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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26)화 (26/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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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귀신 부리는 술사를 보게 될 줄이야.

술상 소리만 아니었다면 훨씬 흥미진진했을 것이다. 연은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죄, 죄송합니다, 나리. 저는 일을 하는 중이라 수, 술을 못 마시는데요.”

황당함에 비하면 공손한 말투였다.

사내는 드디어 연을 돌아보았다. 차가운 눈길이었다. 사내가 내뱉은 말은, 연을 한층 당혹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여기 오는 길에 너는 술을 마셔 내내 정신을 잃고 있었다지. 내 형님께서는 생각보다 더 무심하시구나.”

“…….”

“그 달콤한 소문 속 상대 여인이 쓰러졌다는데, 이리 내내 기별 한 번 주시지 않을 줄이야.”

‘형님’이라고?

이 자가 형님이라 이른 이는 분명 하신후일 터였다.

한데 하신후의 동생은 황제 하을령 하나가 아니던가?

사내는 관찰하듯 연을 뜯어보고 있었다. 저주흔을 응시하는 시선에는 조용한 경멸까지 배어 있었다.

‘나를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있네. 일부러 저러는 건가?’

연은 흔들림 없이 그의 시선을 마주했다. 너무 당혹스러워 치밀었던 짜증조차 수그러들 정도였다.

저자가 정말 하신후의 아우라면 어째야 하나. 신관들은 그런 얘긴 알려준 적이 없었다. 하여간 연을 여기 보낸 용의 산의 무리는 정말이지 멍청한 자들이었다.

설마 일부러 알려주지 않기라도 한 걸까?

한 번도 들지 않았던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하신후의 아우라는 말에 놀랐다는 사실을 들킬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의심을 살지도 몰랐다. 주인의 혈연관계 하나 알지 못하는 부하가 어디 있겠는가.

연은 잠자코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떻게든 이 자리는 그냥 넘기자. 버텨야 해…!’

이윽고 가면 쓴 하인 둘이 술상을 가지고 나타났다. 그들은 비단 방석으로 자리까지 곱게 마련했다.

하인들은 물러가지 않고 그들 곁을 지켰다. 더 시중들 것을 기다리는 모양새였다.

사내는 연에게 차갑게 고갯짓했다.

“이리 가까이 와서 앉아라.”

아까 분명 업무 중이라 술은 안 된다 답했었는데. 연의 말은 말로 들리지 않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오만이 몸에 밴 자였다. 꼿꼿이 편 허리까지도 그리 보였다. 그는 평생 미소라고는 지어보지 않았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명이 들리지 않은 건가?”

“아, 아닙니다.”

연은 조심스레 그의 앞에 착석했다. 사내는 불러놓고서 연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는 한참 제 입으로 술잔만 가져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연의 앞에 놓인 잔에 술을 따랐다.

“마셔라.”

“저, 저는 술을 마실 수가-.”

“명을 하는데 아까부터 알아듣지를 못하는군. 내 형님 때문에 방자해진 거라면, 네 처지를 좀 더 쉽게 깨닫게 해줄 수도 있어.”

그 말에 담긴 뜻이 천박했다. 연은 흠칫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대낮부터 광인을 보는 기분이었다.

지금 제 형의 정인이라 소문난 여인에게 뭐라 떠들고 있는 건가. 딱히 하신후를 위해 연을 경계해주려는 듯한 충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느껴지는 것은….

“…제 처지가 대체 무, 뭔데요?”

“이런 것이겠지.”

사내의 손이 덥석 연의 손목을 붙잡았다.

휙-.

“??!”

예상은 했지만 정말로 이런 것일 줄이야. 거칠게 팔이 끌어 당겨진 연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바람에 그녀의 앞섶이 술잔을 엎질렀다.

순식간에 옷과 살갗이 축축하게 젖어버렸다.

“이 무슨… 황당한 짓인지…!”

연은 눈썹을 구기며 그를 노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의 고얀 손을 손목째로 동강 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사내는 연의 손목을 잠시 움켜쥔 채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그러더니 픽 냉소하며 말했다.

“살갗이 차갑구나. 그런 여인이더라도 잠자리에서는-.”

“그만 하시죠.”

연은 인상을 찌푸리며 사내를 노려보았다.

“일부러 그러시는 것입니까?”

분명 일부러 잠자리 운운하는 게 틀림없었다. 누가 보아도 이 자는 연을 능멸하려 들고 있었다.

연은 세차게 손을 뿌리치며 몸을 바로했다.

사내는 입매를 일그러뜨린 채 연을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하인들을 돌아보고는 그들이 당황한 기색을 비치고 있음을 확인했다.

‘뭐야, 하인들에게 보여주려고 일부러 그러기라도 한 거야? 대체 뭘 어쩌고 싶은 거지…?’

연은 경멸을 숨기지 않으며 사내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참지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말을 뱉고 말았다.

“설마 정말로 제가 부, 북왕 전하의 여인이라는 소문을 믿고 이러시는 건 아니겠죠. 대낮에 이런 행패라니 광인은 아니신지 의심이 들 지경이네요.”

사내의 얼굴이 구겨졌다. 안 그래도 눈빛이 싸늘한 자인데, 인상을 쓰니 한층 살기가 밴 듯 보였다.

그는 연을 잠시 노려보다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더니 연의 손목을 낚아챘던 제 손을 닦았다.

“너는 방자하군. 형님께선 어째서인지 그런 여인을 좋아하시는 편이셨지. 예전부터 말이야.”

저 말도 들으라고 저러는 것이다.

예전 여인을 운운하며 연을 도발하려는 의도가 훤하다.

‘이런 건방진 놈을 보았나. 지금 자기가 나를 만지고선 손을 닦는 건가? 나를 만지고 손을 닦아? 감히 내 앞에서?’

어디서부터 분노를 느껴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연은 기가 막혀 술상을 엎어버리고 싶었다.

젖어버린 옷에서 술 냄새가 풀풀 풍기기까지 했다. 그 냄새에 한층 기가 막혔다.

사내는 양손을 다 닦고서 손수건을 하인에게 버리듯 건넸다. 그러더니 연을 쳐다보지도 않고서 명했다.

“네 방자함은 충분히 감상했다. 하니 이만 꺼져.”

차갑다 못해 비웃음 섞인 듯한 목소리였다.

‘꺼져? 나더러, 꺼지라고?’

연은 너무 황당해 호흡이 뒤엉킬 지경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정말로 이 자리에서 이자를 도륙할 수는 없지 않나.

연은 황당한 채로 일어났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은, 이 미친 사내에게 인사를 올리지 않는 게 전부였다.

* * *

“연아, 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장서각에 도착하자마자 다홍이 질겁한 표정을 해 보였다. 리경도 놀라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아까 그분은 틀림없이 현한 님 같았는데?! 한데 그분이 갑자기 왜 이런 짓을 하신 거죠?”

현한, 그게 그 사내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역시나 리경이었다. 보면 볼수록 리경은 모르는 게 없었다. 특히나 하신후를 둘러싼 귀족들의 관계도나 윗전들 일이라면 매우 믿음직스럽게 아는 바가 많았다. 고향의 멍청이 신관들과는 영 달랐다.

리경이 그 사내를 아는 걸 보면, 그 사내는 정말로 하신후의 아우가 맞는 모양이었다.

서고지기 노인 역시 연의 몰골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의 배려로 연과 리경, 다홍은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차라리 숙소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는 게 낫겠어. 그렇게 젖어서는 속이 다 비쳐 보이잖아.”

다홍의 걱정에 연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숙소에 가는 것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었다.

“별로 비치지는 않는걸. 그보다는 술 냄새가 지독하네. 그런데 아까 그 현한 님이, 정말로 북왕 전하의 동생이긴 한 거지?”

현한이 누군지 아예 모른다고 말하기보다는, 은근슬쩍 이렇게 질문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연의 의도대로 리경이 금세 고개를 끄덕여왔다.

“아무래도 동생분이 아니라 할 수는 없겠죠? 뭐, 이것 역시 우리 같은 일개 술사들이 이러쿵저러쿵하기엔 좀 위험한 얘기겠지만요.”

리경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동생이 아니라 할 수는 없겠지만… 현한 님은 서자라서 하 씨 성을 물려받지 못하신 분이잖아요. 폐하나 전하께서 그분을 정말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는 아무도 모르죠. 소문만 무성하니까요.”

서자라 함은, 이복동생이란 뜻일 것이다.

연은 비로소 약간이나마 현한이 내비친 적대감의 원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하신후를 몹시 싫어하는 게 틀림없었다.

하여 일부러 그의 정인일지도 모르는 연에게 웃기는 짓거리를 한 것이다.

‘내 생각보다 더 우스운 작자였잖아? 왜 갑자기 애먼 내게 자기 원한을 푼단 말이야.’

너무 황당해서 오히려 분노가 약간 잦아들 정도였다. 용과 지렁이가 진심으로 맞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는 무표정을 무기 삼았을 뿐, 과히 지렁이 같은 놈팡이인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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