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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8)화 (8/122)

8

쿠웅-!

커다란 소리에 연과 유백의 시선이 동시에 행렬을 향했다.

북소리가 이상해진 것은, 걸어 나오던 악대 앞으로 한 여인이 돌연 뛰어나온 까닭이었다. 여인은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있었고, 머리칼은 마구 풀어헤친 채였다. 남루한 행색과 더러운 얼굴은 화려한 행렬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여인은 행렬의 선두에 선 악대 앞을 막고서 낄낄 웃음을 터뜨렸다. 그 자리의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크고 악에 받친 소리였다.

“이것이 우릴 지켜준다던 토착신 정원의 축제냐? 이 광인의 축제가? 너희의 꽃을 받은 우리가 어찌 되었는지 봐라! 내 아들은 죽었어! 내 아들이 죽었단 말이다!”

그제야 여인의 품에 안긴 것이 보였다. 닳아 너덜거리는 옷자락에 가렸으나, 품에 안긴 것은 아기 강보였다.

“…설마.”

연은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죽은 아기를 안고 있는 건가?”

그녀의 물음에 유백이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놀라운 것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제 복색을 한 사내 몇이 거대한 요수가 끄는 수레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남루한 여인에게 달려가 얼른 그녀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여인은 저항하며 찢어지듯 비통한 소리로 외쳤다.

“정원의 사제들을 믿지 말아야 해!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 이들에게 속고 있어! 속고 있단 말이야!”

여인의 간절한 외침에도 사람들은 누구 하나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사제들이 그녀를 끌어내는 것을 웅성거리며 지켜보기만 할 따름이었다.

연은 유백을 돌아보았다.

“저 여인을 데려와 마, 말을 들어봐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게 워, 원정대에게 맡겨진 본래 이, 일이니….”

북왕 하신후를 섬기게 된 신입 주술사들은 국경 근처를 순회하며 치안을 살펴야 한다. 그 원정을 책임지고 이끄는 것이 유백과 그 휘하의 무사들이었다.

하니 저런 여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 역시 그들이 본래 맡아야 할 일일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유백의 차가운 명령이었다.

“나서지 마라.”

“하지만-.”

연은 항의하려다 말고 멈칫했다. 이상한 기미가 느껴져서였다. 여인이 끌려나간 뒤 사제들은 다시 수레에 올랐다. 처음부터 수레에서 한 번도 내린 적 없던 가면 쓴 사내가 앞으로 나선 것은 그때였다.

커다란 수레 가운데 앉아 있던 사내는, 몸을 일으켜 군중을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두 팔을 펼쳐 하늘로 들어 올렸다.

허공에서 돌연 희고도 푸른 꽃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찬란하고 화사한 꽃들이었다.

“우와아-!”

“와아아아!”

인형들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군중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환호했다. 사람들이 손을 뻗어 꽃을 품에 안았다. 주위에 온통 향긋한 내음이 가득했다.

그러나 어쩐지 기분 나쁜 향기로움이었다.

사람들은 조금 전 여인 따위는 이미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아니, 처음부터 여인이 나타나 소란을 피웠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듯했다.

“…이게 대체….”

그 누구도 여인의 사연에 반응하지 않다니.

멀쩡하게 조금 전 소란을 기억하는 자라고는 연과 유백 정도가 전부인 듯했다. 나머지는 하나같이 흐리멍덩한 눈으로 꽃을 보고 웃어대고만 있었다.

소름 끼치는 웃음들이었다.

“이, 이것이 저희가 이 도시에 머무는 이유입니까.”

연은 속삭이듯 작게 물었다. 주위의 듣는 귀 가운데, 누가 그들의 말을 훔쳐 들을지 몰라서였다. 조금 전까지는 무슨 말을 하든 그리 무섭지 않았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이상했다.

이곳 사람들은 무언가에 취해 있었다.

유백은 당혹한 연을 내려다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다른 명이 있기 전까지 따로 네가 해야 할 일은 없다.”

굳이 ‘네가 해야 할 일’이라 말하는 것이 어쩐지 이상했다. 연은 슬쩍 찡그리며 물었다.

“따로 제, 제 일이 없는 것이라면… 다른 무, 무사들은요?”

“네가 알 필요 없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리경도, 다른 주술사들도, 무사들도 어제부터 보이질 않았다. 그제야 계속 연과 다홍에게만 이리 자유 시간이 오래 주어진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리경은 어디에 있는 거지?

그저 사내라서 따로 방을 쓰는 바람에, 그래서 같이 있질 못하고 엇갈리는 거라 생각했었는데.

연이 멍하니 생각을 가다듬는 사이 유백은 그녀를 두고 등을 돌렸다.

“괜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네 객실로 돌아가 있거라. 이것이야말로 네가 따를 명령이다.”

차갑게 말하고서 그는 그대로 멀어지려는 듯 걸음을 뗐다. 그 순간 연을 덮친 것은, 유백 따위에게 명령을 들었다는 불쾌감보다 더욱 큰 의심이었다.

연은 불쑥 손을 뻗어 빠르게 멀어지려는 유백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하, 하면…. 리경이 어,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자신을 붙잡다니.

유백은 불쾌한 눈빛으로 연을 돌아보았다.

“너는 상관을 대하는 예의부터 다시 익혀야 할 것 같구나. 사인이라서 그런 건가?”

그의 말에 연의 눈빛이 서늘히 가라앉았다.

괜한 빈정거림에 일일이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으나,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

“세 사람의 사인 가운데 리경만 보이질 않습니다. 하여 여쭤본 것입니다. 저를 객실로 보내는 것이 정녕 제가 사인이라서 괜한 소란에 휘말릴까 염려하셨기 때문이라면, 리경 역시 그리하셔야죠.”

화가 난 나머지 말을 더듬지조차 않게 되었다.

저주흔으로 색이 탁해진 연의 눈동자에 서늘한 분노가 스몄다.

“아니면 일부러 리경만 밖에 두시는 것입니까?”

추측과 감이 뒤섞여, 연에게 날카롭게 경고하고 있었다. 북왕 하신후는 리경의 책을 두고 ‘용의 책’이라 말했었다.

용의 책을 지닌 사인에게만 따로 시킬 일이 있기라도 한 걸까.

올바른 일이라면 이리 비밀처럼 굴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제게 객실로 돌아가라 명령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리경이 홀로 밖에 있어야 하는 까닭과 맥락을 같이 하는 명인지요.”

유백의 옷자락을 움켜쥔 연의 손에 힘이 실렸다. 유백 역시 그 사실을 느끼고 얼굴을 굳혔다.

“…감히….”

유백의 낮은 뇌까림과 함께 연의 손목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는 그대로 잠시 부러뜨릴 듯 손목을 세게 쥐고 있다가 팽개쳤다.

“네게 내릴 명은 이미-.”

꽤나 거칠게 손이 팽개쳐진 탓에 뒷걸음질 치던 연의 등이 뒤쪽 누군가에게 부딪혔다. 동시에 유백의 뇌까림이 멈췄다.

“-!”

부딪힌 자에게 사과하려 고개를 돌린 연은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와 부딪힌 상대는 다름 아닌 하신후였다. 그는 불쾌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길이 향해 있는 상대는 연이 아니었다.

유백은 하신후에게 황급히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려 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건조한 목소리였다.

“필요 없다.”

하신후는 냉랭한 얼굴로 연의 어깨 양쪽에 두 손을 얹었다. 뒤에서 그녀를 감싼 듯한 자세였다.

“가 봐.”

하신후의 명에 유백은 주춤하면서도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그는 곧 인파 사이로 빠르게 모습을 감추었다. 연은 하신후와 둘만 남겨져 버렸다.

이제 와 뒤를 돌아서 인사를 하기에는 좀 늦은 것 같았다. 게다가 하신후는 여전히 연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싼 채였다.

그는 그대로 연을 천천히 돌려세웠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그녀와 눈을 마주쳐왔다.

“어째서 또 저자에 나왔지?”

마치 어제 그녀와 다홍이 당한 냉대를 알고 있는 듯한 투였다.

“…나오지 마, 말아야 한다는 명은 듣지 못했는데요.”

“여긴 너희에게 친절한 거리가 아니다. 게다가 위험하지. 조금 전에 보았을 텐데.”

“그, 그래서 여기 머무는 것입니까?”

연의 물음에 하신후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 바람에 그와 그녀의 거리가 더욱 좁혀졌다.

“아직은 비밀로 두려 했는데. 이유가 듣고 싶으냐?”

그는 나직하게 웃음기를 섞어 말하고 있었다. 미소를 띤 수려한 얼굴은 심사가 뒤틀린 악인 같기도 하고 마냥 유순한 사내 같기도 했다.

종잡을 수 없는 자였다.

“듣고 싶다면 나와 가자. 어제 그곳으로 갈 것이다. 나는 거기서 지내거든.”

왜 또 자신을 끌고 가려는 것인지 물을까 하다가, 연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따라가면 리경이 어디 있는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아직 변변찮은 일을 해내지 못하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연은 군주였다. 그녀가 여기 온 것은 제국인들에게 차별당하고 학대받는 사인을 구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러니 연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자들부터 살펴야 마땅했다. 리경이 바로 그런 존재였다.

연은 쭈뼛거리며 하신후의 뒤를 따랐다.

행렬을 구경하려 밀려든 인파가 많아 앞으로 나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연은 이토록 사람이 몰려든 곳에 와본 적이 많지 않았다. 알에서 깨어난 뒤, 사람 모습을 갖추게 되자마자 신전에서만 지냈던 그녀였다.

온갖 소음과 부딪혀대는 사람들 덕분에 정신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아직 낫지 않은 등의 상처도 욱신거렸다.

다행히 하신후는 보폭이 작고 걸음이 느려 따라잡기 쉬웠다. 연은 초조하게 인파를 헤쳤다.

어느 순간 하신후는 약간 뒤처지는 연을 기다리듯 걸음을 멈췄다. 그러다 자신이 먼저 다가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부상자에게 늘 친절한 편이지.”

그는 미소와 함께 어리둥절해져 있는 연의 손을 가벼이 쥐었다. 가벼운 손길 같았는데, 걷기에 훨씬 수월했다.

한데 하신후가 자신이 부상을 입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을 줄이야.

고작 그런 요마에게 당하는 자로 기억되다니.

연은 슬그머니 자존심이 구겨져 미간을 찌푸렸다. 적에게 손을 붙잡힌 채 끌려가듯 걷다니, 이런 것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그러던 차에 문득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어.”

무심코 주위를 돌아보자 역시나 ‘축제 사탕’이라던 색색의 과자를 팔고 있었다. 주위에 비슷한 행상이 많았다. 어제의 그 가게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번에는 저 과자를 쉽게 사 먹을 수 있을까. 어제의 가게 주인과는 달리, 사인인 연에게도 과자를 팔아줄까.

물론 연은 다홍과 달리 눈 색깔이 저주흔 덕에 검었다. 그러나 저주흔도 영 꺼림칙한 눈길을 받긴 마찬가지였다.

연의 걸음이 조금 느려지자 앞서 걷던 하신후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는 재밌다는 듯 작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너는 정말이지 먹는 걸 좋아하는 것 같군. 볼수록 죽은 내 뱀과 닮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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