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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16)화 (16/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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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자가 무엇이라 말한 거지?

분명 내 여인이라 했다.

그러나 연이 제대로 놀랄 틈도 없이, 려경인의 입에서 또다시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분께서 사인이신 것 같아 저도 모르게 염려하고 말았습니다. 같은 사인들이 이곳에 이런 모습으로 있는 것을 보면 마음이 불편하실 것 같아서요. 송구합니다.”

려경인의 대답과 동시에, 지하 벽면의 푸른 불빛이 환하게 밝혀졌다. 불이 밝혀진 순간 연의 눈에 들어온 것은 푸른 물의 벽에 갇혀 있는 사인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눈을 감고 너덜너덜하게 물에 불어, 흡사 시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살아 있기는 합니다만, 더는 물로 요기를 정화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듯하여…. 어찌해야 할지 북왕 전하께 가르침을 청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려경인의 긴장한 목소리가 하신후를 향했다. 연은 처참한 사인들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걸음을 내디뎠다가 비틀거리고 말았다. 하신후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듯 부축했다. 나지막한 속삭임이 이어졌다.

“나가 있고 싶다면 그렇게 해.”

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이 광경에서 눈을 돌릴 수 있을 리 없었다. 저들은 모두 그녀가 지켜야 하는 일족 아니던가. 그런데 지금 이 제국인들은, 대체 저들을 가지고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연은 미동 없이 눈앞의 광경을 노려보았다. 그에 하신후가 려경인을 돌아보았다. 서늘한 눈빛이었다.

“내 가르침을 더 청할 것도 없이, 물로 정화하는 것 외의 다른 길이 있음은 그대도 알고 있지 않은가.”

차가운 음성에 려경인의 표정이 굳었다.

“이들은 용의 피가 부른 저주로 혼이 상한 자들이 아니던가. 그대를 따르는 주술사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지?”

“…그것이….”

려경인의 흐려진 뒷말에 담긴 말은 자명했다. 주술사는 귀족을 섬기는 중요한 존재들이었다. 굳이 이 같은 사인들까지 돌보기에는 려경인 휘하의 술사들에게는 맡길 만한 다른 일이 많았다.

아무렴 이 물속에 든 자들은 평범한 제국인이 아니라 사인 아니던가.

하신후는 려경인이 차마 입에 담지 못한 그 말을 짐작한 듯 냉막하게 말을 이었다.

“그대의 책무는 태수로서 이들을 살리려 하는 것이다. 이들은 그대가 살펴야 할 제국의 백성이야.”

“송구합니다.”

려경인이 죄를 청하듯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으니 작은 체구의 그는 한층 더 소년 같아 보였다. 하신후는 려경인을 탐탁지 않은 듯 바라보다가 명령했다.

“그대의 주술사들을 이곳으로 불러라. 나 역시 힘을 빌려줄 테니.”

“으,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전하.”

려경인이 한 차례 더욱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다 그는 쭈뼛거리듯 고개를 들어 하신후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한데… 이들은 이미 심한 지경에 이르러, 결계로 막지 않으면 요기가 요동쳐 주위까지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을 텐데…. 제 결계로 이들을 봉하기에 충분할 것 같으십니까.”

조금 전 지하 계단을 가리고 있던 결계는 그의 힘으로 만든 것인 모양이었다. 연의 뇌리에 려 씨 가문은 봉인과 결계술에 능한 자들이라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나 려경인은 스스로의 힘이 아직까지 못 미더운 듯했다.

“결계 역시 나의 힘을 더할 것이다. 이들이 주위를 위험하게 만들면 그것은 결계를 소홀히 한 그대의 죄가 아니라 사인의 죄로 여겨지게 될 테니. 그것만은 막아야겠지.”

하신후는 차갑게 답하고서 물속의 사인들에게로 다가갔다. 푸른 물의 장벽이 그가 다가가자 문이 열리듯 형태를 달리했다. 그러자 잠겨 있던 사인들의 모습이 한결 분명하게 드러났다.

하신후가 중얼거렸다.

“이들은 이미 살갗이 불어 흡사 물에 빠진 시체와 같아졌군.”

“…….”

“저주에 놓여난다 해도 평생 이 살갗의 흉을 지우지 못하고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은 태만했던 려 태수 그대의 과오야. 그 사실을 쉬이 잊지 않기를 바라지.”

그리 말하는 하신후는 흡사 자비로운 군주처럼 보이기도 했다. 까딱하면 그가 정말로 사인에 대한 원한을 잊었다고 믿게 될 정도였다. 사인을 제국인과 동등하게 대해, 그들을 백성으로서 보살피려 하는 듯 보이니 말이다.

이래서야 연이 아니라 그가 제국에 사는 사인들의 군주처럼 보이지 않는가.

연은 정체 모를 감정이 치밀어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곧바로 하신후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는 해쓱해진 그녀의 안색을 멈칫 살피고서, 려경인을 돌아보았다.

“이곳으로 곧 사람을 보내겠다. 그들이 그대와 그대의 술사들을 도울 것이다.”

자신은 이만 이곳을 떠나겠다는 듯한 투였다. 그에 려경인이 급히 물었다.

“하면 말씀하셨던 오늘 밤의 일은-.”

“나의 말과 같이 진행될 테지.”

간결한 답에 려경인이 고개를 조아렸다. 하신후는 연에게로 돌아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연은 차마 그를 올려다볼 수 없었다. 복잡한 감정이 가시지 않는 탓이었다.

그들이 계단으로 향하던 순간, 하신후가 문득 떠오른 것이 있다는 듯 려경인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군. 그대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다.”

“예?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려경인이 예상치 못한 말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 가의 희설이 자꾸만 내 겨울 별장으로 찾아오겠다 청을 하는데, 그대가 좀 막아줬으면 좋겠어.”

하신후의 말에 려경인의 표정은 한층 더 묘해졌다.

“진희설 님이시라면 전하의 오랜 벗이실 텐데… 제가 어떻게 그분을….”

벗이라고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누가 보아도 그저 우정뿐인 관계가 아님을 암시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 태도는 이어지는 하신후의 말로 더욱 확실해졌다. 하신후는 어색하게 눈썹을 찡그리더니, 힐끗 연을 돌아보았다가 려경인에게로 다시 눈길을 돌렸다.

“벗이라 하지 마라. 그런 부름 탓에 그녀가 자꾸 나와 약혼을 꾀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 벗이라 부를 것 없다. 우린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니야.”

말투나 태도가 어쩐지 자신의 눈치를 살핀 듯하여 연은 덩달아 어색한 느낌이 밀려들었다. 물의 장벽 속 사인들을 본 탓에 잠시 잊고 있었던 ‘내 여인’이라는 부름이 갑작스럽게 다시 떠올랐다.

려경인 역시 뜻밖의 상황인 듯했다. 하신후는 어리둥절해져 있는 려경인에게 친히 어찌해야 하는지까지 설명해주었다.

“진희설은 제국 원신의 대사제다. 그대 역시 자신의 영지를 지니고 있는 데다 그 영지에 지금처럼 골치 아픈 문제까지 생겼으니, 대사제에게 방문을 청하는 것도 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그대의 사정을 들으면 희설 역시 쉽게 거절하지는 못할 것이다.”

려경인이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밝아진 표정으로 답했다.

“그 말씀은, 제가 그분을 초청하여 그분께서 전하를 뵈러 가지 못하도록 하라는 뜻이시로군요.”

그 말을 그리 해맑은 표정으로 하니, 말의 내용과 표정이 영 어울리지를 않았다. 그러나 려경인은 제가 능히 해낼 수 있는 일이 생겨 기쁜 모양이었다.

“반드시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가 다시 고개를 조아리자, 인사를 받은 하신후가 등을 돌렸다. 잠시 후 연과 하신후는 지하를 떠나 다시 지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연은 햇살이 눈을 찌를 듯 강렬하게 느껴졌다. 지하에서 겪은 모든 일로 인해 심란하기 그지없어진 까닭이었다.

하신후와 려경인의 대화로는 ‘용의 피’가 사인들을 저리 만들었다고 했다. 은곡 역시 자신에게 피를 요구하지 않았던가.

대체 무엇이 어찌 되고 있는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처음으로 모든 것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자신을 여기 보낸 신관들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은곡의 배후에 신관들이 맞닿아 있을 것이라는 직감 때문이었다.

하면 그들의 계획이라 함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들이 저 사인들을 저리 만든 ‘용의 피’란 연 자신의 피인 것일까? 그러나 려경인의 결계와 물의 장벽 때문인지 저 사인들에게서 연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점 역시 의아했다.

“…무엇이 그리 고민되느냐.”

문득 곁에서 하신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흠칫 고개를 드니 그는 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이 몹시도 차분해서였을까. 연은 무심코 속마음을 꺼내 보였다.

“저 사인들을 저리 만든 것이 요, 용의 피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용이라니…. 용이 어찌하여 저들을 저, 저리 만든단 말입니까. 저 물속의 상한 이들은 모두 요, 용의 일족인데 말입니다.”

어쩌면 제대로 된 답을 피할 것이라 생각했건만 하신후는 의외로 순순하게 답을 주었다.

“저들을 저리 만든 것은 죽은 월의 피다. 신룡 월은 이미 죽어 없으니, 그의 피가 어찌 쓰일지는 지금 그 피를 손에 넣은 자들이 정하는 것이지.”

월의 피.

연의 피가 아니라 월의 것이다. 그래서 연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연은 하신후의 말에 안도했다. 그러나 안도 뒤에 따르는 것은, 더욱 큰 의문이었다.

하면 왜 은곡과 그 배후는 연의 피가 아니라 월의 피를 사용했단 말인가? 신관들 역시 그 배후와 한패라면, 그것은 더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하신후 앞에서 계속 고민하는 모습만을 보일 수는 없었다. 연은 말을 돌리듯 물었다.

“…저를 처, 첩자라 의심하실 텐데 왜 제 물음에 답을 주십니까.”

그리 묻자 이번에는 하신후도 멈칫할 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그는 잠시 연을 빤히 바라보다가 멋쩍게 미소를 보였다.

“으음, 나도 모르겠군.”

“모른다니….”

그의 미소에는 괴상한 설득력이 있어, 연은 옅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사실 그가 이리 순순히 답을 주니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듯도 했다.

신전에서 살아온 지난 긴긴 시간 동안 누구도 연의 중한 질문에 이리 순순히 답을 준 적이 없었다. 가장 궁금한 질문에는 늘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하는 나날이었다.

그렇다고 적의 미소에 헛웃음이나마 덩달아 표정이 풀리고 말다니. 웃음 뒤에 따라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씁쓸함이었다.

* * *

하신후는 들어올 때 지났던 수상한 골목을 빠져나가며 다시 연의 손을 쥐었다. 이상하게도 그가 손을 쥐면 연을 힐끔대던 묘한 시선이 사라지는 듯했다. 새삼 편리한 일이었다.

“하면 전하, 이제는 무, 무엇을 하실 건가요?”

골목을 벗어난 뒤, 연은 말간 눈으로 하신후를 보며 물었다. 하도 머리를 열심히 쓴 탓인지 분노가 치밀었던 탓인지 조금 피로감이 드는 것 같기도 해서였다.

더 피로해지기 전에 차라리 하신후에게 자신이 따라나선 이유를 넌지시 전하는 것이 나을 듯했다.

“혹 리경을 보, 보러 가실 계획은 없으십니까. 사실 저는 리, 리경이 염려됩니다. 일전에 전하께서 그가 요, 용의 책을 지녔다 하시는 것을 들었으니까요. 이 도읍 온 곳이 요, 용, 용과 관련된 것투성이인 듯하여 염려가 됩니다.”

염려된다는 말을 두 번이나 했으니 진심이 잘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가 순순히 답을 줄 것이라는 연의 기대와 달리, 하신후는 돌연 조금 눈빛을 달리했다. 무언가 불만스러운 말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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