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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15)화 (15/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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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을지도 모르겠다고 하더니, 하신후는 정말로 순순히 연을 데리고 기루를 나섰다. 그러고 보니 기루라고 해도 적월루에서 기녀를 본 적이 없었다. 정말 기루가 맞긴 한 건지도 조금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연은 기루 대문을 나서며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설마 기루인 척하면서 실은 저 안에서 다른 꿍꿍이들이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니겠지?

평범한 객점을 놔두고 굳이 저 기루를 통째 빌리는 이상한 선택을 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의문이 어린 연의 표정을 알아챈 것일까. 문득 하신후가 입을 열었다.

“한때 내 벗이 이 도시에 들어 저 기루 자리의 객점에서 오래 머문 적이 있었지. 전쟁 중의 일이다.”

“전쟁이라면….”

“이백 년 전쟁이지. 사실 이백 년이라는 건 과장이고, 실제로는 170년 정도 걸렸지만.”

시작하여 끝을 보기까지 이백 년이 걸린 전쟁이라면 하나뿐이다.

용의 일족과 제국인 사이에 벌어진 전쟁.

하신후의 입에서 그 이야기를 듣게 되다니 새삼 기분이 이상했다. 연은 무심코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진지해졌기 때문일까. 금방 입을 다물어버릴 줄 알았던 하신후가 연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꽤 어렸어. 귀족으로 태어났으니 원한다면 언제까지든 젊은 모습 그대로 지낼 수 있었지만, 그때는 내가 지금처럼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믿지 않았다.”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였다. 덕분에 은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내 벗은 정말로 전쟁 중에 죽었지. 그가 죽어 전쟁은 끝났고, 나는 아직 여기 있어. 여전히 그때와 같은 꼴을 하고서.”

연은 무심코 하신후의 말을 반복했다.

“…그가 죽어 전쟁이 끝났다니….”

그게 무슨 뜻인지, 물으려던 순간이었다.

“그런데 너는 언제까지 내게 그리 말끝을 흐릴 거지? 예법을 아예 무시하기로 한 것이냐.”

하신후가 옅게 웃음을 보였다.

“네 혀를 조금 잘라야 정신을 차리려나.”

“…소, 송구합니다.”

연은 인상을 찌푸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가 정말로 예법 때문에 말을 꺼낸 것 같지 않았다.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그밖에도 많이 하지 않았던가.

그는 더 이상 그 벗에 관해 말해주고 싶지 않아진 게 분명했다. ‘그가 죽어서 전쟁이 끝났다.’ 그게 대체 무슨 뜻일까.

모든 이들이 저마다 비밀을 감추고 있는 듯하여, 또다시 기분이 시무룩해졌다. 연은 불만스럽게 입술을 비죽이며 그저 하신후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오늘도 그는 걸음이 느리고 보폭이 작았다. 이제는 그가 혼자 있을 때는 그리 걷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어제 새가 되어 미행할 때 지켜본 덕분이었다.

그가 자신을 위해 걸음을 늦춘 것이 느껴지자 약간 기분이 나아졌다.

“안색이 조금 창백한 듯한데. 피로하지는 않으냐.”

별로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문득 하신후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혹 몸이 좋지 않은 것이라면 지금이라도 돌아가거라. 함께 가주마.”

하신후가 연의 얼굴을 살폈다. 또다시 특유의 의원 같은 표정이었다.

연은 잠시 그의 눈길을 마주하다가 충동적으로 물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냥 여쭙고 싶은 것이 생겨 고민하고 있었어요.”

“내게 궁금한 것이라. 뭐지?”

“전하께서는 왜 사, 사인을 제국인으로 대하려 하십니까. 벗을 앗아간 전쟁 때문에라도 그들을 미, 미워해야 할 것 같은데요.”

“…너는 그들을 그들이라 부르지, 우리라 부르지 않는구나. 너 역시 사인일 텐데.”

“그것은….”

“사인에게는 재주가 많다. 그러니 나는 너희를 제국의 일부로 들여, 그 재주를 쓸모 있게 쓰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데.”

하신후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때문에 지금도 그 일에 필요한 자를 만나려 하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하신후는 용을 죽이고 사인을 제국 밖으로 몰아냈으면서도 제국에서 가장 사인 동화 정책에 우호적인 자였다. 황제 하을령이 사인에 대한 핍박을 막으려 하지 않는 것과는 결을 달리하는 태도였다.

그렇다고 그가 사인을 진심으로 꺼리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전쟁을 겪은 귀족이었다.

영원히, 그때의 참극을 잊을 수는 없으리라.

연은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적월루를 등진 지 별로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거리 풍경은 금세 달라져 있었다. 빈곤한 자들이 모여 사는 구역인 듯했다. 남루하고 비뚤거리는 계단은 오르기에 제법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

연이 멍하니 계단을 올려다보자 하신후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가 다치면 어쩐지 내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서.”

“…….”

“네 안색도 여전히 나쁘고.”

말끝을 잘라먹는 것은 이제 보니 그가 더 심했다. 연의 버릇이 그새 그에게 옮겨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지난번에 그의 손을 잡았더니 꽤 걷기에 편하게 느껴졌던 것이 떠올랐다. 안 그래도 열을 앓고 나서인지 아닌 척 해보려 해도 약간 어지럼증이 느껴지던 참이었다. 그러니 굳이 거절할 이유가 뭐 있겠는가.

연은 순순히 그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랐다. 조금 오르고 나니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계단 가운데 작은 빈터가 있어, 그곳 난간 너머로 못 보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풍경 가운데, 누군가가 있었다.

마치 하신후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것 같았다. 얼굴을 어두운 붉은 빛 가면으로 가린 자였다.

“오셨습니까, 북왕 전하.”

앳된 목소리였다. 소년이 하신후를 바라보는 순간 가면이 사라지며 목소리만큼 앳된 얼굴이 드러났다. 열여섯이나 열일곱 살 정도나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그러나 연은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소년은 귀족이었다. 그것도 불로불사하는 상등 귀족이 분명했다.

“려 씨 가문의 경인, 북왕 전하를 뵙습니다.”

역시나 귀족이었다. 제국에서 성씨를 지닐 수 있는 것은 귀족들이나, 황명으로 특별한 은혜를 받은 자들뿐이었다. 려 씨라 함은 소년이 제국을 지키는 4대 가문의 일원이라는 것을 뜻했다.

하신후는 자신에게 소년의 예를 갖춘 인사에 짧은 손짓으로 답했다.

“일어나라. 네가 말한 사인들은 어디에 있지?”

“위험한 상태이니 은밀한 곳에 두었습니다.”

려경인이 긴장한 듯 답했다. 그러다 그제야 그의 눈길이 연에게 닿았다. 매우 놀란 듯한 눈빛이었다.

“…아.”

연은 뒤늦게 자신이 하신후와 여전히 손을 잡은 채라는 것을 깨달았다. 려 씨 공자를 보게 되어 놀란 나머지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애초에 손을 잡고서 이리 무방비해져 있던 것이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당황해서 슬그머니 손을 빼려 했으나, 하신후는 생각보다 연의 손을 단단히 쥐고 있었다. 그 사이 려경인이 앞장서서 그들을 어느 골목으로 안내했다. 하신후는 려경인이 등을 돌린 후에야 연을 내려다보며 작게 속삭였다.

“네가 달아날지도 모르니 이 손은 놓아줄 수가 없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손을 안 잡고 있으면 그녀가 달아나도 못 잡을 것이라 믿고 있기라도 한 걸까.

평범한 주술사라면 제 아무리 달아나는 데 능하다 해도 하신후를 따돌릴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설마 연의 정체를 눈치채기라도 한 걸까?

아니, 눈치챘다면 더더욱 손을 잡고 있겠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연은 당황한 채로 맥없이 그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섰다. 으스스한 분위기가 풍기는 골목이었다.

한눈에 보아도 위험한 일을 하는 자들이 머무는 곳 같았다. 물론 그들이 정말로 연에게 위협이 될 수 있을 리는 없지만 말이다.

문득 골목의 수상쩍은 사내들 몇몇이 연의 얼굴을 힐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저주흔 때문인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하신후의 곁에 있을 때는 깜빡 잊고 있었다. 저주흔 덕분에 연은 어딜 가나 주목을 받았었다. 나쁜 의미로서의 주목이었다.

본래라면 인간들이 자신을 하찮게 본다며 혀를 찼겠으나 수려한 용모의 하신후와 나란히 있으니 비교가 되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연은 자기 얼굴을 괜히 빈손으로 문질렀다. 그것을 본 하신후가 갑자기 연을 돌아보고 뺨을 살짝 건드렸다.

그 순간 연은 제 얼굴에 무언가 덧씌워진 것을 느꼈다. 주술로 만들어낸 가면이었다.

당황해 그를 올려다보니 그가 조용한 눈웃음을 지어 왔다.

“저런 자들 때문에 마음 쓸 필요 없다. 너도 술사이니 앞으로는 내게 허락을 구할 것 없이 네가 편한 대로 너를 지키는 술법을 써도 좋아.”

지키는 술법이라….

가면을 쓰고 나니 보는 시선이 줄어 한결 편하기는 했다. 자신을 지키는 술법이라 부를 만했다. 애초에 저주흔이 없을 때도 연은 그다지 사람의 시선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자신을 보며 광영이라느니 경탄스럽다느니 하는 말들을 듣는 것도 이젠 질렸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가면을 쓰고 다니는 것도 제법 편할 것 같았다. 그러나 하신후의 말대로, 이것은 귀족의 앞에서 행하기에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하여 려경인 역시 하신후에게 인사를 올리려 가면을 없애지 않았던가. 하신후가 왜 자꾸 연에게 이렇게 친절을 베푸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렴 그는 자신의 관대한 아량을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직도 연을 첩자라 여겨 회유하기를 포기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연은 입을 비죽거리면서 잠자코 하신후의 손에 붙잡힌 채로 그를 따랐다.

* * *

“이곳입니다.”

려경인이 걸음을 멈춘 곳은 무너질 듯 허름한 가옥 앞이었다. 가옥의 문을 열자, 안에 영력을 들인 진이 그려져 있음이 느껴졌다. 무언가를 주술로서 감추고자 함이었다.

려경인이 앞서 가옥으로 들어서자, 진이 그에게 반응했다. 동시에 감추어졌던 지하 계단이 드러났다.

려경인이 계단으로 내려가자 푸른 불이 줄지어 밝혀지며 계단을 비췄다. 하신후가 연을 이끌어, 자신의 앞으로 세웠다. 그녀가 넘어질까 봐 염려스럽기라도 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내내 손을 잡고 오더니, 여기서도 지나치게 관대한 친절을 베풀고 싶은 모양이었다.

계단 끝에 다다르니 려경인이 묘한 표정으로 연과 하신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려경인의 시선은 가면을 쓴 연의 얼굴에 머무른 채였다.

하신후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말이 나온 것은 그때였다.

“려 태수, 내 여인에게 무언가 묻고 싶은 것이라도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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