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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매를 붙든 것뿐인데 갑자기 연의 머릿속에 지난 일이 모조리 떠올랐다.
삼진에서 둘이 손을 잡고 걸어 다녔던, 지금 생각해보니 다소 황망하고 수치스러운 과거까지 한순간에 생생히 기억이 났다.
“무엇이 염려되어 그러는 거지?”
그녀가 갑자기 멍청하게 서 있자, 하신후가 조금 고개를 숙여오며 물었다. 가까워지니 그에게서 좋은 향기가 풍겼다. 연은 움찔하며 얼른 소매를 놓아주고서 뒤로 물러났다.
“찻값을 치, 치러야죠.”
“네가?”
“제 치, 친구들은 지금 돈을 잃어버려서 찾으러 간 것입니다. 찾지 못하고 돌아오면 가게에 왔다가 값을 치르기 얼마나 곤란하겠습니까.”
“그러한가.”
그는 중얼거리더니 돌아서서 연과 가게 주인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연이 얼핏 보기에도 차와 다과의 값보다 곱절을 훨씬 넘을 듯한 지전을 꺼내 주인에게 내밀었다.
“이 여인의 일행이 돌아오거든 급한 용무로 먼저 떠났다고 일러라.”
이제 하신후의 나른한 말투에는 졸음 기마저 묻어났다. 이러다가 혹시 길에서 잠드는 건 아닌지 염려가 들 정도였다.
‘내가 누군지 알면 절대로 내 앞에서 잠을 청할 수는 없을 텐데.’
연은 다소 얼빠진 눈으로 하신후를 바라보며 속으로만 생각을 곱씹었다.
그는 가진 것이 많은 자이니, 가게에 얼마를 지불하든 그것은 그가 마음대로 할 일이었다. 가게 주인의 당황한 표정을 뒤로하고 연은 묵묵히 가게를 나섰다.
“이제 어, 어디로 가시게요?”
“이리 무사히 너를 만났으니… 이제는 내 집으로 가야지.”
그야 사람이 제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그 집으로 자신도 데리고 가는 것인지, 그것이 궁금할 따름이었다.
물론 이리 무방비하게 느껴질 정도로 기력이 빠진 하신후를 지켜볼 수 있다니 이것은 이것대로 꽤 재미가 있었다.
그는 지금 당장 목을 비틀어 죽여도 제대로 반항하지 못할 것 같았다. 물론 정말로 그리한다면 기력을 짜내어 반항하겠으나, 지금이라면 평소보다 훨씬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연이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줄은 까마득히 모르는 듯했다.
집으로 간다 하였으니, 아마 본성 북왕궁으로 돌아간다는 뜻일 것이다. 연의 숙소도 어차피 본성 안이니 나온 곳으로 돌아가는 셈이었다.
어디 무시무시한 곳으로 데려가는 건 아닌지 약간 불안하긴 했는데, 그냥 같이 집으로 돌아가 줄 상대가 필요했던 것 같았다.
하기야 행여 충동적으로 기력을 소모하고 흐리멍덩해진 하신후를 때마침 강한 자객이 습격하기라도 한다면 어쩌겠는가. 그럴 때는 우선 연이 그의 목숨을 보존시켜둘 필요가 있었다. 죽이더라도 연이 뜻할 때 그리해야 할 테니 말이다.
“전하, 한데 보, 본성은 이 방향이 아닌데… 어디로 가시는 것입니까?”
설마 피로가 지나쳐 방향치가 된 것은 아니겠지 싶었다.
“나도 알아.”
하신후가 힐끗 연을 돌아보고는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부드러운 눈웃음은 보기에 좋았으나 역시 조금 흐리멍덩한 느낌이 들었다. 평소의 날 선 듯한 기민함에 피로감이 한 겹 덧씌워져 있었다.
“하면 왜 이, 이 길로….”
“집으로 간다 하지 않았느냐.”
그가 아무리 피로하여 평소보다 더 나른해졌다 한들, 행인들이 그의 앞길을 자연스럽게 터주는 것은 이전과 똑같았다. 그러다 약간 앞서가던 하신후가 갑자기 휘청거렸다. 연은 깜짝 놀라 휘둥그레 눈을 뜨며 그를 붙잡았다.
꼴사납게 넘어지면 불쌍하니 잡아주려던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과격하게 손이 튀어 나가는 바람에 하신후를 홱 끌어당기는 꼴이 되었다. 덕분에 그의 등이 연의 품에 닿을 뻔하였다.
연은 기겁하며 그를 밀어냈다.
“돌부리에 바, 발이라도 걸리셨습니까.”
그러나 돌아오는 변명이 없었다. 연은 멈칫 무언가를 깨닫고 그를 홱 올려다보았다.
역시나 하신후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이었다.
“네가 나를 하도 환자 대하듯 염려하며 지켜보기에 장난을 친 것이다.”
연의 얼굴이 즉시 찌푸려졌다.
“남쪽까지 가서 그런 것만 배워 오셨습니까.”
“차라리 네게 부축이라도 해달라 할 것을 그랬나.”
“남들이 보면 웃을 것입니다.”
아니지, 일부러 남들에게 소문까지 낸 자였다. 연을 당장에 더욱 이용하려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연은 그 생각을 떠올리니 괜히 괘씸해져 한층 부루퉁한 얼굴을 해 보였다. 화를 내는 데 골몰한 나머지 그녀는 하신후가 자신을 어디로 데리고 가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본성으로 돌아가는 길과는 영 반대 방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낯선 거리에 들어선 뒤였다. 민가의 초입인지 거리는 야시장에 비해 매우 조용했다.
하신후는 어리둥절한 연의 손을 자연스럽게 붙잡고는 캄캄한 길로 접어들었다.
“어두우니 내 돌부리에 발이 걸릴까 봐 네 힘을 빌리는 것이다.”
“…….”
“왜 답이 없느냐?”
연은 저도 모르게 원래 이리 여인의 손을 쉽게 붙잡느냐 물으려다가 그만두었다. 뿌리치지 않으며 그리 묻는 것은 너무 구차해 보였다.
차라리 그런 물음을 던지는 것보다야, 이 괘씸한 손을 손목 채로 동강 내는 편이 그들의 관계에 더 걸맞았다.
“여기가 내 집이다.”
한참을 걸어간 그가 멈춰 선 것은 민가 초입의 어느 평범한 기와집 앞이었다. 너무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허름하지도 않은 가옥이었다.
그러나 그가 대문에 손을 가져다 대자 그 집이 그리 평범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대문에서 잠시 빛난 것은 분명 주술로 그린 결계였다.
“아직 본성의 누구도 내가 여기 돌아온 것을 모르거든. 이곳은 내가 지금처럼 몰래 숨을 때 쓰는 내 집이다.”
왜 돌아온 것을 아무도 모르게 하려는 것인지 물으려다가, 연은 또다시 물음을 삼켰다.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제, 제가 알지 않습니까. 회운성에 오신 것을 말입니다.”
그는 대문 안으로 들어서며 부드럽게 연의 손을 끌어당겼다.
“내 너를 보러 온 것이니, 너만 알면 되었지.”
연은 슬며시 밀려드는 당혹감에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대문을 넘어서자마자, 아담한 뜰에서 은은히 달콤한 듯한 향기가 풍겨왔다. 처음 맡아보는 좋은 향기였다.
과일 냄새 같기도 했다.
연은 저도 모르게 곧바로 반응하여 허공에 코를 킁킁거리고 말았다. 그 모습에 하신후가 옅게 웃음을 지었다.
그 바람에 연은 하던 것을 멈추고 태연한 시늉을 해 보였다. 또다시 이 향을 내는 과일이 낯설다는 사실을 들켰다간, 제국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첩자라 의심받을 것이다. 어쩐지 오늘 밤은 첩자 운운하는 소리를 그리 듣고 싶지 않았다.
농인지 진담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칫 첩자 얘길 계속 듣다가 정말로 사달이라도 나게 될까 봐 꺼림칙했다.
다행히 하신후는 별말 없이 뜰을 지나 안으로 들었다. 주인이 오래 자리를 비웠기 때문인지 집안 가득 고적함이 스며 있었다. 그럼에도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다는 점이 신기했다. 무슨 술법이라도 걸어둔 걸까? 연은 사실 그런 일상적인 술법에는 아직까지 해박하지 못했다. 물론 조금만 공부하면 연도 쉬이 능통해질 테지만 말이다.
아무 생각 없이 하신후를 따라 안으로 들던 연은, 그가 복도 끝의 방문을 열자 그제야 발길을 우뚝 멈췄다.
“…이곳은 침실 아닙니까.”
곱게 놓여 있는 침구와 침상을 보자 순식간에 눈앞이 아찔했다.
‘아니 이 방자한 자가-?!’
이리 순식간에 오만가지 감정이 휘몰아칠 수 있다니, 스스로도 아연할 지경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정신줄을 단단히 붙잡아야 했다.
적의 침실에 순진하게 따라 들어온 자신을 나무라는 것은 나중이었다.
연이 정신줄을 붙잡으며 침착해지려 애쓰는 순간이었다. 아무 대꾸도 없던 하신후가 그대로 침상으로 다가갔다.
“편히 있거라. 대신 이 집에 있어야 해. 그게 내 명이다.”
어쩐지 목소리가 심히 웅얼거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연이 미처 대꾸를 뱉기도 전, 그가 침상 위로 혼절하듯 쓰러졌다.
“전하…?”
연은 놀라 누워 있는 하신후를 바라보다가, 멍청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가니 작게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야말로 기절하듯 잠든 것이 틀림없었다.
“…하신후 님?”
“…….”
“하신후야?”
슬쩍 과감한 호칭을 써보았으나, 돌아오는 것은 역시나 그의 잠든 숨소리뿐이었다. 침상의 하신후는 그야말로 언제든 홀랑 죽일 수 있는 온순한 먹잇감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