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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19)화 (19/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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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왕의 눈에 들게 되어 기뻤다.’

리경의 말뜻은 분명 그리 들렸다. 심지어 리경은 연을 경쟁상대로 여기고 있는 것 같기까지 했다.

연은 조금 놀랐으나 가까스로 침착하게 물었다.

“눈에 들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예요.”

리경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얼른 상전의 눈에 들어 더 나은 자리로 가고 싶어요. 지금처럼 평범한 말석의 하급 주술사여서는 도저히 이 처지를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요.”

리경의 말에 잠자코 듣고 있던 다홍이 굳은 얼굴로 끼어들었다.

“지금 뭐야. 두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럼 리경 너는 승진하려고 일부러 위험한 일을 하고 다녔다는 거야?”

“네,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건 알았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리경이 더욱 차갑게 말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를 만난 뒤로 늘 보았던 수줍은 듯한 표정과는 전혀 달랐다. 유약해 보일 정도로 곱상한 얼굴이 표정만으로 이리 달라 보일 수 있다니 놀라울 정도였다.

“그냥 하신후 님을 섬기게 되기만 해도 처지가 나아질 줄 알았어요. 더는 사인이라고 무시하고 차별하는 사람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요. 하지만 세상을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본 건 실수였죠. 다들 알잖아요. 하신후 님이 직접 나타나시기 전까지, 동료들이 우릴 어떻게 대했는지.”

리경은 단호했다.

그의 말대로 유백이나 그의 무사들, 그리고 신입 주술사들인 나머지 동료들까지 그들을 따돌리고 심지어는 괴롭혔다.

“더 높은 자리로 가면 사인이라고 저를 함부로 대한 자들을 모조리 다….”

리경은 분한 듯 중얼거리다가 말을 흐렸다. 그는 작게 숨을 내쉰 뒤, 한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북왕 전하께서는 제게 무슨 일을 시키려 하시는지 모두 알려주셨어요. 제게 선택지도 주셨고요. 저는 제가 지닌 귀한 책을 쓸모 있게 쓰고 싶어요. 조금 위험을 무릅쓰게 되더라도, 전하께서 하시는 일에 보탬이 되어 얼른 더 나은 자리로 가고 싶고요. 그러니까 저를 괜히 걱정하실 것 없어요.”

“…괜한 걱정이라….”

연은 중얼거리며 리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진심 어린 말이었다.

리경이 이런 고백을 해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제야 리경에게는 이것이 그저 위험한 일에 휘말리는 문제가 아니라, 사인이자 제국의 일부로서 자신의 성공으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더 높은 자리로 가는 것.

그리하여 비로소 제대로 된 삶을 누리게 되는 것.

그것이 리경이 바라는 바였다. 그는 제국의 일부로서, 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살고 싶어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해 자신을 바치고 싶어 했다.

지금까지 모든 일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해온 것은 아닐까.

연은 돌연 찾아드는 그 섬뜩한 의문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신관들의 꿈과 리경이 지닌 꿈은 분명 서로 다른 것이리라. 그렇다면 리경에게, 연은 대체 무엇을 도와줄 수 있는 걸까.

침묵을 깨며 말을 꺼낸 것은 다홍이었다. 그녀는 리경을 쏘아보며 푸념하듯 헛웃음을 지었다.

“너도 승진, 승진, 몸을 바쳐가며 높은 자리로 가기만을 바라는 애였구나. 얼굴만 보고는 전혀 몰랐네. 난 그동안 너를 그냥 예쁜 얼굴을 가진 겁 많은 사내라고만 생각했는데, 무섭다 무서워. 너 속으로는 계속 우릴 경쟁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그건….”

리경은 우물거리다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우린 이 원정에 함께 하는 동료 중에서도 유일한 사인들이잖아요. 우리 셋만은 친구여야죠.”

그는 연에게 돌연 몸을 돌려, 손을 내밀기까지 했다. 연은 얼떨결에 내밀어진 손을 맞잡았다. 리경은 연의 손을 꼭 쥐고서 그녀의 손등에 반대편 손까지 겹쳤다. 그리고는 조금 더 선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어쨌든 저를 염려해주신 건 감사해요. 연은 정말 좋은 벗이네요. 저도 연에게 좋은 벗이 될게요.”

벗이라는 말을 그의 입에서 들으니 조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사람의 입에서 그녀에게 벗이라 부르는 것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사인은 늘 지켜줘야 하고 책임져 구원해야 하는 존재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에게 벗이라고 불리다니. 그 쑥스러움이 그리 싫지만은 않은 듯도 했다.

“그래, 혹시라도 힘든 일이 있다면 내게 말해. 널 도와줄게.”

지금으로서 연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말은 그것뿐이었다. 아직은 그녀도 무엇이 가장 옳은 길인지 알 수 없어 혼란하였으나, 그럼에도 돕고 싶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술과 음식이라도 시켜서 좀 즐기는 게 어때? 마침 무사들도 다른 주술사들도 다들 임무 때문에 축제 마지막 행사를 보러 갔잖아. 이 객점 밖에서 나오지 말라고 명을 받은 건 우리 사인들뿐이니, 먹고 마셔 취하기나 하자.”

분위기가 좀 풀렸다고 느낀 건지 다홍이 구미 당기는 제안을 꺼냈다. 다홍 역시 유백을 통해 이 객점에서 나오지 말라는 당부를 들은 모양이었다. 한데 생각해보니 조금 이상했다. 유백을 통하기는 했으나 다홍까지 객점에 있으라 명한 것은 틀림없이 하신후 본인일 터였다.

리경이 밖에서 미끼 노릇을 할 때는 똑같이 사인인 연이나 다홍이 괜히 적의 눈길을 끌까 봐 일부러 객점에만 있으라 시킨 것이다. 거기까지는 이해가 갔다.

한데 지금은 리경까지 여기 있지 않은가. 이제는 연도 다홍도 여기 있을 이유가 없었다. 진작 하신후와 함께 있을 때 이 점도 따져 물어볼 것을….

그때는 리경을 만나볼 생각으로 정신이 없었다.

아니…. 리경뿐만이 아니다. 하신후가 웬 이상한 제안을 건네는 바람에 더더욱 정신이 없었다. 스스로의 어리석음이 뒤늦게 황당했다.

연은 다홍에게 슬쩍 묻기를 택했다.

“그런데 너 이유는 들었어? 왜 우리 셋만 여기 모여 있으라고 명을 받은 건지 말이야.”

“뭐야, 너 못 들었어? 우리만 더 일찍 떠나기 위해서잖아. 너와 나, 리경 셋이 회운성으로 먼저 가라고 명을 받았어. 괜히 부상이라도 입어 일찍 떠나지 못하게 되면 안 되니까 아마 다른 임무에서는 빠지라고 시키신 거겠지.”

“…그렇구나. 난 못 들었어. 그냥 명령만 받았어.”

“북왕 전하께서 너에게 회운성 얘기 없이 그냥 객점에 있으라는 명령까지만 내리셨다고? 이상하네, 유백 님께서는 분명 우리 셋을 데리고 먼저 회운성으로 가실 거라고 하셨는데. 그래서 유백 님도 오늘 밤의 임무 대신 다른 일을 맡게 되실 거라고 들었어.”

다홍이 고개를 갸웃했다. 점점 말을 하다 보니 말이 꼬이는 것 같았다. 연은 약간 당황하며 얼른 말을 고쳤다.

“아, 아니, 회운성으로 가 있으라는 말을 듣기는 했어. 그런데 그냥….”

‘내게만 따로 내린 명인 줄 알았어. 왜냐면 그가 내게 자기 애인인 척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거든.’

그 뒷말이 무심코 삼켜졌다. 너무나도 민망스러운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착각이었다니, 정말로 부끄러웠다.

“내가 어리석어서 전하의 말을 제대로 이해를 못 했네. 우리 셋이서 함께 회운성으로 먼저 가는 거구나.”

연은 저도 모르게 살짝 얼굴을 붉혔다. 멋쩍음이 밀려든 탓이었다. 아무래도 하신후의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 같았다. 그가 그 제안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을 주려 일부러 연을 험한 원정에서 뺀 것이라 생각했는데… 오해였다. 그가 말을 똑바로 뱉지 않고 묘하게 빙빙 돌려 지껄여댄 탓이다.

“회운성에 가서 다른 사인 주술사들의 부대에 배치될 거래. 너도 알지? 북단의 회운성은 하 씨 가문의 오랜 영지이기만 한 게 아니라 국경 너머의 부토(腐土)로 정찰을 나서는 봉화의 땅이라는 거.”

제국 전역은 거대한 방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부토, 즉 썩어서 버려진 국경 바깥 땅에서 들어오는 요마들을 막기 위해서였다.

부토는 버려진 땅의 다른 이름이었다. 제국 국경 영지 중에는 방벽에 문이 있어 그 문을 열고 국경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땅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더욱 위험한 땅이므로 그 영지에는 긴급을 알리는 봉화가 세워진다.

하여 봉화의 땅은 부토로 정찰을 나서려 문을 만든 땅임을 뜻하기도 했다. 점소이가 가져온 술상을 앞에 둔 채, 다홍은 신난다는 듯 말했다.

“부토로 정찰을 나가게 되면 드디어 우리 사인들 능력이 제대로 빛을 발하게 되겠지! 다른 제국인들과 다르게 우리는 부토에 나가서도 주술의 힘을 잃지 않으니까. 귀족이 아닌 평범한 제국인 주술사들은 부토만 나가면 무용지물이 되니까 말이야.”

“그래도 요마가 공격하기는 마찬가지일 텐데. 무섭지는 않아?”

연이 묻자 다홍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요마가 두려우면 내가 왜 주술사가 됐겠어? 이제 보니 연 네가 가장 겁쟁이로구나.”

겁쟁이라니, 치욕스러운 말이었다. 연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다홍이나 리경 모두 생각과는 달랐다. 이들은 저마다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꿈이 있었다. 그저 무력하게 연의 구제를 기다리는 사인들이 아니었다.

“너희들은 용감하구나.”

연은 중얼거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두운 밤하늘이 열린 미닫이창 너머로 아득히 내다보였다. 멀리 도시 중심부에 거대한 불빛이 보였다. 축제의 마지막 행사를 위해 피워놓은 불꽃이었다. 여기서도 저리 불꽃의 빛이 보일 줄이야.

하신후가 준비한 방도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그가 여기 있으라고 명했다 해서 정말 그 명령을 따라줄 생각은 없었다. 용이 인간의 명을 따를 리 없지 않은가. 그와 은곡이 벌이는 일을 지켜보기 위해 연이 직접 가보는 것은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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