

-이번에는 뭔가 달라요. 제가 잘 안다니까요. 폐하는 늘 오라버니를 가장 잘 알고 계시면서도 전혀 모르시잖아요.

“뭐라고?”

-아, 아니에요. 제가 오늘 말실수가 잦네요. 헤헤, 헤헤헤….

희설은 얼른 바보 같은 미소를 만면에 지어 보이며 겁먹은 시늉을 했다. 하을령과 가까이 지낸 지도 벌써 수백 년이었다. 을령은 사나운 듯하면서도 관대한 벗이었다. 을령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려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정도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아무튼 앞으로도 현한이 제게 접근해 오면 폐하께 가장 먼저 말씀드릴게요. 그 점은 염려하실 거 하나도 없어요.

하을령을 공략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벗이면서도 제게 꼬박꼬박 존대를 해오는 자신에게, 을령은 결코 진심으로 화를 내지 못한다. 화를 냈다가 정말로 위계 관계가 생겨버릴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설은 을령과 달랐다. 을령이 사나운 듯하면서도 순수한 이라면, 희설은 스스로가 어떤 자인지 잘 알고 있었다.

‘현한을 먼저 찾아간 건 나인데. 을령아, 너는 그걸 짐작조차 하지 못하겠지.’

-헤헤, 꼭 조심할 테니까 폐하께서는 제가 이번에야말로 오라버니 마음에 들 수 있도록 기원해주셔요.

아이 같기도 하고 어리숙한 것 같기도 한 희설의 웃음이 연신 을령을 향했다. 을령은 못 말리겠다는 듯 긴 한숨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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