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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12)화 (1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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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시장이라는 곳은 생각보다 더 신기했다.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거리를 보니 다가갈수록 마음이 두근거렸다.

날개를 파닥이던 연은 일단 어둡고 한적한 골목을 찾았다.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인간 모습으로 돌아오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몰래 나온 거니까 이번에는 저주흔을 없애도 되지 않을까…. 아니, 아예 제국인 같은 모습으로 변신하면 아무도 시비를 걸어오지 않으려나?’

저주흔은 눈동자 색깔을 감추려 연이 스스로 만들어놓은 흔적이었다. 없애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연은 조금 고민하다가 머리칼과 눈동자 색을 제국인들처럼 평범한 검은 빛으로 바꾸었다. 눈가와 콧날을 일그러뜨린 저주흔이 사라지자 연의 본 얼굴이 드러났다.

사인의 붉은 눈동자나 옅은 검푸른 빛이 도는 흑발은 독특한 기운을 지닌 것이라서 연의 힘으로도 똑같이 따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평범한 제국인의 눈동자나 머리칼 색깔이라면 변신하기 어렵지 않았다.

이윽고 골목 밖으로 나온 연은 평범한 제국인 여인처럼 보였다. 물론 평범하다고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얼굴을 갖고 있기는 했다.

연약해 보일 정도로 청초하고 가녀린 외모를 하고서, 연은 열심히 코를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이 냄새는 대체 뭐지?’

새에서 인간으로 돌아온 까닭일까. 인간의 음식 냄새가 한층 유혹적이었다. 야시장 거리에는 그을음이 섞인 달콤한 냄새가 퍼져 있었다. 무언가를 불에 구워 팔고 있는 것 같았다.

배고픈 연은 홀린 듯이 냄새를 따라갔다. 곧 꼬치구이를 파는 행상들이 줄지어 자리 잡은 것이 보였다. 그중에서도 떡꼬치를 구워 파는 가판이 연을 유혹한 냄새의 근원이었다.

‘설마 하신후가 이런 한밤중에 적월루로 나를 찾아올 리는 없으니… 여기서 시간을 좀 보내도 괜찮을 거야.’

그가 하릴없이 야시장 꼬치구이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니 들킬 염려는 없을 것이다. 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떡꼬치를 향해 슬금슬금 접근했다.

“이건 얼마야? 맛있어 보이는데.”

돈이라면 처음 저자에 나올 때부터 품에 잘 챙겼다. 연은 자신만만하게 상인의 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상인은 값을 말하는 대신 묘한 웃음을 흘렸다.

“요 계집이… 얼굴 좀 반반하다고 왜 다짜고짜 반말이야.”

“응?”

“아니면 수작이라도 부려보려는 게야?”

멀쩡한 떡꼬치 상인인 줄 알았더니, 영 미친 것 같았다. 물론 처음 보는 사이에 말을 건넬 때는 일단 말을 높이는 게 제국의 예법이란 걸 깜빡 잊은 건 연의 실수였다. 그렇다고 수작이라니, 대체 왜 반말 좀 했다고 결론이 그리로 흐른단 말인가.

“수작 아, 아닌데요. 죄송해요. 떠, 떡꼬치 얼마냐고요.”

존댓말을 하기가 싫었지만 연은 어쩔 수 없이 얼른 말을 높였다.

“예쁜 여자한텐 싸게 줘야지. 1전만 줘.”

배가 고파 얼른 떡꼬치가 먹고 싶어서 1전을 내주려던 차였다. 연은 멈칫 돈을 건네려던 손을 멈췄다.

“…그, 근데 왜 그쪽은 저한테 바, 반말하세요?”

연의 미간이 슬그머니 찌푸려졌다. 그녀는 하등한 인간들 따위와는 태생부터가 다른 존재다. 아니, 존재를 떠나서 손님은 존대를 쓰는데 주인은 반말을 하는 법이 어디 있나. 아까 다짜고짜 수작 얘기를 들어서 그런지 더욱 신경이 거슬렸다.

“뭐? 그거야 내가 하는 장사니 내 마음이다. 그래서 산다는 거 맞지? 얼른 돈이나 내.”

상인이 연에게 꼬치를 들어 내밀었다.

“…그냥 아, 안 살래요.”

“뭐가 어째?”

상인이 당황한 듯 연을 노려보았다. 연도 물러서지 않고 그를 마주 노려보았다. 연의 눈빛에 상인이 무심코 움찔했으나 곧바로 더욱 성을 냈다.

“아니 이 계집이 파는 사람 기분 나쁘게-. 왜 바쁜 사람을 두고 장난을 쳐?”

상인이 덥석 연의 손목을 붙들었다. 돈을 쥔 손이었다. 그는 돈을 내놓으라는 듯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연은 겁도 없이 자신의 손목을 붙든 상인을 말끄러미 응시했다.

순간적으로 노기가 치밀었으나, 이런 자에게 노기를 느껴 무엇 하겠는가. 용으로서 보다 기품 넘치는 자애를 보여야 할 것 같았다. 비록 상대가 그녀의 백성인 사인이 아니라 제국인 사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연은 픽 웃으며 제 손목을 쥔 사내의 손을 종잇장처럼 가볍게 떼어냈다.

“이제 보니까… 떡꼬치가 저쪽 고기 꼬치보다 훨씬 안 팔려서 괜히 나한테 성질부리는 거 맞지? 이 손 놔. 안 산다면 안 사는 거니까.”

연의 가녀린 손이 자신의 손아귀 힘을 그리 쉽게 제압하자 상인은 기겁하며 연을 바라보았다. 당황하다 못해 충격을 받은 듯한 눈이었다.

연은 쯧쯧, 다시 혀를 차고서 말했다.

“사람을 겉보기로만 판단하면 안 돼. 짧은 인생을 사는 너희니까, 하루라도 빨리 깨달음을 얻는 편이 좋아.”

평범한 인간의 삶은 무척 짧다. 대개 100년도 안 되는 인생을 사는 존재들이니 하루라도 더 빨리 열심히 현명해지는 편이 나을 것이다. 물론 죽임이라도 당하지 않는 한 무한한 삶을 누리는 연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연은 자신을 황망하게 바라보는 상인을 두고서 다른 행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기 꼬치는 먹고 싶지 않으니 노릇노릇 구운 저 노란 꼬치를 먹어보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저건 옥수수 꼬치라고 하는구나…. 맛있겠다.”

연은 천진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옥수수 꼬치에게로 다가가던 그녀의 걸음은, 예상치 못한 상대에게 가로막혔다.

“과연 당신이십니다. 듣던 것보다 더욱 너그럽고, 또 현명하시군요. 저런 하찮은 인간에게 일일이 분노하지 않으시는 것을 보니 감격스럽습니다.”

이게 웬 느닷없는 아부란 말인가.

연은 놀라서 자신 앞에 선 상대를 바라보았다.

“…제사장… 은곡?”

분명 하신후에게 듣기로 이 도읍 토착신 정원의 제사장이라 했던 자였다. 연의 중얼거림에 은곡이 활짝 미소를 건넸다. 이어진 그의 말은 연에게 더욱 충격적인 것이었다.

“고귀한 신룡께서 한 번의 만남만으로 제 존재를 기억해 이름 또한 외워주셨을 줄이야. 광영입니다.”

‘신룡’이라고 했다.

두 귀에 똑똑히 그리 들렸다. 연은 충격으로 얼굴을 굳히며 소리 낮춰 물었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당황한 연의 말에, 은곡은 그녀에게로 몸을 숙여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놀란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저는 용의 백성입니다. 제국에서 태어났으나 신룡을 섬기지요. 또한 용의 산에는 저의 친구들이 많답니다.”

“…친구….”

연이 놀라 중얼거리는 순간, 당황스러운 상황과는 동떨어진 뻘쭘한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연의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였다.

은곡이 멈칫 연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북왕 하신후와 계셨던 것 아니셨습니까? 그가 당신을 굶겼나요? 그가 호색한이기는 해도 그런 짓을 할만한 자인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호, 호색한?”

연은 은곡의 말에 또 한 번 놀라 눈을 치켜떴다. 은곡은 무언가 말하려다가, 그대로 몸을 돌려 앞장섰다.“따라오시지요. 시장하실 테니 제가 갈만한 곳을 안내하겠습니다.”

연은 당황한 가운데서도 머뭇거리다가 그를 따라갔다. 제국에 숨어들어올 때, 신관들에게서 이런 만남이 계획되어 있다는 말은 들었던 적 없었다.

그렇다고 은곡이 거짓을 꾸며대는 것 같지도 않았다. 일단은 그가 하는 말을 더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 * *

은곡이 연을 데려간 곳은 조금 짜증스럽게도 날고기를 파는 가게였다. 날 것 고기라면 인간의 모습이 된 뒤 지난 150여 년간 충분히 먹어왔다. 그것도 이 가게처럼 피가 밴 날고기를 내놓는 곳이라면 더욱 별로였다.

“너는 정말로 나를 아는 자로구나. 그러니까 신관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런 날고기를 먹이려 드는 거겠지.”

연의 말에 은곡이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예. 알고 있습니다. 동물을 산 채로 드시는 것은 영 싫어하셔서, 어쩔 수 없이 그에 가장 가까운 신선한 날것을 준비해 드시게 했다지요. 그 몸에 흐르는 피의 힘을 가장 강력하게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당연히 이곳에서도 이런 것을 드셔야 합니다. 여기서는 이런 요리를 육회라 부르죠.”

연의 눈이 슬그머니 가느스름하게 찡그려졌다. ‘이곳에서도 이런 것을 드셔야 한다.’라니. 마치 신전을 떠난 뒤로 연이 이런 것을 먹지 않아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라도 한 듯한 말 아닌가.

“…꼭 나를 감시라도 한 것처럼 말하네.”

“감시라니요. 그저 언젠가 뵙게 될 날이 있기만을 바라다가, 이 도읍에 오셨다는 말에 한달음에 뵈러 간 것뿐입니다.”

“그래서 저자에서 다홍과 있던 내게 말을 건넨 것이구나.”

그러고 보니 다홍은 무얼 하고 있을까. 어째서인지 자신의 백성이라고 대뜸 말해오는 이 은곡이라는 자보다, 아무것도 모르는 다홍이 한결 가깝게 느껴졌다. 다홍은 당연히 연을 자신처럼 제국에서 태어난 평범한 사인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드십시오. 시장하셨을 테니까요.”

기름기가 도는 육회 접시가 눈앞에 놓이자 은곡이 연에게 웃으며 식사를 종용했다. 연은 떨떠름하게 육회를 내려다보다가 젓가락을 들었다.

“잘 먹을게.”

젓가락으로 고깃점을 집어 입에 넣자,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양념 맛이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신전에서는 아무런 양념도 없이 그냥 피가 흐르는 고기를 주곤 했었는데. 제국에서는 같은 날고기라 해도 이렇게 양념을 해서 먹는 모양이었다.

은곡은 말없이 고기를 먹는 연을 바라보다가 묘한 눈빛으로 미소를 지었다.

“많이 드십시오. 그리고 오늘 가시기 전엔 저희를 위해 피를 좀 주시면 좋겠습니다.”

젓가락질하던 연의 손이 멈추었다.

“…내 피를 달라고?”

“예, 신전의 예식 때 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신후가 이곳에서 벌어지는 저희의 계획을 눈치챈 듯합니다. 하여 더 강한 힘이 필요해졌습니다. 도와주셔야 합니다.”

연이 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계획이란 거냐. 설마 네가 축제 행렬에서 괴상한 꽃을 뿌려대던 게 그 계획인 거야?”

“보셨군요. 부끄럽고도 기쁜 일입니다.”

기쁜 일이라 말하는 은곡의 눈빛은 그러나 어쩐지 무척이나 싸늘했다. 숨기는 것이 있는 듯 불쾌한 눈이었다.

동시에 이상할 정도로 탐욕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보셨다면 더욱 말씀드리기 쉽겠군요. 저희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저희를… 저를 말입니다. 당신만이 저를 도와주실 수 있으니까요.”

낮게 중얼거린 은곡이 문득 손을 뻗어 연의 턱을 들어 올리듯 어루만졌다. 말씨는 더할 나위 없이 저자세였으나, 손길은 건방졌다.

“뭐하는 거지?”

연은 기가 차서 눈을 찌푸린 채 그를 노려보았다. 은곡은 천천히 손을 거두며 말했다.

“송구합니다. 평생 당신이 어떤 분이실지 상상만 하다가, 이리 직접 뵙고 도움을 구하게 되니 그 광영에 저도 모르게 흥분을 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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