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축제의 불꽃이 밝혀진 지 아직 그리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하니 가서 구경하기에 썩 늦은 것은 아니리라.
때를 보아서 자리를 잠깐 떠나야 할 것 같았다. 한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다홍이 자꾸만 술잔을 권해온 것이다.
“연이 너도 마셔, 마셔. 내일 먼길 가려면 오늘 마셔야지.”
다홍이 벌건 얼굴로 연을 보며 빈 잔에 술을 채웠다. 연은 사실 술을 마셔본 적이 없었다. 신전에서 지낼 때 다른 이들이 마시는 모습이야 본 적 있었지만, 연이 마시는 것은 금지된 일이었다.
연은 망설이다가 다홍이 건넨 술잔을 받아들었다. 이걸 마셔야 일어날 틈을 내어줄 것 같았다.
“고마워.”
연은 단숨에 맑고 따스한 술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그러자 곧바로 쓰고 괴상한 향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곧이어 뱃속까지, 불을 삼킨 듯 뜨거웠다.
“윽…! 왜 이렇게 뜨거워?”
연은 놀라서 자기 목을 손으로 붙잡았다. 그러자 놀라 연을 바라보던 다홍이 곧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연이 너 술 처음 마셔보니? 어린아이도 아니고! 너 정말 귀엽다.”
귀엽다니 칭찬으로 느껴야 할까. 별로 부끄러운 것도 아니었는데 돌연 얼굴에 열이 올랐다. 두 뺨이 화끈화끈거려 마치 뱃속의 불이 얼굴로 옮겨간 것만 같았다.
“괜찮아? 딱 한 잔 마셨는데 너 얼굴이…. 정말 처음 마셔보기라도 하는 거야?”
자신의 낯빛이 이상한지 다홍의 표정이 점점 달라졌다. 아무래도 이것이 자릴 비울 좋은 핑계가 되어줄 것 같았다. 연은 일부러 조금 더 취한 척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잠깐 나, 나가서… 나가서 좀 쉬다 올게.”
한데 일어서며 약간 비틀거려지는 것이, 정말로 술 한 잔에 좀 취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독한 술인 걸까?
인간들이 그리 즐겨 마시는 술인데, 연이라고 마시지 못할 리 없지 않은가. 아마 처음 마셔본 것이 문제인 듯했다.
연은 서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다홍과 리경을 남겨두고 홀로 복도로 나왔다. 복도는 고요했다. 모두가 축제의 마지막 순간을 보러 나간 모양이었다.
복도에도 밀어 여는 창들이 줄지어 나 있었다. 연은 아까 그 거대한 불꽃이 보이는 방향의 창을 열었다.
“그럼 어디 가서 확인해 볼까. 그가 얼마나 좋은 수를 찾아낸 것인지.”
중얼거림과 함께, 연은 순식간에 아름다운 순백의 새로 변했다. 새는 창을 넘어 검은 밤하늘로 사라졌다.
* * *
거대한 불꽃으로 환하게 밝혀진 관아의 뜰에서, 단상에 마련된 상석에 앉은 려경인이 매서운 눈빛을 띠었다.
슬슬 그분이 말씀하신 때가 되어가고 있었다. 려경인은 삼진을 중심으로 한 서북의 중요한 영지들을 책임지며 서북 3관문을 지키는 태수였다. 그러나 중한 책임에 비해 그는 아직 어리고 경험이 부족했다.
려경인의 꿈은 가문의 차기 가주직을 물려받는 것이었다. 조부께서는 오래전부터 손주들 가운데 누군가에게 가주직을 승계한 뒤 조용히 은거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셨다. 자식들 대부분이 이백 년 전쟁 중에 세상을 떠났으니, 차라리 자식을 대신하여 손주에게 직을 물려주고자 함이었다.
려 씨 가문은 다른 귀족들과 달리 혈육이 많은 편이었다. 하여 별다른 승계 다툼이 없는 다른 가문들보다 힘에 대한 다툼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백 년 전쟁은 려경인의 부친을 죽음으로 이끌었다.
‘네 부친께서 살아계셨다면 반드시 가주가 되셨을 것이다.’
려경인의 모친은 끝없이 그 말을 입에 담고는 했다.
하여 려경인은 다른 혈육을 제치고, 반드시 가주가 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가주가 되기 위해서는 오늘의 성공이 필요했다.
때가 되어가고 있었다. 려경인 아래 단의 자리에 앉아 있던 은곡이 아래로 내려가 불꽃 가까이로 다가섰다. 그가 토착신 정원을 위한 푸른 꽃을 불에 봉헌하면 불꽃이 푸르게 변하며 축제의 막이 내려진다. 은곡 아래로 따른 사제들이 벌써부터 연한 푸른빛이 도는 흰 꽃을 사방으로 뿌리고 있었다.
“와아아!”
“꽃을 주신다! 사제님들께서 꽃을 내려주신다!”
원을 그리며 춤을 추던 백성들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꽃을 받으려 팔을 벌렸다. 얼핏 아름답고도 흥겹게만 보이는 풍경이었다.
은곡이 유유히 불꽃 앞에 마련된 제단을 올랐다. 그의 손에서 다른 어느 꽃보다도 눈부시게 빛나는 새파란 꽃이 나타났다.
은곡의 손이 꽃을 불로 던지려는 순간이었다.
“은곡, 그 손을 멈춰라!”
려경인의 결기에 찬 시선이 은곡을 향한 것은 그때였다. 크게 소리친 것이 아니었음에도 려경인의 목소리는 그 자리의 모두에게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악단의 음률이 주술에 포박된 듯 뚝 끊기었다.
“이제 끝이다. 내가 정말로 네가 그 꽃을 봉헌하도록 둘 것이라 생각했느냐!”
싸늘한 적막이 찾아온 순간, 려경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꽃을 쫓던 백성들이 려경인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미 조금 전의 평범한 모습과 거리가 멀었다.
소름 끼치는 장면이었다. 그들 가운데 누구 하나, 놀란 표정을 짓지 않고 있는 까닭이었다. 백성들은 그저 조금 전 뿌려진 꽃에 취한 듯 혼몽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려경인은 갑자기 인형처럼 무표정해져 버린 백성들의 모습에 끔찍한 듯 주춤했으나, 애써 매섭게 외쳤다.
“네가 저지른 일을 모르지 않는다! 지금 그 꽃을 봉헌하면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어떤 저주에 걸리게 되는지 역시, 이미 알고 있다!”
은곡이 천천히 몸을 돌려 려경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소름 끼치는 적막을 깨며 그의 싸늘한 목소리가 려경인을 향했다.
“…알고 계시다고요? 제가 무엇을 하려는지 정녕 아십니까.”
“헛소리하지 마! 나는 이 땅의 태수다. 네가 감히 내 눈을 속이고 이런 일을 벌인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았느냐!”엄한 호령에도 은곡의 표정에는 주춤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려경인을 능멸하듯 조롱기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로 스스로 알아내신 것은 맞습니까. 저는 이 자리에 려 태수님보다 더 귀한 분께서 와 계시는 줄 알았는데요. 일전에는 저자에서 그분을 직접 뵙기도 했었고요.”그 말에 려경인이 얼어붙었다. 북왕 하신후가 려경인을 돕고 있다는 것은 비밀로 두려 했던 일이었다. 이 자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하신후가 아니라, 려경인이 은곡 일당을 막은 것으로 알려져야 한다. 그리해야 어리고 경험 없는 태수 려경인이 백성들의 신뢰를 받을 수 있게 될 터였다. 하신후에게도 이미 허락을 구한 일이었다.
려경인은 당황하여 백성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다행이라 해야 할까, 백성들은 꽃이 머금고 있던 월의 피에 취해 이미 이지를 잃은 인형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축제를 즐기는 시늉을 멈춘 그들의 표정은 섬뜩할 정도로 흐리멍덩했다.
은곡은 백성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안도하는 려경인을 보며 피식 조롱 어린 냉소를 지었다.
“어차피 다 아신다니 솔직히 말씀드리지요. 이 자리의 백성들은 모두 용의 피에 취하여 그저 저희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어진 자들입니다. 삼진의 백성 대부분이 그러하지요. 용의 피는 특히나 사인에게 잘 들어서, 지금 저의 간단한 명령만으로도 삼진의 사인들은 저희의 훌륭한 꼭두각시 병사가 될 터입니다. 태수께서는 그들과 어찌 싸우시렵니까? 그저 피에 취해 이지를 잃은 것뿐인, 가엾은 백성들과 말입니다.”
“가, 감히 나를 겁박하는 것이냐! 네놈을 당장 죽여서-!”
“저는 죽으려 여기 서 있는 것입니다. 설마 그러한 각오도 없이 태수께 이리 지껄이고 있겠습니까.”
은곡은 태연하게 미소를 보였다. 저주 인형들처럼 미동 없이 서 있는 백성들 가운데서 누군가 입을 연 것은 그 순간이었다.
“죽으려 서 있다니, 그것은 조금 의외로군.”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에 은곡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었다. 하신후였다. 은곡의 눈길이 려경인 대신 그를 향했다.
“거기 계셨습니까, 북왕 전하.”
“나는 네가 그저 그들의 하수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너는 하수인이 아니라 그 꽃과 같이 바쳐질 제물이었구나. 하여 죽으려 나왔다고 그리 기쁘게 말하고 있는 것이겠지.”
하신후는 스스로 생각을 가다듬듯 나른히 중얼거리더니, 돌연 불꽃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불꽃이 모두를 집어삼킬 듯 넘실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평범한 불꽃은 아니었다. 강력하게 응집된 영력이 불길을 더 강렬히 타오르게 만드는 중이었다.
“전하께서 직접 오셨다 하여도, 신룡 월 님의 피에 취해 이지를 잃은 자들을 돌이킬 힘은 없으시지 않습니까. 하여 이백 년 전쟁 때도 기나긴 시간 고생을 해오셨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이번에는 어찌하실 것입니까. 또다시 가엾은 백성들을 직접 공격해, 이들의 뼈를 부수고 살을 가르실 것입니까?”
은곡은 하신후의 등장에 한층 더 열띤 표정으로 물었다. 그가 직접 나타나기만을 기다린 듯한 태도였다.
그러나 비웃음 섞인 은곡의 말에 하신후는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무언가를 기다리듯 잠시 먼 곳을 응시했다. 그에 은곡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엇입니까. 설마 제국 원신께 기도라도 올리시려고요? 그리 신앙심이 깊으신 줄은-.”
비웃음을 뱉던 은곡의 말이 돌연 멈추었다.
불꽃의 붉은빛만 일렁거리며 새카맣던 밤에 돌연 희붐한 빛이 번지기 시작한 탓이었다. 북녘에서부터 시린 순백의 빛이 퍼져오고 있었다.
“-!”
은곡의 눈빛이 흔들렸다. 려경인의 얼굴에도 경외감이 나타났다. 빛이 번지는 하늘을 바라보던 하신후가 다시 은곡에게로 시선을 돌렸다.“너는 마치 그 전쟁 이후로 시간이 멈춰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말하는구나. 전쟁 이후 백오십여 년이 흘렀는데, 그 사이 월의 피의 저주를 파훼할 방도 하나 마련하지 못했을까.”
순백의 찬란한 광휘가 점차 하늘 전체로 퍼져나가더니 온 하늘이 새벽이 찾아온 듯 환해졌다. 하신후의 시선을 따라, 요기 어린 듯 타오르던 불꽃이 사그라졌다. 붉은 불꽃의 빛이 새하얀 섬광에 짓눌렸다.
“-!”
불꽃이 꺼지는 순간, 은곡의 손에 들렸던 새파란 꽃도 재가 되듯 검게 변하며 사라졌다. 은곡은 비어버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일그러진 얼굴로 하신후를 응시했다.
인형처럼 멈춰 있던 백성들에게로 하얀빛이 퍼졌다. 흐리멍덩하던 눈빛들에 한순간 파장이 일었다.
“-!”
“윽-!”
빛을 받은 이들이 짧은 신음과 함께 털썩,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쓰러진 그들의 얼굴에는 평온한 표정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몸을 속박하고 있던 용의 피가 멸해진 덕분이었다. 은곡의 뒤에 서 있던 사제들 역시 비틀거리다가 끝내 무너졌다.
잠시 후, 끝내 서 있는 이는 은곡 하나뿐이었다. 은곡은 하신후를 노려보다가 문득 뜻 모를 냉소를 띠었다.
“그래, 전쟁 이후 참으로 긴 시간이 흘렀군요. 그것을 잊고 있었습니다.”
마치 전쟁을 겪어본 적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