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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껏 불쾌해졌던 연을 위로해준 것은 다름 아닌 리경의 제안이었다.
“오늘은 일을 마치면 본성 밖을 구경하러 나가면 어떨까요? 마침 야시장이 서는 날이래요.”
“야시장이라고?”
연은 귀가 쫑긋해지는 말에 얼른 눈을 반짝였다. 삼진에서 갔던 야시장도 제법 재미있지 않았던가. 물론 그때는 도중에 은곡을 만나버리는 바람에 김이 샜지만 말이다.
야시장이라니. 말만 들어도 두근거렸다. 그런 좋은 정보를 알려주는 리경이 새삼 유능한 동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평범한 얘길 나눌 때 보면 리경은 그저 눈치 빠르고 잡정보에 능한 친구일 따름이었다.
한데 하신후는 정말로 리경이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믿고 있는 걸까?
미소를 건네오는 리경의 얼굴에 문득 하신후의 말이 겹쳤다. 하신후는 리경이 용의 책의 본래 주인이었던 여인을 죽이고 책을 빼앗았다고 했었다.
리경에게 그 일에 대해서도 물었어야 했는데. 깨어난 뒤로 줄곧 모든 일이 정신없이 흘러가 미처 그것을 물을 틈조차 없었다.
아니, 사실은 스스로 마음을 정하지 못한 것일지도 몰랐다.
만약에 리경이 정말로 사람을 죽이고 책을 빼앗았다면?
그때 자신은 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것일까.
연이 진정 이들의 제대로 된 군주였다면, 죄를 묻고 그에 마땅한 벌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올바른 세상을 만드는 길일 테니.
그러나 지금의 연은 몰래 숨어든 첩자일 뿐, 그들에게 군주도 무엇도 아니었다. 오히려 종족의 근본을 따져 왕위를 되찾으려 드는 역도에 가까웠다.
일평생 일족을 구원할 신룡이라며 떠받들어져 온 연에게 그런 사실은 차마 직시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우선은 지켜보자. 나는 지금까지 신전 안에서 남들이 말해주는 것들만 들어왔으니까, 이젠 내 눈으로 직접 세상을 지켜보고 판단을 내리는 거야.’
그러려면 우선 여기 저자부터 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절대로 저자에서 파는 음식들이 궁금해 그러는 것만은 아니었다.
* * *
“와, 이 주변 상인들이 야시장 날이면 모두 여기로 찾아온다더니 정말 그런가 봐요. 참으로 화려하네요!”
“연아, 저기 봐. 네가 좋아할 만한 게 잔뜩 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마침 놀러 나온 날이 정말로 장날이었던 덕인지 야시장은 연의 생각보다 더 화려했다. 삼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덕분에 연은 지월이며 현한, 리경에 관한 의혹마저 잠시 뒤로 미룬 채 밤거리 풍경에 푹 빠져들 수 있었다.
줄지어 선 노점들이 저마다 맛있는 냄새를 풍겨대고 있었다. 길가에 늘어선 가게 가판대에도 김을 모락모락 풍겨대는 음식들이 한가득했다.
“고기 꼬치! 새 꼬치! 나까지 배가 고파진다. 아까 분명 저녁 먹었는데, 이러다 살찌겠네.”
다홍이 눈을 번뜩이며 꼬치구이 노점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연도 눈을 빛내며 다홍을 따라갔다.
그러다가도 멈칫 삼진에서의 일이 떠올라 걸음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다홍과 길거리 먹거리를 사려다가 괜히 사인이라며 차별을 받은 일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러나 막상 살펴보니, 이곳엔 그곳에서처럼 연 일행을 기분 나쁜 듯 흘깃거리는 시선이 없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아이쿠, 본성에서 오신 나리님들이십니까? 그럼 값을 싸게 받아야겠네요.”
꼬치구이집 주인은 매우 친절했다. 전에 만난 그 주인과는 영 딴판이었다. 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왜, 왜요?”
본성에서 나왔다는 건 자신들이 입고 있는 정복 덕분에 알아챘을 것이다. 어깨에 버젓이 북왕의 문양이 새겨져 있으니 말이다.
“성에서 일하시는 나리들 덕분에 제가 이렇게 안전하게 장사를 할 수 있으니, 그야 당연히 은혜를 갚는 마음으로 값이나마 싸게 드려야지요. 제가 부자였다면 그냥이라도 드렸을 것입니다.”
주인이 인심 좋게 웃으며 답했다.
사인이라고 고깝게 바라보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혹시 밤이 어두워 자신들의 검푸른 머리칼이 잘 보이지 않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어서 받으세요. 맛있거든 또 찾아주십시오. 저는 야시장 열릴 때마다 이 자리에서 노점을 여니까요.”
“가, 감사합니다.”
연은 노릇노릇 구워진 닭꼬치를 받아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주인이 덩달아 사람 좋게 웃어 보였다. 정말로 여길 꼭 다시 오고 싶어지는 웃음이었다.
이 개기월식 문양의 정복이 이처럼 큰 도움을 줄 줄이야.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물론 모두가 그들을 꼬치집 주인처럼 아주 친절하게 대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삼진과 비교하면 전혀 달랐다.
여기서는 아무도 대놓고 적대적인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보지 않았다.
주인의 친절 덕분인지 꼬치는 더없이 맛있었다. 노릇노릇 구워진 고기가 이렇게 맛있는 것일 줄이야. 연은 기분이 좋아져 콧노래가 나올 지경이었다.
제국인들이라고 해서 모두 나쁜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정복을 입고 나오길 잘했네. 앞으로 늘 이렇게 입어야 하려나 봐.”
연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가, 스스로 당혹스러워 입을 다물었다. 하신후의 부하들이 입는 옷을 늘 입겠다니? 이 얼마나 황당한 소리인가.
“여기 온 뒤로 그나마 사는 게 한결 나아진 건 틀림없네요. 아직 다른 신입 동료들이 없어서 그런지 우릴 괴롭히는 사람도 별로 없고요. 그 서오라는 선배도 오늘은 잠잠했잖아요.”
리경이 안심한 듯 말했다. 세 사람은 곧 어느 다과점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차와 다식을 함께 파는 가게였다. 밤이라 등롱을 내건 모습이 아기자기하고도 분위기 있었다.
그러나 주문한 다식이 나오기도 전이었다.
“앗, 나 어쩌지? 오다가 지갑을 흘렸나 봐. 어떡해!”
갑자기 다홍이 사색이 되어 외쳤다. 세 사람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얼마 들어 있었는데?”
“그야 가진 돈 전부지!”
“그럼 안 되잖아요!”
다홍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초조하게 외쳤다.
“아까 장신구 팔던 가게 구경할 때 괜히 팔찌며 반지를 껴보다가 옷에서 떨어트렸나 봐. 어서 가서 찾아볼래!”
“가, 같이 가요. 제가 주술로 찾는 걸 도와볼게요. 뭘 찾는 건 원래 제 특기거든요.”
특기라고 말하다니, 새삼 리경이 듬직해보였다. 그가 다홍보다 듬직하게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다홍이 울상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연아, 네가 자리 좀 지키고 있어. 음식 시켜놓고 셋 다 나가면 주인이 당황할 거 아냐. 금방 다시 돌아올게.”
연이 미처 알겠다고 답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후다닥 자리를 떠났다. 연은 두 사람이 떠난 자리를 처량하게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곧 어여쁘게 꾸민 다식과 따뜻한 차 세 잔이 나왔다. 그러나 차가 나와도 두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대체 어디까지 간 걸까? 설마 장신구 가게에 지갑이 없었던 걸까? 만약에 계속 돌아오지 않을 거라면, 이 다식은 먼저 한 입만 맛보아도 되는 걸까?
갖가지 근심이 머릿속을 점령해 갈 때였다.
“자리가 비었으니 내가 앉아도 될까.”
고개 숙이고 다식을 노려보고 있던 연의 귓가에 문득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은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눈에 들어온 것 역시 몹시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렇게 보기 좋은 얼굴을 다른 이와 착각할 리도 없거늘….
연은 놀라 얼떨떨해진 채 상대를 마주 보았다. 홀연히 나타난 하신후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