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다음부터는 내게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 될 것이다.”연은 찌푸린 얼굴로 근엄하게 명했다. 차가운 목소리에 은곡이 멈칫했다.
“화가 나신 건가요?”
“당연하지. 너 같으면 내가 널 멋대로 만지면 좋겠어?”
그 말에 은곡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싫지는 않을 것 같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정말이지 미친 자가 따로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자였다.
연의 눈빛에 한심함이 어리자, 은곡이 얼른 말했다.
“아무튼 얼른 드시지요. 다 드시고 피를 주셔야 하니까요.”
그러나 연은 젓가락을 아예 내려놓아 버렸다.
“내가 언제 그 의식을 치르겠다고 했지?”
“예?”
“도와달라는 말을 하려면 내게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부터 설명해라. 여긴 나의 신전도, 용의 산도 아니야. 처음 보는 너를 어찌 믿고 네게 내 힘을 빌려줄까.”
용의 피는 강력한 힘을 지닌다.
연이 신룡으로서 지닌 가장 큰 능력은, 남을 자신의 뜻대로 휘두르는 것이었다. 연이 진심으로 명령을 하면 그 어떤 인간도 그 명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힘은 연의 피에도 깃들어 있었다. 연 자신의 온전한 힘만큼 강하지는 않다 해도, 평범한 인간들을 휘두르기에는 충분한 영력이었다.
그러니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런 힘을 그냥 내줄 수는 없었다.
허락의 의식을 통해 피를 내주면, 피를 받은 이도 그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직 너를 믿지 않는다.”
연은 은곡을 지그시 쏘아보았다. 은곡이 믿어달라는 듯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희가 하는 일은 모두 당신께서 하시는 일과 그 뜻을 같이 합니다. 이 제국에서 핍박받는 용의 일족을 구하려 하는 것입니다.”
“용의 일족이라. 제국인들은 내 백성을 사인이라 부르지. 용이 아니라, 뱀의 일족이라고 말이야.”
심드렁하게 중얼거린 연의 눈빛이 어느 순간 서늘해졌다. 청초한 얼굴에 냉막한 표정이 감돌자 더없이 차갑게 보였다.
그러다 한순간, 가볍게 들어 올린 연의 손끝에서 핏빛 안개가 번졌다. 은곡의 눈에서 표정이 사라진 것은 그 순간이었다.
연에게서 흘러나온 핏빛 안개가 은곡을 감쌌다. 연은 갑자기 입을 다물고 인형처럼 굳어버린 은곡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인간에게 직접 이 힘을 써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신관들이 지금 연을 보았다면 깜짝 놀라 핀잔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그들은 떠나는 연에게, 하신후에게 들킬지도 모르니 힘을 쓸 때는 최대한 신중하게 사용하라고 당부했었다.
물론 지금도 연은 매우 신중했다. 이 정도는 힘의 파장을 하신후에게 들키지 않고 은밀히 행할 자신이 있었다.
“어차피 네가 맨정신으로 내게 무슨 설명을 하든, 나는 네 말을 믿지 못할 거다. 하지만 이렇게 내가 네 정신을 통제할 때는 다르지.”
“…….”
“너는 정말로 용의 일족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이냐? 솔직하게 답해.”
연의 간결한 명령에 은곡의 눈동자가 그녀를 담았다.
“그렇습니다. 저는 용의 일족을 위하려 일하는 자입니다.”
“…너는 이 도시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거지?”
“노예를 만들고 있습니다. 용의 피로 길러낸 꽃을 받은 자들은 모두 피의 노예가 됩니다. 이미 많은 이들이 그리되었습니다.”
“노예?”
연은 자극적인 단어에 인상을 찡그렸다.
“멀쩡한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어서 어쩌려고?”
“그들의 혼백을 바치게 하여….”
느리고 공손하게 말을 잇던 은곡이 문득 말을 멈췄다. 마치 목에서 말이 걸려 더는 뱉어지지 않는 것 같기라도 했다.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
혼백을 바친다는 생각지도 못한 말까지 듣게 된 참이었다. 연은 반드시 뒷말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기다려도 은곡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심지어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숨이 막히는 듯 두 손으로 목을 감싸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정말로 숨이 넘어가버릴 것 같았다.
“…그만. 답할 필요 없다.”
연은 괴로워 보이는 은곡에게 떨떠름하게 명령했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구속에서 풀려난 듯 은곡이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었다.
무언가 수상했다.
연이 명령했음에도 말을 잇지 못하다니. 그런 일은 흔히 일어나지 않는다. 누군가 강한 힘으로 은곡에게서 다음 말이 나오지 못하도록 미리 손을 써둔 것이다.
틀림없이 음모가 있어 보였다.
“대체 누가… 내 힘을 막을 만큼 강한 능력으로 네 입을 막아둔 거지…? 이건 답할 필요 없다. 어차피 자기 정체를 숨기려 손을 써둔 것일 테니.”
최종적인 목표는 알 수 없었지만, 은곡이 연에게 피를 구한 이유는 조금이나마 밝혀졌다. 그는 이 삼진의 백성들을 조종하여 그들의 혼백을 바치게 만들려 하고 있었다.
“혼백을 바친다니…. 그런 끔찍한 짓은 도울 생각 없어. 게다가 너처럼 배후가 수상쩍은 자는 더더욱 돕고 싶지 않아.”
대체 어찌된 일인 걸까.
왜 이 자는 ‘용의 일족을 돕겠다.’고 하면서, 동시에 이 도시에서 무엇을 하려는지 말하지 못하는 걸까.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이 문답을 비밀로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은곡에게서 기억을 지웠다.
조금 전 연에게 정신을 통제당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연이 힘을 거두자, 핏빛 안개가 사라지며 은곡의 얼굴에 표정이 돌아왔다.
연은 태연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용의 일족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나의 사명이지. 하지만 오늘 네게 피를 내주고 싶지는 않구나. 그러니 오늘은 이만 여기서 헤어지는 게 좋겠다.”
“…어째서입니까?”
은곡의 질문에 연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짧게 대꾸했다.
“내 마음이다. 내가 신룡이니까 당연히 내 마음대로 할 거야. 더는 어떤 질문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
“게다가 내 피가 없으면 무너지는 계획이라니, 누굴 혈액 주머니로 알아?”
연은 찌푸린 눈으로 은곡을 흘기며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녀의 단호한 태도 덕분인지 은곡은 더 이상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 * *
“오랜만에 날고기를 먹어서 그런가. 좀 메슥거리네.”은곡이 따라오지 않는 걸 확인한 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은곡이 또 나타날까 봐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녀는 얼른 저자를 빠져나오려 으슥한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주위가 조용해져서였을까. 조금 전 은곡과 나눈 말들이 새삼 곱씹어졌다.
은곡의 배후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짐작 가는 바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신관들은 늘 연에게 모든 것을 알려준 적이 없었다.
“내가 알려고 할 때마다 항상 숨기려 들었지…. 하지만 난 이제 신전에 있는 게 아닌걸. 여기서는 조금 더 내 뜻대로 할 거야.”
연은 혼잣말로 다짐하며 씁쓸한 기분을 떨치려 애썼다.
‘당신은 일족의 구원자이십니다. 당신의 힘이, 당신의 피가 우리를 지킬 테니까요.’
그런 입에 발린 말을 들어온 게 대체 몇 년이던가.
인간의 몸으로 살게 된 지도 어느새 150년 가까이 시간이 흘러 있었다. 그동안 연은 인간의 삶에 대해 많은 걸 배웠지만, 무언가가 의심스러워질 때마다 제대로 된 답을 들어본 적은 없었다.
연을 제국에 잠입시킨 신관들의 미덥지 못한 태도가 떠올랐다.
어쩌면 신관들은 이미 은곡의 계획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모르는 채 계획에서 따돌려져 있는 것은 연뿐이었다.
“다들 내 피만 원할 뿐이지 내게 뭘 말해주려 하지는 않는다니까. 괘씸한 인간들….”
투덜거리던 연은 어쩐지 점점 기운이 빠졌다. 주술로 몸에 남은 고기 냄새를 지우고 청결을 되찾아 보았지만, 기분 탓인지 메슥거림이 가시질 않았다.
대충 배도 채웠으니 그냥 적월루로 돌아가고 싶었다. 신기하고 재미있게 느껴지던 저자의 불빛과 가게들도 영 심드렁해졌다.
은곡을 만난 순간, 다시 신전으로 돌아가 그들의 감시를 받게 된 기분이 들었다. 이 도시에 온 뒤로, 은곡은 계속 연의 정체를 알고서 몰래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기분 나빴다.
새가 되어 적월루에 도착한 연은 저주흔 있는 모습으로 돌아온 뒤,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피곤했으나 방은 몸을 누이기에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외출 전 일찍 잠이 들어버렸던 게 문제였다. 이 방은 침실이 아니니 따로 청을 하지 않으면 이부자리를 깔아놓을 리 없었다. 한데 아까 그냥 잠이 들어버렸으니 무엇 하나 없는 그대로였던 것이다.
잠든 이를 깨워 굳이 잠자리를 따져 물어줄 세심한 하인이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연은 그냥 손님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 여기 갇혀 감시 받고 있는 처지 아니던가. 하여 결국에 이 처지였다.
맨바닥에 누워 자려니 돌연 씁쓸함과 짜증이 밀려들었다. 차라리 다홍이 있는 원래의 객점으로 돌아가서 지내는 편이 나을까.
내일 하신후가 돌아오면 일단 여기서 내보내 달라고 청해봐야 할 것 같았다. 다홍을 만나 둘이서 지내는 편이 덜 심심할 것 같았다.
아니, 그런데 하신후가 내일 여기 오기는 하는 걸까?
그 생각을 하다 보니 저절로 심란해졌다. 연은 인상을 찡그린 채 뒤척이며 잠을 청했다.
가까스로 잠을 청했던 연이 깬 것은 이른 새벽이었다.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어 옅은 잠에서 깨어버린 것이다.
“으….”
머리도 몸도 이상하게 무거웠다. 연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어렴풋 방안에 누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누구….”
그 순간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하신후였다.
“나야.”
연의 눈이 흠칫 크게 떠졌다.
“왜… 남이 자는데….”
몸을 일으키려는데 어쩐지 어지러웠다. 메슥거림도 잠들기 전보다 더 심했다. 몽롱한 눈에 하신후의 잘생긴 얼굴이 흐리게 비쳤다. 그는 연에게 성큼 다가오며 몸을 숙였다.
“꿈속에서 누가 널 해치기라도 하는 건지, 내 방까지 비명 지르는 소리가 들리던데. 깨워주려 온 내게 감사 인사부터 올려야 하는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