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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30)화 (30/122)

30

연은 잠든 하신후를 얼빠진 얼굴로 잠시 내려다보았다.

이 집에 있으라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 명령을 정말로 따라줘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첩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면서 내 앞에서 너무 무방비한 거 아닌가.”

연은 침상 가장자리에 슬쩍 걸터앉아 하신후를 흘겼다. 눈을 곱게 감고 있는 모습이 평소보다 훨씬 유순해 보였다.

400년 넘게 살아온 존재라고는 영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는 어쩐지 웃고 있어도 날카로운 인상이 강했건만, 눈을 감으니 그냥 곱상한 사내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평소 늘 이 자의 얼굴을 한번 만져보고 싶어 하지 않았던가. 지금이 바로 그 야망을 실현할 기회였다.

연은 늘 신경 쓰였던 그의 콧날을 손끝으로 살짝 만져보았다. 역시 만지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적당히 따스하고, 날이 잘 서서 단단했다.

연은 그때부터 속눈썹과 이마, 머리카락을 차례로 살짝씩 만져보았다. 기절한 것인지 하신후는 그냥 잠만 새근새근 잘 따름이었다.

이제 보니 잠버릇이 심심할 정도로 고운 자였다.

연은 그의 입술을 마지막으로 슬쩍 만져보려다, 돌연 그때까지 느끼지 못했던 이상한 부끄러움에 손을 거두었다.

보기 좋은 선을 그린 입술이 제법 붉었다. 입술 아래로는 날렵한 목덜미와, 쇄골이 이어져 있었다. 옷의 앞섶은 난봉꾼처럼 어설피 여며져 있어 흐트러진 모습이 훤히 보였다.

연은 옅게 찡그린 눈으로 그것을 노려보다가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고 싶던 걸 봤으니 이제 되었지 뭐.”

그의 얼굴을 실컷 감상했으니 이제 더 볼 것도 없었다. 분명 그럴 것이다.

“그럼 이제 이 집 구경이나 한번 해볼까.”

구경이라 말하긴 했지만 엄연한 염탐이었다. 적의 수장의 숨겨둔 은신처라니 그야말로 염탐할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연은 어슬렁거리며 방을 빠져나와 어두운 복도를 두리번거렸다. 청결을 유지하는 것 말고는 별 주술을 걸지 않은 것인지, 불빛을 밝히는 술법의 흔적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 정도는 간단한 술법이니 술사 신분인 연이 선보인다 해도 이상할 것 없을 터였다. 연은 그리 생각하고 가볍게 주술을 써서 빛을 밝혔다.

복도의 벽에 점점이 별빛 같은 흰 빛이 밝혀졌다. 덕분에 주위가 한결 환하게 보였다.

“이 방은 뭐지?”

이 집을 나가지만 말라 하였으니, 딱히 들어가면 안 될 곳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들어가선 안 될 곳에 들어간다면 그건 연의 잘못이 아니라 하신후의 부주의였다.

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 있게 복도의 방 몇 개를 차례로 열어보았다.

방은 침실을 제외하고 모두 셋이었다. 하나는 빈방이었고, 다른 하나는 서고인 듯했으며, 침실에서 가장 먼 마지막 방에는 침상이 하나 더 놓여 있었다.

‘혼자 지내던 집이 아닌 건가? 왜 침상이 하나 더 있지?”

연은 서고와 마지막 방 사이에서 망설이다가 우선 마지막 방으로 들어갔다. 방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침상에 풀썩 걸터앉았다.

침상은 하신후가 누운 방처럼 몹시 청결했다. 단출하지만 포근한 이부자리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사람의 온기가 전혀 없어 썰렁하긴 했지만, 언제든 주인을 맞이할 준비를 마친 방 같았다.

게다가 어째서일까.

이 방은 틀림없이 하신후의 방이 아닌 듯했다. 그런 직감이 들었다. 분명 이 집에 한 사람이 더 살았던 것이다.

하을령일까?

아니면 설마, 친우라던 진희설일까?

연은 괜히 신경이 쓰여 침상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뭐라도 단서가 있는지 찾고 싶어서였다. 자신이 이렇게 집착하다니, 약간 자존심이 상하기는 했지만 뭐 어떤가. 이 또한 염탐의 일부였다.

기왕 첩자가 되었으니 첩자 노릇을 해 봐야겠다.

“정말 아무것도 없잖아. 쳇.”

연은 실망스러워서 괜히 침상에 앉은 채로 발을 휘휘 흔들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발꿈치에 퉁, 침상이 부딪혔다.

한데 그 부딪힌 소리가 좀 이상했다. 어쩐지 속이 비어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침상이니 그 안쪽이 비어 있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한번 확인해 볼까.”

연은 폴짝 침상에서 뛰어 내려와 신이 나서 침상 아래쪽을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만약 정말로 이 안에 뭘 숨겼다면 침상을 통째로 들어 올려 그리했을 리는 없을 것이다. 하면 여기 어디 잘 보이지 않는 이음새 같은 게 있을 터였다.

“아, 이건가?”

연은 눈을 반짝이며 침상 아래쪽 밋밋한 장식 기둥 하나를 슥 잡아당겼다. 기둥은 오랫동안 분리된 적 없는 듯 뻑뻑하게 맞물려 있었다. 그러나 약간 힘을 주자 곧 몸체로부터 분리되었다.

기둥 안쪽으로 작은 빈공간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 공간에는 연의 기대대로 무언가가 숨겨져 있었다. 그것은 서책 같아 보이는 물건이었다. 연은 얼른 그것을 꺼내 살펴보았다.

‘설마… 이건 일기장인가?’

첫 장에 날짜와 몇 줄의 글이 쓰여 있었다. 일기가 틀림없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낡고 오래된 일기였다.

연의 눈이 홀린 듯 일기를 따라 읽었다.

[오늘도 아비와 오라비 사이는 끔찍하다. 내 아비는 천박하고 투기심 가득한 자이나 다행히 내 오라비는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집안의 사내들을 모두 증오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면 내 핏줄까지도 증오했겠지.]

오라비…. 오라비라면, 설마 이것은 하을령의 일기장인 것일까?

이 방의 주인은 하을령이 맞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누군가 하을령의 일기장을 훔쳐 여기 숨기기라도 한 것일까.

[아비는 오라비의 모든 것을 빼앗고 싶어 한다. 아비 역시 본래는 이 정도로 못난 자가 아니었다던데. 어머니께서 앓아누우신 후로 모든 것이 망가졌다. 아니, 오라비가 자라나며 모든 것이 망가졌다. 나는 오라비를 원망하고 싶지 않다. 아비가 그를 투기하는 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다.]

[이 집이 싫다. 아비는 첩을 여럿 들이고 있다. 오라비가 어머니의 약에 독을 탄 첩 하나를 회운성 밖으로 추방했다. 그 일로 아비가 오라비를 옥에 가두었다. 쫓겨난 첩은 자진했다고 하던데, 나는 오라비가 그 여인을 몰래 처형한 것 아닌지 의심스럽다. 오라비는 내게도 진심을 숨긴 지 오래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 나는 어머니가 독살당하셨다고 믿는다.]

[매일 어디선가 피비린내가 난다. 곧 전쟁이 터질 것이라 한다. 전쟁이 난다면 나는 권윤을 데리고 달아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내 의무와, 백성을 저버리는 일이겠지. 오라비는 나더러 달아나도 괜찮다고 하나, 나마저 없으면 아비는 당장 그를 죽이려 들 것이다. 그리되면 오라비가 드디어 아비를 죽일지도 모른다. 아직까지는 둘 다 잘 살아 있다.]

[아비가 적이 보낸 자객의 손에 죽었다. 오라비는 전쟁터로 떠났다. 나도 그곳으로 갈 것이다.]

연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기를 넘겼다. 일기장은 끝까지 채워지지 못한 채였고, 전쟁터로 떠나겠다는 말로 맺어지고 있었다.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아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한이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일기장에는 즐거운 일이라고는 쓰여 있지 않았다. 매일 아비의 죄악을 원망하는 말들투성이였다. 이토록 괴로운 시절을 보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마지막 장의 하을령의 말투에서는 전쟁터로 떠날 수 있어 홀가분한 느낌마저 전해져왔다. 혹은 체념일 것이다.

그런 그녀가 지금은 이 제국을 통솔하는 황위에 올라 있다.

일전에 보았던 하을령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저 하염없이 슬퍼 보이는 여인이었다. 슬픔이 과해 분노가 된 듯한 그 얼굴이 생생히 기억났다. 아름다웠으나 용모만으로는 표정에서 드러나는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하신후에게 그녀의 죽었다던 정인에 관해 이야기하던 순간, 연은 하을령이 지닌 섬뜩한 슬픔을 깨달았다. 하을령은 아직도 지나간 일들을 괴로워하고 있었다.

연은 일기장과 침상의 기둥을 다시금 제자리로 되돌려놓았다. 어느새 새벽이 되어가고 있었다.

밀려드는 무거운 상념에 연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웅크렸다. 생각해보면 연은 아직 사람을 해쳐본 적이 없었다.

신관들이 연에게서 가져간 피가 어찌 쓰였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연의 손으로 직접 누군가를 해친 적은 없었다. 그러나 하신후는 전쟁을 겪은 자였다. 그리고 전쟁 전에도, 누군가를 벌하고 처형했을 것이다.

울적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왜 이리 울적해진 것인지는 연 자신도 차마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연은 차라리 잠이라도 조금 청해보려 하을령의 침상으로 올라가 누웠다. 그러나 잠은 암만 시간이 흘러도 오지 않았다. 대신 일기장의 말들이 한층 선명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다. 점점 더 울적해지던 연에게, 홀연히 기묘한 향기가 전해져왔다.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닌데 그윽하고도 감미로운 향기가 연을 감싸듯 가까워져 왔다.

“…이게 무슨 냄새…. 아, 뜰에 있던 그 과일 냄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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