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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10)화 (10/122)

10

연을 두고 적월루를 나서기 전, 하신후는 가볍게 손끝을 움직였다. 그것을 따라 그의 복장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본래도 화려한 구석 없이 평범한 복장이었으나, 이번에는 더욱 남루한 행색이었다. 삿갓과 낡은 도포가 영락없이 한량 같았다. 삿갓을 눌러써 얼굴을 가린 탓이기도 했다.

그가 향한 곳은 행색에 어울리는 허름한 주점이었다.

주점 안쪽 창가 자리에서 누군가 하신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다가가 앉자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왜 이렇게 늦었지?”

하신후와 마찬가지로 유독 새카만 빛깔에, 조금 곱슬거리는 머리칼을 갖고 있는 여인이었다. 서늘한 인상의 눈매도 비슷했다. 다만 눈빛은 여인 쪽이 보다 매서웠다.

“나는 시간이 많지 않아. 오라버니를 마냥 기다릴 만큼 한가하지 않다고.”

하신후가 나른하게 사과를 뱉었다.

“미안하구나. 일이 좀 있었다.”

“그 괴상한 삿갓은 또 뭐지? 어차피 술법을 쓰면 평범한 자는 우리 얼굴을 기억할 수 있을 리 없을 텐데.”

기억하지 못하고, 섣불리 다가오지 않는다. 그들의 힘으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점소이가 괜히 다가와 그들을 귀찮게 않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냥, 추위 때문에.”

대꾸하는 하신후의 표정이 묘하게 차가웠다. 하신후의 여동생, 황제 하을령의 표정 역시 뒤늦게 떨떠름해졌다.

하신후는 어릴 때부터 스스로의 뛰어난 생김새 덕분에 좋지 못한 일을 당했을 때가 많았다. 게다가 그 좋지 못한 일이란 대개 아비의 시기심으로 벌어진 것들이었다.

때문인지 이토록 긴 시간이 흐른 뒤에도 하신후는 종종 자기 외모를 감추고 싶은 듯 굴었다. 특히나 피로하여 지쳤을 때면 더 그렇게 소심하게 굴었다.

아무래도 ‘용의 책’ 일 때문에 그도 적잖이 신경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또 이리 묘하게 성질이 곤두선 것 같았다.

이백 년 전쟁의 주역이었던 사인의 군주, 신룡 ‘월’은 이제 죽고 이 세상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피로 쓰인 용의 책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용의 피는 사람과 요마의 혼을 조종한다. 조종할 뿐만 아니라 부수고 멸한다. 요마 떼와 싸울 때 리경이 보여준 것은 분명 그러한 책의 힘이었다.

하을령은 얼굴을 찌푸리며 말을 돌리듯 물었다.

“그래서 그 빌어먹을 책을 지닌 사인은 지금 어디 있지? 내게도 보여주려 하는 줄 알았는데.”

하신후의 기다란 손가락이 톡톡, 상을 두들겼다.

“생각과는 조금 다르더군. 그 리경이라는 자는 그 책을 완벽히 쓸 줄 몰라. 그가 그 책의 진짜 주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하지만 오빠 말로는 그 책이 리경이란 사인을 지키려 했다고 했잖아.”

요마와 싸우는 가운데 리경이 주문을 외우자 책이 그를 지키려 했다 들었다.

하신후가 직접 한 말이었다.

“용의 피는 스스로 선택한 자만을 지킬 텐데. 우리가 아직도 잘못 알고 있는 게 있단 말인가?”

하을령의 초조한 중얼거림에 분노가 묻어났다. 하신후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며 피곤한 듯한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아니,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없어. 리경은 그 책의 주인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동생의 사나운 표정에 하신후가 상의 컵을 들어 물 한 모금을 마셨다. 그는 입을 적신 뒤 나른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 책의 온전한 주인은 리경이 아니야. 그와 함께 기루에서 자라난 여자애라더군. 그 어미는 죽은 ‘월’을 섬기는 남방의 신녀였지만 책을 갖고 달아나 숨어 지내다가 기루에 발을 들였다. 어미가 아이를 낳아 아이에게 책을 물려주었고, 그 애는-.”

“그 애가 자라나 리경에게 책을 준 건가? 그렇다면 리경은 그녀의 정인이었을지도 몰라.”

하을령의 성미 급한 질문에 하신후가 눈썹을 찌푸렸다.

“궁금하면 내 말을 끊지 마.”

그의 찌푸린 얼굴에 하을령도 덩달아 얼굴을 구겼다. 그녀가 입을 다물자 하신후가 중얼거렸다.

“영민한 네가 왜 굳이 그 책을 ‘준 것’이라고 믿는지 모르겠구나. 정인이라니. 너는 여인과 사내가 한 데 얽힌 일엔 늘 너무 생각이 물러져.”

하을령의 유일한 약점이라면, 남들의 사랑 타령에 너무 쉽게 귀 기울인다는 것 정도이리라.

하신후의 눈빛에 그런 조소가 담겨 있었다.

하을령이 반박하려는 듯 움찔했으나 하신후가 먼저였다. 그는 차갑게 말을 이었다.

“리경은 본디 기루에서 자라났으나 책을 지닌 여자애가 죽은 뒤 기루를 떠났다. 그리고 그 책은 이제 그의 손에 있지.”

“그럼 오빠 말은….”

“리경은 그 책이 귀한 것임을 알고 그 여자애를 죽여 빼앗은 것이다. 하여 책의 온전한 주인이 되지 못한 거야.”

리경은 살인자다. 어린 나이에, 원하는 것을 취하려 같이 자란 여인을 죽인 비루한 자다.

하신후는 그렇게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니 리경은 ‘월’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머저리일 뿐이지.”

‘월’이라는 이름을 뱉는 순간 하신후의 눈빛이 더없이 냉막해졌다.

이토록 긴 시간을 들여 그 이름의 뒤를 쫓게 될 줄이야.

월.

그자는 그들의 손으로 직접 죽여 없앤 ‘신룡’이었다.

월은 전쟁 가운데 인간의 모습을 하고 그들과 대적했으나, 마지막 순간 잠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었다. 어둠으로 그린 듯 위압감을 지닌 흑룡의 몸뚱이였다.

그는 하신후가 본 가운데 유일한 진짜 괴물이었다.

그만큼 강했고, 탐욕스러웠다.

아직도 이 제국은 월이 되살아나기를 소망하는 사인들로 넘쳐났다.

하신후의 냉막한 표정에 드러난 어두운 기운 때문이었을까. 그 순간 그들이 앉아 있던 창가에서 새 몇 마리가 날아올랐다.

하신후의 눈길이 퍼뜩 새들을 향했다. 새들 가운데 유독 아름다운 빛깔을 띤 새 한 마리가 있는 듯하여, 그는 무심코 눈을 찌푸리고 멀어지는 새들을 노려보았다.

그는 매서운 하을령의 물음이 들려온 뒤에야 다시 그녀를 돌아보았다.“리경이 월의 피로 쓴 책을 그저 가로챘을 뿐이라면, 우리가 리경의 뒤를 캐어도 아무 소용없을 거란 뜻인가?”

하을령의 얼굴에 노골적인 실망감이 번졌다. 그러나 하신후는 차분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직 다른 쓸모가 있다. 지금 이 도시에는 리경 말고도 월의 피로 위험한 짓을 벌이는 자들이 있으니.”

“…….”

“토착신 정원의 사제라며 모인 자들 가운데 제사장 은곡이라는 자가 있지. 그가 역도들과 결탁했다는 증거가 있어.”

‘역도’란 월의 귀환을 꿈꾸는 자들을 뜻했다. 국경 바깥 ‘버려진 땅’의 사인들과, 제국에서 그들을 돕는 자들 모두가 역도였다.

역도라는 말에 하을령의 표정이 굳었다.

“그런데 왜 바로 잡아들이지 않는 거지?”

하신후의 입가에 처음으로 옅은 냉소가 번졌다.

“지금쯤이면 리경이 ‘용의 책’을 지녔다는 것을 은곡도 알아챘을 테지. 나는 그의 입을 빌려 배후의 좀 더 중한 자들을 잡아들이고 싶거든.”

제사장 은곡은 죽은 월을 따르는 자였다.

그런 그라면 월의 피로 쓰인 책의 존재 역시 남들보다 민감하게 알아챌 터였다. 은곡은 하찮은 앞잡이였으나, 그 뒤에 있는 자들은 그보다 중요했다.

하을령의 표정이 비로소 흡족해졌다.

“…그럼 리경은 미끼로군. 은곡도 미끼야. 하지만 누군가 반드시 걸려들 거란 보장도 없는데. 언제까지고 막연히 시간을 끌 순 없잖아. 은곡이 역도라면 분명 이 도시에 월의 피로 수작을 부렸을 텐데.”

하신후의 무료한 듯 는적는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막연히 기다린다니, 나를 너무 한가한 사람으로 여기는 거 아닌가. 기다리는 건 축제가 끝날 때까지다. 마지막 날, 은곡과 그가 거느린 자들을 잡아들일 거야. 여기 백성 가운데엔 이미 월의 피에 중독된 자들이 많아. 그것까지 해결하려면 꽤 피곤하겠지.”

피곤하다고 투덜거리기는 해도 틀림없이 이미 방도를 마련해두었을 것이다.

하신후는 따분해 보이는 표정과 달리 소름 끼칠 정도로 계략이 뛰어났다. 혈육이 아니었다면 조금 더 좋게 평가해줄 만도 했겠지만, 오라버니를 마냥 찬미해줄 여동생이 어디 있겠는가.

하을령 역시 마찬가지였다.

중요한 이야기는 거의 마친 듯하여, 그녀는 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피곤한 일이라. 그래서 오늘 그렇게 궁상스러운 꼴인 거야? 오늘따라 평소엔 그럭저럭 봐줄 만하던 얼굴까지 더 궁상맞아 보이는데.”

“궁상이라니….”

하신후가 두 눈을 떨떠름하게 찌푸렸다. 그러더니 무언가가 떠오른 듯 갑자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뜬금없었지만 어쩐지 회심한 듯한 미소라서, 하을령은 멈칫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뭐지? 혼자 웃다니…. 오빠, 미친 거야?”

“네 말투가 험하기 그지없구나. 너는 내게 궁상맞다 하지만, 내게 수려하다 하는 이들도 있어.”

“오늘따라 정말로 좀 미친 것 같은데.”

“너는 오늘따라 더욱 말씨가 험한걸.”

나긋나긋하게 중얼거리는 오빠가 영 못마땅했던 하을령은 질세라 이죽거렸다.

“오빠가 이 공기 좋은 변방에서 미끼 놀이를 하고 있을 때, 나는 숨이 턱턱 막히는 황궁에 틀어박혀 고생하니 그렇지. 오빠도 험한 말씨를 배우고 싶다면 나 대신 옥좌에 앉아 봐.”

“네 말씨가 정말로 옥좌 때문일까. 넘긴다면 사양하지는 않으마.”

하신후의 농담 같은 중얼거림에 하을령 역시 농을 치듯 답했다.

“내가 넘기면, 오빠 목숨이 붙어 있을 자신은 있고? 우선은 월이 남긴 용의 저주부터 풀어야 할 텐데. 기껏 나타난 용의 책 주인마저 허탕이었으니 이번에도 오빠에게 옥좌는 요원해졌군.”

남매가 늘 주고받는 농이었다.

흑룡 월은 죽기 전, 마지막 힘을 짜내어 자신을 죽인 남매에게 저주를 걸었다.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은 절대로 손에 넣지 못하는 저주였다.

저주를 받은 순간, 하을령은 그녀의 정인 권윤을 잃었다.

그녀의 가장 간절한 소망은 그와 함께 사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신후는, 옥좌를 잃었다.

그가 지닌 유일한 소망은 황제의 자리에 앉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월은 죽었으나 저주는 남았다.

권윤이 죽는 순간, 그들은 그의 곁에 있었다. 바로 곁에 서 있던 존재의 숨이 순식간에 꺼져버리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지금도 숨이 사그라지던 권윤의 마지막 얼굴은 하을령과 하신후를 저주처럼 사로잡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이 제국을 지키며 치른 대가였다.

이 제국에 남은 월의 흔적을 모조리 없애면, 그때 비로소 저주가 걷힐 것이다. 그들은 그 믿음에 희망을 걸고 있었다.

희망이라니, 착잡한 소리였다. 하을령은 습관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해야 할 말은 다 나누었으니 이만 떠날 때가 된 것 같았다.

황궁에서는 황궁대로 그녀를 기다리는 골치 아픈 일들이 있었다. 하을령은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그만 가보겠어. 여기 일은 오빠에게 맡기지. 하지만 내 눈을 속이고 뭔가 하려고 하지는 마. 나는 오빠와 다르니까.”

하신후가 무표정하게 손끝을 까딱였다. 알겠으니 가보란 뜻이었다.

떠나려던 하을령은 문득 마지막으로 비웃음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괴상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떠올라서였다.

“그러고 보니 한 가지, 우스운 얘길 들은 걸 깜빡했군. 오빠 요즘 사인 계집들과 더없이 가깝게 지낸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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