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하신후가 연을 슬쩍 보며 가볍게 말을 던져왔다.
“이, 잊으신 것이요?”
연이 슬그머니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잊은 것이 어디 한두 개이던가. 애초에 연을 여기 왜 데려온 것인지, 그것부터 말해야 했다. 아니,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신후의 입에서 나온 것은 기대와 다른 말이었다.
“네가 먹은 그 열매에 관한 것이다.”
“아….”
“내 주위에서도 그것을 먹고 괴이한 일을 경험했다는 이가 있기는 했다. 그리고 내게 그다지 믿어지지 않는 또 다른 얘기를 일러주었지.”
“…그게 뭔데요?”
연은 너무 궁금해져서 말도 더듬지 않고서 물었다.
또 다른 얘기라니, 이번에야말로 환영을 통해 원수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게 된다거나 하는 그런 효능이겠지. 누구든 제가 싫어하는 원수의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면 흡족할 터이다. 연 역시 원수라 할 만한 하신후를 보지 않았던가. 더군다나 하신후는 저를 죽일 이를 유혹하는 듯한, 모욕의 극에 달하는 행동까지 취하고 있었다. 그 덕택에 내내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어색했다.
“환영을 통해 사람을 보게 되는 것은, 그 상대 역시 열매를 먹은 자에게 마음을 두고 있을 때뿐이라던데.”
“…….”
“하필 이 집에서 나와 함께 살던 이가 그 말을 굳게 믿어버린 탓에… 하룻밤 사이 나무 하나에 열린 열매를 모두 먹어버렸다. 정말 곤란했지.”
그는 혼자서 먼 옛날을 회상이라도 하듯 옅은 웃음을 보였다. 틀림없이 동생이 저지른 일을 떠올리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러다 하신후는 멈칫 연을 돌아보았다.
“한데 네 표정은 왜 그렇지?”
그의 눈이 슬그머니 가늘어졌다.
“…너도 정말 무언가-.”
“아닙니다.”
연은 인상을 찡그렸다. 가슴 한편이 북소리를 내며 요란히 뛰었다. 그에게 그 소리가 들릴까봐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저, 전하께서-.”
연은 변명을 쥐어짜냈다.
“자꾸 함께 사셨던 다른 여인을 그리워하시는 듯한데, 그분 대신 제가 여기 있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쓰인 것입니다.”
연은 숨도 쉬지 않고 순식간에 거짓말을 쏟아냈다. 당혹스러움이 최고조에 달하니 더듬거림 한번 없이 말을 쏟을 수 있었다.
하신후는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듯 멈칫했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웃는 건지 인상을 쓰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 여인이 네 말을 들었다면 그리움이라는 말에 구역질하는 시늉을 했을 것이다.”
그야 그랬을 것 같았다. 하을령은 자신의 오라비를 그다지 어여쁘게 여기지만은 않는 듯했으니.
어쨌든 거짓말이 잘 통한 것 같았다. 그는 연의 진심을 알아채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비록 곧이어 의미심장한 소리를 뱉기는 했지만 말이다.
“전부터 느낀 것이지만 너는 말솜씨가 없는 듯하다가도, 이따금 뛰어난 것 같기도 해. 그래서 재밌구나.”
“하여 저를 여, 여기 데려오셨습니까?”
이쯤해서 화제를 돌리는 게 나을 듯했다.
그래야 아까 그 굉장한 헛소리로부터 달아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상대 역시 마음을 두었을 때면 환영으로 볼 수 있다고? 그야 그런 사람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저 열매를 먹었겠는가. 이런저런 여러 효능이 무수하게 쏟아져 나왔을 테니 개중에는 그런 신묘한 일을 겪은 이도 있으리라.
그러나 연과 그는 아니었다. 아니어야 마땅했다.
“너를 여기 데려온 것은 너를 둘러싼 소문에 대해 사과하기 위해서야.”
하신후가 연과 물끄러미 눈을 마주쳐왔다. 차분한 눈길이었다.
그가 먼저 소문 이야기를 꺼내다니 다시 한번 의외였다.
“너와 내가 평범치 않은 관계라는 소문을 퍼뜨린 것은 내가 아니다. 나는 네게 뜻을 물었고 그때의 생각은 딱히 변하지 않았어.”
“저는… 곤란했어요.”
연은 가볍게 말을 멈췄다가 물었다.
“충분히 곤란했으니 여, 여쭙고 싶어요. 전하가 아니라시면 믿을게요. 그, 그럼 누구죠?”
하을령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황궁에 있으면서도 하신후에게 계속 눈길을 두고 있는 듯했으니까. 그러나 연의 생각은 빗나갔다.
“진희설이다.”
하신후는 무표정하게 답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내 벗은 구혼에 꽤 진심이거든.”
“…하면 왜 저와 소문을….”
연은 스스로 말을 그쳤다. 희설은 일부러 소문을 퍼뜨려 하신후를 떠본 것이 분명했다. 그가 정말로 연에게 마음이 있다면, 그는 어떤 식으로든 소문에 반응했을 테니까.
진희설이라는 여인이 누군지 아직은 전혀 모르지만 약간 섬뜩했다. 자기를 원하지 않는 사내와 굳이 혼인하려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게다가 이런 식으로 상대의 마음을 떠보기까지 하면서 말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벗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벗이라면 마땅히 우정을 쌓은 사이일 텐데, 이런 식으로 친구를 곤란하게 하다니.
연은 혼자서 괘씸해져서 인상을 찌푸렸다. 짜증이 날 땐 역시 맛있는 걸 먹어야 했다. 연은 인상을 쓴 채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식어버린 남은 밥을 우걱우걱 입에 밀어 넣었다. 마지막 한 조각 계란말이도 굳이 묻지 않고 제 입에 넣었다.
연은 식사를 싹 마친 후에야 다시 하신후를 흘겨보았다.
“대체 왜 그런 자와 친구죠?”
“그건….”
“저도 곤란하지만 전하께서도 곤란해지신 거죠. 이제 제가 거절하면 이상한 소문이 더 퍼질걸요. 저한테 거절당하셨다고 말이에요.”
“설마 그런 소문이-.”
“여기 와서 보니까 사람들은 뒤, 뒷말을 하길 엄청 좋아하던걸요. 전하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소문을 벌써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아신다면-.”
굳이 그 말까지는 하지 말 걸 그랬다.
“물론 조, 좋은 사람이시라는 말씀도 많이 들었습니다. 후, 후, 훌륭한 군주시라고….”
연은 어정쩡한 말투로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하신후는 이미 살짝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그는 눈썹 한쪽을 비뚜름히 들어 올린 채 잠시 연을 쏘아보다가 밥상을 들고 부엌으로 가버렸다. 연도 다른 밥상을 들고 쭐레쭐레 그 뒤를 따랐다.
“저, 전하, 제 말을 끝까지 들어보세요. 제가 들은 모든 소문 속에서 모두들 전하가 몹시 요, 용모 단정하고 수려한 사내라는 말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 그럼 칭찬이죠. 다들 칭찬을 한 거죠.”
“그리 말해줄 필요 없다. 나도 내게 무슨 소문이 따르는지 정도는 알아.”
“다 허, 헛소문이죠. 저도 알고 있어요.”
“네가 안다고?”
부엌으로 앞서 사라졌던 하신후가 다시 얼굴을 내비쳤다. 그의 얼굴에 오랜만에 비웃음 같은 표정이 번졌다. 연이 움찔하는 차였다.
“네가 뭘 알겠느냐. 내 보기에 너는 제국에 잠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부토의 첩자가 분명한데 말이다.”
“…….”
“그러니 괜한 거짓으로 날 위로해줄 필요 없어.”
웬일로 첩자 얘기를 운운하지 않는가 싶었더니 이럴 때 써먹기 위함이었나 보다. 연은 좀스러운 사내의 뒷모습을 흘기며 쳇, 혀를 찼다.
적인 것은 둘째 치고 저런 자가 연의 마음에 들어와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저리 말끝마다 의심을 뱉는 자가 연을 마음에 두었을 리도 없었다. 하니 뜰의 나무는 역시 너무 오래 살아서 살짝 효능이 상해버린 것이 분명했다.
* * *
밥상을 물리고 나니 집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연은 간만에 찾아온 나른한 휴식에 마루에 늘어졌다. 볕을 쬐고 있는 것만으로 몸이 나른해져 슬그머니 눈이 감기기까지 했다. 사실 회운성으로 와서 깨어난 뒤로 줄곧 이런저런 일로 정신이 없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같은 일족인 사인 중에서도 연을 싫어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앞에서 적대시해오는 서오 일행은 그나마 나았다. 뒤에서 연을 꺼림칙하게 여기는 자들이 더욱 불쾌했다.
‘이리 추한 계집이 북왕의 관심을 받는다니 놀라워하는 기색들이었지…’
연이 자신들의 군주이자 고귀한 신룡이라는 것을 알면 그들은 뭐라고 할까.
그러나 자신을 가장 심란하게 만드는 것은, 그 말을 꺼낸다 해서 그들이 돌연 연을 반기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이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불안이었다.
연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은 채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서늘한 손끝이 미간에 닿았다. 연은 눈을 뜨고 자신의 미간에 손을 대고 있는 하신후를 올려다보았다. 햇볕을 등져 그림자가 진 하얀 얼굴이 수려했다.
그는 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툭,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뱉었다.
“한데 너는 언제쯤 저주흔을 지워 진짜 얼굴을 보여줄 생각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