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안색이 나쁘지는 않구나.”
하신후는 태연히 다홍의 자리에 앉으며 중얼거렸다.
“저, 저 말이십니까.”
“그럼 너지, 또 누구일까.”
답해오는 하신후의 목소리가 어쩐지 낮게 잠겨 있었다. 마치 고뿔이라도 앓다 온 사람 같았다. 아니면 어디 가서 잠이라도 실컷 청하다 온 것 같기도 했다.
연은 얼이 빠져 하신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귀족을 이리 허락 없이 빤히 바라보는 건 예법에 어긋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치기도 했다. 그러나 뭐, 이리 갑자기 나타나놓고 고작 그런 것을 문제 삼지는 않을 듯했다.
“나, 남쪽에 계신 거 아니셨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여기 있지.”
“네, 제 앞에 계시네요. 너, 너무 갑자기 나타나셔서 놀랐습니다.”그가 없는 사이 하도 여러 사람을 만났더니 다시 만난 그가 새삼 낯설었다.
익숙한 듯했다가 금세 이리 낯설다니, 순식간에 일어나는 자신의 마음의 변화가 괴이할 지경이었다.
“놀라기만 했느냐. 반갑지는 않고?”
그가 눈웃음을 지으며 연을 바라보았다. 한데 이제 보니 하신후의 안색이야말로 좋지 않은 듯 보였다. 여전히 미려한 얼굴임은 변함이 없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조금 피로해 보였다. 연은 눈을 약간 찡그리며 그를 빤히 바라보다 물었다.
“나, 남쪽에서 무슨 봉변이라도 당하셨습니까. 안색이 나쁜 거 같은데….”
“네가 내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허락을 구해야 할 일인데.”
“답하기 싫으신 일에는 느, 늘 그리 말 하시는 것 같네요. 차, 차라리 답을 주기 싫다 하시지요.”
연의 말에 하신후가 가볍게 웃음을 보였다. 그러나 역시나 안색이 창백하여 웃음조차 조금 힘이 없는 듯 느껴졌다.
“남쪽에서 일을 마치고 곧장 이리로 오느라 피로하여 그런 것이겠지.”
“곧장이요?”
“그래, 조금 전에야 일이 끝났거든. 지난했지.”
문득 그의 말이 평범한 이야기가 아닌 듯 들렸다. 분명 조금 전 일이 끝났다 하지 않았던가. 조금 전 남쪽에서 일을 마친 사람이, 어찌 여기 와 있단 말인가.
거기서 여기까지 거리가 얼마인데.
퍼뜩 연의 뇌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삼진에서 황제 하을령이 말했던 바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녀 역시 황궁에서 삼진의 그 약속된 장소까지 단숨에 오갔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만한 거리를 오가려면 꽤나 영력을 크게 소진하게 될 터였다.
한데 여기서 남쪽 지역이라면, 아무리 가까운 곳으로 어림해도 황궁과 삼진 사이의 거리보다 족히 두 배는 넘지 않는가.
“전하께서는 생각보다 어, 어리석은 구석이 있으신가 봅니다. 그, 그렇게 힘을 남용하시면 때를 틈타 전하를 노리는….”
노리는 자들이 있으면 어쩌냐고 물으려다가, 연은 어색하게 말을 흐렸다.
그를 노리는 건 다름 아닌 연 자신이다.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인가.
생각해보면 그가 이리 수척해진 지금이야말로, 그를 노리기에 좋은 때인지도 모른다.
하나 그런 짓은 신룡의 자존심에 걸맞지 않은 일이었다.
연은 하신후가 가장 멀쩡할 때에라도 그와 정정당당하게 맞붙을 자신이 있었다. 그것이 진정한 신룡의 긍지이지 않겠는가.
“아, 아무튼, 왜 그리 이곳에 급히 오셨습니까. 또 무슨 일이 있나요?”
“여전히 질문이 많구나.”
“전하께서 버, 벌을 주지 않으시니 제가 날로 겁이 없어지나 보네요.”
입으로는 아무 말이나 답을 하면서도, 내심 하신후가 자꾸 답을 제대로 하지 않는 듯하여 기분이 묘했다. 그가 무엇을 숨기는 것 같은 느낌이 싫었다.
그가 남쪽에 간 것은 리경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설마 급히 돌아와 리경을 데리고 무슨 짓을 하려는 건 아닌지 신경이 쓰였다.
하신후는 잠시 침묵하며 묘한 눈빛으로 연을 쏘아보았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것이 뭔가 못마땅한 표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네게 현한이 다녀갔다는 말에 놀라 급히 돌아온 것이다. 네가 정말로 몰라서 물은 것인지, 아니면 내게서 직접 이 말을 들으려 물은 것인지 모르겠군.”
이번에는 연이 입을 다물 차례였다.
저 말은 꼭 연을 염려하여 급히 돌아오기라도 했다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설마 현한이 염려되어 돌아온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남쪽에 있으면서도 이곳의 소식을 잘 듣고 있기는 했는가 보다.
“현한 님을 뵙기는 했지만 벼, 별일은 없었습니다.”
거짓말이었다. 하나 어쩐지 희롱당했다 말하기는… 부끄러웠다.
“네가 염려되어 급히 왔다고 말했는데, 대답이 그것뿐이라니 섭섭한걸.”
“피로하시다면 차, 차를 드시는 건 어떠십니까. 마침 상에 따뜻한 차가 올랐는데 그 차, 차의 주인은 없으니 말입니다.”
“…답을 피하는 재주가 나보다 낫구나.”
하신후는 작게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연은 스스로도 종잡을 수 없는 마음 때문에 말없이 그가 차로 입술을 축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저, 정말로 제가 염려되어서 여기까지 갑자기 오셨습니까?”묻고도 영 믿기지 않았다. 틀림없이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 같았다.
하신후는 곧바로 답을 주는 대신 가늘게 찌푸리듯 뜬 눈으로 연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알쏭달쏭하여 연도 잠시 말을 덧붙일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묻고 싶은 것이 떠올랐다. 묻고 싶은 것이랄까, 따져야 할 문제에 가까웠다. 하신후는 분명 삼진에서 연에게 선택권을 주는 시늉을 했었다. 그의 가짜 정인이 되어 함께 진희설을 속여줄 것인지, 연에게 연 자신의 의지를 묻지 않았던가.
한데 그는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고 말해놓고서는 물러설 길조차 남지 않도록 소문을 퍼뜨렸다. 그가 왜 그처럼 이중적으로 군 것인지 따져 물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연이 막 질문을 가다듬어 뱉으려던 참이었다.
“네 친구들을 계속 기다릴 생각이냐.”
하신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친구들이라 하는 것을 보니, 연이 함께 있던 일행이 누구인지 벌써 다 아는 모양이었다. 하신후는 그 말과 함께 돌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 저희를 지켜보셨습니까? 치, 친구라 하시는 걸 보니….”
“나도 내가 그처럼 남을 훔쳐보는 음침한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네 탓이다.”
그가 연을 슬쩍 흘기며 나직하게 답했다. 농이 섞인 말투였다.
그가 왜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것인지 몰라, 연은 어리둥절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곧 하신후는 조금 더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정말로 여기서 계속 친구들을 기다릴 것이냐.”
“그, 그럼요?”
“내가 이리 힘들게 너를 보려 왔는데 너는 여기에 있겠다고?”
“…….”
“내가 너의 주군이니 너는 나를 따라와야지.”
그게 대체 무슨 논리인지, 듣기에 어리둥절해질 정도였다. 어쨌든 리경과 다홍이 돌아올 때까지 앉아 있다가 여기 그가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적절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유는 스스로도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아무튼 그들이 하신후를 보았다가는 결국 곤란해지는 것은 연 자신일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연이 엉거주춤 몸을 일으키자, 하신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가게를 나서려 들었다. 걸음걸이에도 조금이지만 피로가 묻어나는 듯했다.
그러게 왜 그 광활한 영토를 가로질러 갑자기 여기 나타났느냔 말이다. 이런 것을 두고 화를 자초한다고 평해야 할 것이다.
“그, 그대로 가시면 안 됩니다. 잠시만요.”
연은 가게를 나서려는 하신후를 급히 붙잡았다. 소매를 잡아당기니 그는 순순히 걸음을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는 그의 눈빛이 멍했다. 정말로 피곤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