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내가 네게 할 제안은 이것이다. 려경인에게 너를 내 여인이라고 말했듯, 다른 이들에게도 그리하는 것이 어떠하냐. 대신 나도 너의 청을 들어주마.”
조금 전 딱딱하게 들렸던 말투는 착각이었던 걸까? 말을 맺는 순간, 하신후의 수려한 얼굴은 다시금 옅게 붉어져 있었다.
아무렴 역시나….
스스로 한 여인에게 그리 끈질기게 청혼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입에 담기가 좀 부끄러울 만도 했을 것이다. 게다가 직접 거절하지도 못하고 연을 핑계로 삼으려 하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연은 여러모로 황당하여 그를 얼빠진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게 대체 무슨 어, 어리석은 소리십니까? 마음에도 없는 저를, 구혼을 거절하시려는 이유만으로 굳이 전하의 여인처럼 보이도록 하시겠다고요?”
하신후가 눈썹을 슬쩍 찌푸렸다. 연도 덩달아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 그냥 대사제님께 직접 거절을 드리는 편이 나으실 것 같은데요. 소,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면 아마 그분 스스로의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조용히 청을 물리실 테지요.”
“…그럴 리가. 지난 이백여 년간 거절이라면 꾸준히 해왔는데.”
“하….”
연은 저도 모르게 기가 막혀 한숨을 삼켰다. 역시나 이 수려한 사내는 얼굴값을 제대로 하며 살아온 모양이었다. 얼마나 무르게 거절을 했으면 이백여 년간 여인이 제대로 마음 정리 하나 하지 못했겠는가. 이백여 년이라면 연이 인간으로 살아온 백오십여 년보다 더 긴 시간인 것을.
“저는 마음에 없는 사내를 그렇지 않은 척 꾸미는 일은 할 수 없어요. 모, 못하니까요. 저, 전하께서도 잘못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서투른 거짓을 꾸며봤자 트, 틀림없이 들킬 테니까요.”
연의 말에 하신후가 내내 매만지고 있던 술잔을 들어 올렸다.
뜨거운 술이라더니, 벌써 식기라도 한 걸까.
연은 멈칫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술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단정한 자세였다. 아마도 식어버렸을 맑은 술이 단숨에 비워졌다.그는 약간 찡그린 눈으로 빈 술잔을 내려다보다가 중얼거렸다.
“글쎄, 나는 그다지 들킬 것 같지 않은데.”
하신후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연도 어쩐지 어색하여 더는 투덜거릴 수 없었다. 괴상한 기분으로 꾸역꾸역 식사를 마치자, 한층 황망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하신후가 연을 데리고 요리점을 나섰을 때에는 그의 말대로 환하던 햇빛이 사라진 뒤였다. 요사스러울 정도로 빠르게 저무는 해였다. 이것이 서북의 낮과 저녁인 모양이었다.
축제가 끝나는 것은 오늘 밤이다. 장작더미를 높이 쌓아 올려 밝힌 거대한 불을 둘러싸고 사람들이 모여 춤을 추고 노래를 한다고 들었다.
연은 오늘따라 그 소란이 피로하게 느껴졌다. 아마 미열이나마 열을 앓았던 탓 같았다. 아니면 종일 온갖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고 충격을 받느라 지쳐버린 것 같기도 했다.
하신후는 복작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쉽게 가로질렀다. 그의 뒤를 따라 걸으니 인파에 휩쓸리지 않아 편했으나, 한편으로는 무언가 허전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는 더 이상 굳이 손을 잡고 걷는 이상한 짓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는 연이 달아날 거라 걱정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 걱정의 기준을 도통 종잡을 수가 없는 자였다.
연은 하신후의 뒤를 따라 별 탈 없이 익숙한 건물 앞에 다다랐다. 그를 만나기 전, 연이 나섰던 바로 그 객점이었다. 다홍은 아직도 저 안에 있을까? 하신후의 말로 미루어 리경도 이미 저곳에 있을 터였다.
“들어가거라.”
“저, 전하는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나는 축제의 마지막 연회를 보러 가야 해.”
“…전하께서도 축언을 베푸십니까?”
의외였다. 하신후가 이곳의 태수인 려경인을 만난 장소는 분명 허름하고 수상쩍은 구역 아니었던가. 그렇다는 것은 그가 공식적으로 려 태수를 만나지 않으려, 제법 은밀하게 움직이기를 원했다는 뜻이었다. 그런 것쯤은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공식적으로 얼굴을 비추려 한다고?
연이 의아함을 담아 하신후를 바라보았다. 그가 그 표정의 뜻을 알아채고서 재밌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내가 려경인과 만났다는 사실을 은밀하게 두고자 함을 아는 눈치로구나.”
“굳이 그, 그런 장소에서 만나셨으니까요.”
물론 그처럼 몰래 진행하는 일에 굳이 연을 데려갔다는 사실이 암만 생각해도 조금 괴상하기는 했다. 어느새 연은 하신후의 선택 하나하나를 모두 파훼하여 이해하려 하기를 좀 포기하고 있었다. 이 사내는 그저 종잡을 수 없는 자인 듯도 했다.
하신후는 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미소 띤 얼굴 그대로 몸을 기울였다. 덕분에 그와 연의 얼굴이 훨씬 가까워졌다.
“너는 가끔 보면 단 것만 밝히는 아이 같고 어리숙한 자 같기도 하고… 또 이럴 때 보면 아주 어리숙하지만은 않은 것 같기도 한데.”
“…….”
“무엇이 진짜일까.”
연은 눈을 휘어 눈웃음을 짓고 있는 그를 빤히 쏘아보다가 답했다.
“저도 저, 전하가 어, 어떤 분이신지 겪을수록 알 수가 없으니 사람과 사람의 일이 보, 본래 그런 법인 듯도 합니다.”
“흠, 그러한가.”
그는 웃으며 기울였던 몸을 바로 세웠다.
“나는 네 말대로 은밀히 해야 할 마지막 일이 있어 가보아야 해. 그리고 이곳의 일을 마치고 나면 남부에 다녀올 것이다. 그곳은 네 벗인 리경의 고향이지. 그가 지닌 용의 책의 본래 주인이 제법 가엾은 죽음을 맞은 곳이기도 하고.”
이런 말을 자신에게 다 해줘도 되는 걸까?
하을령과의 대화를 훔쳐 들어 이미 아는 내용이기는 했으나, 그에게서 이처럼 직접 듣게 될 줄은 몰랐던 이야기였다. 그가 말하는 ‘마지막 일’이란 필시 하을령에게 말했던, 용의 피가 불러일으킨 저주를 처리할 방도를 의미하는 것이리라. 마지막 일이나 리경의 일 모두 은밀하다면 몹시 은밀할 이야기였다.
하신후는 연을 빤히 보더니 눈을 슬쩍 찌푸리고서 악당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책의 본래 주인이던 여아의 죽음에는, 필경 네 벗인 리경이 얽혀 있을 것이다. 혹은 그가 그녀를 죽이고 책을 빼앗은 것일지도 모르지.”
“…그, 그럴 리는-.”
“내 말은, 네가 그를 너무 순진하게 믿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게서 거리를 둬. 내 말뜻을 알겠느냐.”
모르겠다고 답하기에는 상대의 태도가 어쩐지 묘했다. 아무리 리경을 쉽게 의심하지 말라고 말해봤자, 어쩐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것 같았다.
연은 괜히 힘을 빼는 대신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서 인사를 올리겠습니다. 마, 말씀하신 대로 저는 내일 회운성으로 갈 것이니 그곳에서 다시….”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해야 하는 걸까?
문득 생각해보니 여기서 이렇게 헤어지면 더는 연이 하신후 곁에서 이처럼 가까이 지낼 필요가 없어지는 셈이었다. 이후로도 지금 같은 구실은 다시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래, 너는 그곳에서 내가 올 때까지 오늘의 제안에 대해 잘 생각해 보거라. 내 제안이 첩자인 네 목숨을 살리는 비책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
이 순간에 또다시 첩자를 운운할 줄이야.
연은 미간을 찡그린 채 그를 바라보다가,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보이던 연은 문득 자신의 어깨에 하신후의 손길이 스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연의 어깨에 잠깐 손을 얹은 것 같았다. 어루만졌다 하기에는 너무 조심스러운 듯도 하고 머뭇거리는 듯도 한 손길이었다.
그러나 그 괴상한 손길의 주인은, 고개를 드는 순간 홀연히 사라져 있었다. 그대로 술법을 써서 어딘가로 떠나버린 모양이었다.
이래서야 어깨를 치는 장난을 하고서 달아난 것 같지 않은가.
꼬마들 놀이도 아니고 대체 무슨 짓인지 알 수 없었다. 연은 황당하게 그가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다가, 등을 돌려 객점으로 향했다.
* * *
“…뭐라고? 너 그럼 내내 전하와 함께 있었단 말이야? 그것도 그 기루에서?”
연의 말을 들은 다홍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떡 벌렸다. 그러더니 다홍은 떠오르는 바가 있다는 듯 긴장하여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연이 너 설마 지난번 전하께서 의심하셨던 그 일 때문에-.”
다홍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연의 몸을 살폈다.
고문이라도 당한 건 아닌지 확인하는 눈길이었다. 잠자코 곁에서 듣던 리경 역시 ‘의심’이라는 말에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의심이라니, 제가 모르는 무슨 일이 또 있었던 건가요?”
“있었지만 별 건 아니었어.”
연은 태연하게 답하고서 리경을 돌아보았다.
“그보다는 네가 겪은 일이 더 이상했을 것 같은데. 전하께서 내게 네가 맡았던 임무에 대해 조금은 이야기해주셨거든. 위험하지는 않았어?”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으나 속으로는 내심 걱정이 들었다. 서로 오래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었지만 리경과 다홍은 연이 제국에서 처음 직접 만나 본 제국의 사인이었다.
이백여 년 전, 선대의 신룡이었던 월이 소위 ‘이백 년 전쟁’에서 지고 난 뒤 사인들은 두 패로 나뉘었다. 사인 가운데서도 힘 있는 자들이었던 신관과 귀족 계층은 버려진 땅으로 떠나 다시 세력을 결집하기를 택했다. 그러나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냥 제국에 남겨진 자들도 있었다. 리경과 다홍은 바로 그 뒤처진 자들의 후예였다.
연이 그들에게 마음이 쓰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비록 이들의 선조가 제국에 남겨졌을 때 연은 아직 부화하지 않은 알일 뿐이었지만, 용으로서 이제는 이들을 잘 보살펴주고 싶었다.
그러나 연의 물음에 리경은 그녀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한순간 눈빛이 싸늘해진 것 같기도 했다.
“제가 특별한 임무를 맡았다는 건 저밖에 모를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괜히 혼자 우쭐해져 있었나 봐요.”
“우쭐해져…?”
당황한 연이 되묻자 리경이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좀 특별한 책을 지니고 있거든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빠르게 북왕 전하의 눈에 들게 된 거라고 생각해 기뻤었는데, 연도 만만치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