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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11)화 (1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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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무표정하던 하신후가 멈칫 하을령을 바라보았다.

“사인 계집들을 자기 묵는 곳까지 끌어들였다던데.”

세상의 온갖 일들이 어찌 돌아가는지 감시하고 살피는 것은 본래 하을령의 가장 큰 재주였다. 사람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따르는 혼백을 부리는 것이니 그 재주가 더욱 교묘했다.

그렇다 해도 감시당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다니. 하신후는 진심으로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요 며칠 자신이 어째서인지 꽤나 무방비했던 모양이었다. 그의 반응에 하을령은 눈썹을 구기며 빈정거렸다.

“부정하지도 않는군? 사실이라면 제발 자제해. 백 년 만에 또 혈육의 웃기는 정분 소식을 듣고 싶지는 않으니까. 게다가 사인이라니.”

하을령의 얼굴에 잠시 살기가 번졌다.

“나는 가끔 그 벌레들을 다 죽여버리지 않는 오빠가 신기해. 사인을 제국인으로 취급해주자니. 우리가 가장 뜻이 다른 문제는 늘 그것이었지.”

하신후가 서늘히 답했다.

“모든 사인이 역도인 것은 아니니, 죄 없는 자들을 제대로 살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거참 너그럽군. 나는 그들을 볼 때면 권윤이 떠오르는데.”

하을령과 하신후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하을령의 눈빛은 살기 어린 듯 매서웠고, 하신후는 무표정했다.

“권윤을 죽인 건 월이지 그들이 아니다.”

하을령은 하, 헛웃음을 뱉듯 이죽거렸다.

“이리 너그럽다가 다음에는 정말로 사인 계집과 정분이라도 났다고 말하겠군. 하나도 아니고 둘을 끼고 놀다니 그 무슨 꼴이야? 나잇값을 해.”

“…음? 내가 대체-.”

“변명은 다음에 듣지. 오늘따라 그 궁상맞은 면상을 더 참아주기가 힘드니까.”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답변을 듣기 싫다는 듯 떠나버렸다.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환영처럼 하을령의 모습이 사라졌다. 서북에서 머나먼 수도의 황궁까지, 단숨에 돌아가 버린 것이다.

하신후의 맞은편에 자리한 것은 빈 의자뿐이었다.

“…둘이라니. 내가 언제 둘을 데리고….”

하신후는 멍하니 인상을 찌푸리다가, 비로소 떠오른 바가 있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좀 억울한데.”

그는 헛웃음을 짓듯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을령이 드디어 떠났으니 여기 더 있을 필요가 없었다.

하신후는 자리를 뜨기 전, 마지막으로 하을령이 있던 의자를 한 번 더 돌아보았다.

“너는 늘 정분에 너무 관심이 많아. 가엾기는.”

가엾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가게는 하을령과 권윤이 함께 왔던 가게가 있던 자리였다. 시간이 흐르며 자리를 차지한 가게들도 꾸준히 변했으나, 하을령은 지금도 삼진에 올 때면 꼭 이 자리를 들르곤 했다.

어리석고도 측은한 집념이었다.

죽은 권윤은 하신후의 가장 가까운 벗이기도 했다. 살아 있을 때는 제법 쓸만하더니, 그리 허망하게 사라지고 나서는 영 소식이 없는 벗이었다.

하을령이 이리 목을 매고 있는 걸 알면, 저승에서라도 되살아올 일이거늘.

그리 긴 시간 저승에 있었으면서 여태 살아 돌아올 방도 하나 찾지 못했단 말인가. 권윤답지 않았다.

“이쯤 되었으면 죽은 그놈이 환생하여 다시 태어날 만도 하련만. 내게도 네게도 기다리는 소식이 들려올 기미가 없구나.”

하신후는 떠나버린 동생에게 전하듯 낮게 중얼거리고서 등을 돌렸다.

그가 가게를 나서는 내내, 그곳의 누구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하신후는 마치 그림자처럼 유유히 남루한 사람들 틈새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이 앉아 있던 창가의 새 한 마리가 함께 하늘로 날아올랐다.

* * *

창 아래 몸을 숨기고 있던 새는 하늘로 가볍게 날아올라, 하신후의 삿갓을 내려다보며 멀찍이서 그의 뒤를 따랐다.

금빛이 도는 새하얗고 조그만 새의 눈빛에는 어렴풋이 복잡한 혼란이 어려 있었다.

‘리경이 용의 책의 앞선 주인을 죽… 였다고? 정말로 그랬단 말인가?’

새가 되어 날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연이었다.

조금 조마조마하긴 했지만, 연의 짐작대로 역시나 그녀의 변신술은 하신후를 속일 수 있을 만큼 뛰어났다. 그야 당연했다. 용의 모습에서 인간의 모습이 될 수 있기까지 그녀는 꽤나 열심히 수련을 해왔으니까.

그러니 새가 되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다. 새는 갖가지 짐승 가운데서 연이 변신하기에 가장 자신 있는 짐승이기도 했다.

‘리경이 설마 정말로 사람을 죽였을까…. 사인이라고 더 쉽게 억울한 의심을 받게 된 걸지도 몰라. 내가 직접 알아봐야 해.’

연은 하신후의 밉살스러운 삿갓을 노려보며 속으로 혼란스럽게 다짐했다.

황제 하을령이 사인에게 그토록 깊은 증오심을 갖고 있을 줄이야. 하신후 역시 겉으로는 차분한 척했으나, 속으로는 동생과 크게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월’이 연보다 앞서 존재했던, 전쟁을 일으킨 흑룡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저주 이야기는 연도 처음 듣는 것이었다.

‘월의 저주라니…. 대체 그건 뭐지….’

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 저주 때문에 하신후가 황제가 될 수 없었던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하을령은 별로 황위에 미련이 없어 보였다.

돌이켜볼수록 그저 몹시 슬퍼 보이는 여인이었다.

슬픔이 과하면 분노가 된다. 원한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적을 동정해서 대체 어쩌자는 건지…. 리경의 일이나 파헤쳐 봐야겠어.’

그러고 보니 하신후는 왜 하을령에게 그의 곁에 첩자로 의심되는 자가 있다는 말을 전하지 않았을까? 연으로서는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그 속내는 영 알 수가 없었다.

일단 가장 다행스러운 건 그들이 연의 존재를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연을 섬기는 자나, 용을 섬기는 자가 아닌 ‘월’을 섬기는 자들이라고 말하는 것만 보아도 그러했다. 연의 존재를 모르니 연을 섬기는 자들이라고 말하지도 않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하신후는 정말로 연을 평범한 첩자라 여기고 있는 걸까? 쉽게 회유하면 넘어올 줄 알고 지금까지처럼 행동한 것인가?

안도감이 느껴지는 동시에 약간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연은 복잡하게 뻗어 나가는 생각을 다잡으며 작은 날개를 열심히 파닥였다. 그러다 문득 저 아래서 사거리에 선 하신후가 걷던 방향을 바꾸는 것이 보였다.

저쪽으로 가는 것이라면, 적월루로 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연이 방에 잘 있는지 감시하기라도 하려는 걸까? 그렇다면 그야말로 할 일 없는 놈의 짓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연은 허겁지겁 자신도 방향을 돌렸다.

열심히 날아서 적월루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정신없이 날갯짓을 하다 보니, 적월루의 열린 창문이 보였다.

연은 바람을 타고 미끄러지듯 열린 창문 너머로 들어갔다.

“으앗!”

쿵-!

옷매무새가 엉망진창 흐트러진 채로 연이 바닥을 굴렀다. 너무 오랜만에 변신을 한 탓에 착지가 서툴렀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괜히 긴장해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방심한 하신후가 문만 감시한 덕분에, 창문은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다는 게 증명되었다. 그럼에도 연의 가슴은 괜한 긴장에 정신없이 쿵쿵대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긴장하다니. 별일도 아닌데 나답지 않게 겁을 냈군.”

연은 한껏 허세를 담아 휴, 한숨을 내쉬었다. 옷매무새를 어설피 가다듬어 보려 할 때였다. 하인 하나가 방문을 열었다.

“무슨 소리가 들려 와보았습니다.”

연을 감시하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넘어져서 그랬는데.”

어색하게 변명을 뱉고 나니 하인의 눈초리가 영 곱지 않았다.

연이 사인인 것을 알아챈 듯도 했다.

영롱한 붉은 빛의 눈동자 말고도, 사인들은 눈동자보다는 눈에 덜 띄는 몇 가지 특징을 더 갖고 있었다.

우선은 머리칼 색이었다. 저주흔 덕분에 얼룩지기는 했으나 연 역시 사인 특유의 검푸른 빛이 도는 흑발을 가장한 채였다.

그리고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도 사인의 특징이었다. 이것은 제국인 가운데도 피부가 유독 흰 자들이 있어 비교적 눈에 덜 띄는 특징이기도 했다.

사인의 붉은 눈동자는 사인만의 것이라, 용인 연이 변신술로도 따라하지 못하는 특징이었다. 검푸른 머리칼 역시 사인만의 것이었으나, 이것은 저주흔 때문에 색이 살짝 달라진 것이라 우길 수 있었다.

피부라면 연도 본래 흰 피부를 지녔으니 속일 필요조차 없었다.

따지고 보면 연의 살결이 흰 것은 당연하기 그지없었다. 새가 될 때도 흰 새가 되는 것이 가장 편하다.

연의 본모습은 백룡이기 때문이었다.

인간으로 변신했을 때의 그녀는 눈부신 진주빛 머리칼과 눈동자를 지닌다. 검고 긴 동공이 선명히 드러나는 진주빛 눈동자는 사인의 군주인 것을 증명하듯 엷은 붉은 빛을 띠어 더욱 아름다웠다.

솔직히 연은 지금까지 자신의 외모가 이 세상에서 제일 가는 아름다움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아 왔었다.

인간이 하등하다고 생각했던 것 역시, 그 까닭도 컸다.

물론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지만 말이다.

“그런데 올 줄 알았더니 왜 안 오는 거야? 괜히 급히 돌아왔네….”

하인이 떠나고 난 뒤, 혼자 남은 연은 허탈하게 투덜거렸다. 금방이라도 하신후가 나타날 것 같았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온 기미가 없어서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계속 그를 따라가 볼 걸 그랬다는 생각도 들었다. 리경을 미끼로 쓰고 있다고 했으니, 어쩌면 리경에게로 가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후회해도 때는 늦은 뒤였다.

하신후가 그의 기척을 감추고 움직이고 있으니, 육안으로 놓친 이상 그를 쫓을 길이 없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다가 올 기미가 영 없거든 다시 밖으로 나가 혼자 리경을 찾아보아야 할 것 같았다.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벽에 기대어 웅크려 앉았다. 처음에는 얌전히 앉아 있었으나 시간이 흐르니 자연스레 몸이 흘러내렸다.

잠시 후 그녀는 쌓인 피로에 녹아내리듯 잠이 들고 말았다.

연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진 뒤였다. 불이 켜지지 않은 방은 컴컴하기 그지없었다. 창문을 닫지 않아 냉기 섞인 바람이 흘러들고 있었다.

이렇게 오래 잠들어 버렸을 줄이야. 이래서야 사인을 지키는 자의 체면이 서질 않았다. 연은 붉어진 얼굴로 눈가를 문질렀다.

“피곤하다….”

바닥에서 불편한 자세로 탓에 온몸이 뻣뻣했다. 게다가 약간 배까지 고파 더 당황스러웠다. 하인을 불러 배가 고프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사방이 너무 컴컴하고 조용했다. 지금 시간에 배가 고프다 말하면 자다 깨서 밥을 청하는 것을 들킬 게 뻔했다.

그건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연은 고고한 용의 긍지를 지키기 위해, 입술을 꾹 깨물며 창가로 다가갔다. 거리가 대개 컴컴한 가운데, 멀리 밝은 불빛이 보였다. 어쩌면 ‘야시장’이란 곳일지도 몰랐다. 밤에도 열리는 시장이 있다고 들었다.

차라리 거기 가서 뭐라도 먹는 편이 나을 듯했다. 모습을 조금 바꿔 가면 사인인 것을 들키지도 않으리라.

곁에 누구도 없으니 사인이 아닌 모습으로 변신하기도 편했다. 연은 단숨에 새로 변해, 불 켜진 거리로 날아갔다. 그때까지도 연은 그곳에서 마주치게 될 불쾌한 상대를 전혀 예감하지 못한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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