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23)화 (23/122)

23

“놀랐구나. 하지만 아니다. 나는 전하가 아니야.”

하신후의 얼굴을 지닌 자가, 그와는 다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연은 그제야 방안에 서 있는 자의 기운이 하신후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간단한 변신술이었다. 한데 어쩌자고 속았단 말인가.

부끄러움에 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고작 이 정도 변신술에 속아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다니.

“…지, 지월 니, 님이십니까.”

“그래. 내가 지월이다.”

하신후와 똑같은 얼굴로 변신한 사내가 느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사내가 맞기는 한 것인가.

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서 하신후를, 아니, 하신후와 똑같은 얼굴을 쏘아보았다. 대체 왜 그 얼굴로 변신해 사람을 놀라게 한 것인지 당장 따져 묻고 싶었다. 그러나 물어 봐주길 기대하는 것 같은 지월의 태도를 보니, 어쩐지 오히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왜 북왕 전하의 모습을 하고 너를 만난 것인지 궁금하지 않으냐? 왜 묻지 않아?”

“…….”

“흥, 생각보다 재미없는 자로군.”

지월의 투덜거림과 동시에 그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 키가 줄어들고 몸집도 줄어들더니, 머리카락 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지월은 선이 가는 사내였다.

지월은 검붉게 찰랑거리는 긴 머리카락을 솜씨 좋게 비녀로 틀어 올리고 있었다. 머리칼을 염색이라도 한 것 같았다. 제국에는 그런 염료가 있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보긴 처음이었다. 옷은 소매가 무척 넓고, 은실과 금실 자수가 가득하여 화려했다. 얼핏 평범한 듯한 용모였으나 유독 가늘고 긴 눈매가 민첩한 느낌을 주었다.

지월의 목덜미에 걸린 것은 연이 처음 보는 보석이었다. 놀랍도록 빛깔이 선명한 붉은 보석이었다.

연의 시선이 홀린 듯 보석에 가 닿았다. 그야 용은 본디 사람보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탐심이 강한 법이니, 어쩔 수 없었다.

“호오, 좋은 것을 알아보는 눈은 가졌나 보구나.”

연의 모습에 지월이 가벼이 코웃음을 쳤다.

“하여 나의 주군께도 알랑거린 것인가.”

알랑?

홀린 듯 보석을 바라보던 연의 표정이 멈칫 변했다. 지월은 아랑곳하지 않고 유들유들하게 말했다.

“서북 삼진은 물론 여기까지도 소문이 파다하다. 네가 내 주군이신 북왕 전하께 알랑거리며 너희 사인 족속의 안녕을 꾀한다고 말이다.”

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 대체 왜 그런 소문이 난 건지, 이유를 찾자면 못 찾을 것도 없을 듯하였다. 그야 하신후와 좀 오래 같이 붙어 있기는 했다. 게다가 하신후는 직접 말하지 않았던가.

연이 자신의 정인이라는 헛소문을 퍼뜨려 친우인 진희설의 구혼을 막으려 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가 그리하고자 한다면, 연과의 헛소문쯤이야 얼마든 부풀려 퍼뜨릴 수 있을 것이다. 연의 머릿속에서 그런 셈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소문이 퍼졌다면, 그것은 하신후의 의도에 따른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소문으로 딱히 잃을 바가 없었다. 그러나 연은 어떨까.

연은 말없이 지월을 마주했다. 연의 침묵에 지월이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섰다.

“반박하지 않는구나. 그것도 기개라면 기개겠지. 괜히 변명을 늘어놓는 것보다야, 지금처럼 입 다물고 있는 편이 더욱 용감한 것일지도 모르지.”

지월은 연을 가만 들여다보다가 재밌다는 듯 물었다.

“한데 왜 그리 화난 표정일꼬?”

“…….”

“아까는 내가 주군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얼굴까지 붉히며 마음을 들키더니, 이제는 또 화난 얼굴을 하는구나. 나는 아까 너를 보고 내 주군께 연심을 품은 것이 틀림없다 여겼는데. 한데 왜 정인이라는 소문에는 화를 낼까?”

군사라더니 과연 눈치가 빠른 자인 모양이었다. 가까이 다가오니 지월은 하신후로 변신했을 때보다야 체구가 작았지만 연보다는 눈높이가 꽤 높았다.

아까 대뜸 하신후로 변신해 연을 맞이했던 것은, 연의 본심을 떠보기 위함이었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만만치 않은 상대 같아 연은 일단 말을 돌렸다.

“화, 화가 나다니요. 당치 않습니다. 저는 계단에서 떨어져 다친 뒤 내내 정신이 없어 제, 제때 지월 님께 인사를 올리지 못했었지요. 하, 하여 뵈러 왔으나 예, 예상치 못한 말씀에 당혹한 것뿐입니다.”

지월은 연을 빤히 바라보다가, 자신의 뒤편에 있던 의원을 앞으로 불러냈다. 의원은 연의 손목을 쥐어 무언가 진맥을 하더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당황한 이유는 연이 아픈 곳 하나 없이 멀쩡한 탓이었다.

연 역시 좌불안석이었다. 연이 깨어나지 못한 건 그 괴상한 순백의 광휘 때문이지, 다른 이유와는 무관했다. 하니 평범한 의원이 무언가를 진맥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멀쩡하다니 거참 신기하구나. 병석에 있을 때도 딱히 다친 곳 하나, 생채기 하나 없어 계단에서 구른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는데 말이야.”

지월 역시 의혹이 가득한 기색이었다.

“오늘도 이리 깨어나 바로 식당으로 향했다 하여, 네가 철인인 것인지 아니면 네 몸에 아무도 모르는 신기한 조화라도 일어난 것인지 궁금하던 차였다. 보통 다쳐 수일을 몸져누웠던 자라면 일어나도 거동이 편치 않을 텐데.”

“…그, 그건…. 제가 원래 다쳤다가도 수일 누워 쉬면 멀쩡히 회복해 돌아다니는 체질을 타고나서요.”

“그래? 사인이라 제국인과는 좀 다른가 보구나. 그건 쓸모 있는 체질인걸.”

써먹을 데가 있는 체질일지도 모르겠다며, 지월은 순진하게 연의 거짓을 믿었다.

“사인들은 늘 신기한 체질, 신기한 재주를 갖고 있을 때가 많으니 가르치고 연구하는 보람이 있단 말이야.”

희귀 동물 대하듯 말하는 것이 썩 듣기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더 따져봤자 의혹을 자초하는 일이 될 터였다. 지월은 알고 싶은 걸 다 알았다는 듯, 이만 물러가라는 듯한 손짓을 해 보였다.

“좋아. 어쨌든 아프지 않은 걸 확인했으니 됐다. 내일부터는 네 동료들과 함께 장서각에서 일하거라. 네 동료가 알아서 일을 잘 가르쳐 줄 거다.”

“자, 장서각이요?”

“그래. 너희처럼 꿈만 크고 재주는 빈약한 신입들이 일하기 딱 좋은 곳이지.”

지월이 코웃음 치며 중얼거렸다.

“물론 너는 장서각에서 배우는 일 말고, 다른 재주를 더 요긴히 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알랑거리는 재주인지, 아니면 알랑거리는 시늉을 하며 면종복배(面從腹背)하는 재주인지 내 아직 거기까지는 가늠이 되질 않는구나.”

코웃음과 뒤섞인 독설에 연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면종복배라, 그건 연에게 참으로 잘 어울리는 말이기도 했다.

지월은 인사를 올리는 연에게 툭 뱉듯 말을 더했다.

“수일 내로 이 지역에서 힘깨나 쓰는 자들이 모이는 자리에 내 너를 다시 불러낼 것이다. 얼굴에 추한 흉까지 있는 괴상한 사인 계집이 북왕 곁에 갑자기 나타나 요사스럽게 굴고 있다고 소문이 났으니, 모두가 그 소문의 당사자를 보고 싶어 하는 게 당연하지. 이곳 사람들은 모두들 나 못지않게 눈이 밝고 영리하단다. 아마 너도 좀 각오를 하고 나와야 할 거야.”

스스로 영리하다고 말하다니, 이 지월이라는 사내도 꽤나 알만한 자였다.

소문이 얼마나 자세히 퍼졌으면 연의 얼굴에 흉이 있다는 사실까지 알려졌단 말인가. 하신후가 그런 사실까지 소문으로 퍼뜨렸을 줄이야. 연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었다.

뭐, 이리 된 이상 물러날 길이 없었다. 하신후가 연의 동의도 없이 이리 소문부터 파다하게 만들었으니, 연은 이미 이 일에 깊게 얽혀버린 셈이었다.

그자가 이리 무턱대고 제 뜻을 펼칠 줄은 몰랐다. 스멀스멀 분노가 치밀었다.

연에게는 연의 동의를 기다리는 척하더니, 실은 이렇게 곧바로 소문부터 퍼뜨린 것 아닌가. 뒤통수를 세게 후려 맞은 기분이었다.

‘그 황당한 사내가 이렇게 나를 속이고 기만할 줄이야! 이리 소문을 파다하게 만들 거라면 왜 내게 선택권이 있는 듯 군 거지?’

답을 줄 하신후는 그저 먼 땅에서 제 할 일만 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연은 애써 배신감을 숨기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애초부터 연이 착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북왕이고, 여기서 연은 일개 말석의 술사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도 이곳에서 하등한 취급을 받는 사인이었다. 그런 연에게 하신후가 정말로 선택권을 줄 리가 없었다. 그는 바라는 것이 생기거든, 그것을 당연히 취하면 되는 자이니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