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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요마 떼를 없애주었으니 마을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을 리 없었다.
비록 잠들어 있었다고는 하나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요마는 마을의 독이었다. 비록 원정대로서는 귀찮고 위험한 노동이었지만, 주민들은 그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북왕 하신후 전하께 영원한 제국 원신의 축복이 따를 것입니다!”
장로가 엎드려 절을 올리며 그들을 배웅했다.
유백은 떨떠름하게 등을 돌렸다. 정작 인사를 받아야 할 북왕은 그의 곁에 없는 채였다.
틀림없이 왕께서 직접 잠들어 있던 요마 떼를 깨운 것이리라.
숲에서 요마를 멸한 것 역시 북왕 본인이셨다.
그러나 북왕은 리경이라고 하는 사인을 시켜 짧은 서한만을 남긴 채 또다시 사라졌다.
[서북 삼진으로 방향을 돌려라. 적월루에서 기다리겠다.]
서한의 내용은 그것이 다였다.
적월루라는 곳이 어딘지는 모르나, 이름으로 미루어 기루가 딸린 객점쯤 되는 듯했다.
서북 삼진(三鎭)은 경계 지역에 위치한 것치고는 큰 도읍이었다. 하나 그래봤자 시골일 땅에, 북왕께서 직접 걸음 하실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가 제국 전역을 ‘수호’하는 강력한 힘을 지닌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럼에도 이곳은 그의 영지가 아니었다. 하신후가 직접 나서지 않더라도 삼진을 책임질 태수는 따로 있었다. 려 씨 가문의 어린 귀족이 분명 태수가 되었다고 들었거늘, 어찌 된 일일까.
어리다 하여도 태수가 된 자 역시 상등(上等) 귀족이다. 마땅히 영지를 다스릴 힘은 지니고 있을 터였다.
상등 귀족은 강한 힘을 타고나 불로불사 하며 제국을 지킨다. 그들은 요마와 요기에 점령당한 척박한 땅으로부터 제국을 일궈낸 이들이었다. 특히나 황제인 하을령과 북왕 하신후의 힘은 강력하여 제국 전역에 요기를 억누르는 수호 결계를 드리우고 있었다.
선황이었던 지온벽을 비롯한 황가 전원이 전쟁 중에 죽어 옥좌가 비었을 때, 황실의 수호 결계를 계승한 것이 하 씨 남매였다. 하여 하을령은 황제가 되었고 하신후는 북왕이라 불리며 하 씨 가문의 북단 영지와 황궁이 위치한 수도 전역의 방비를 책임지게 되었다. 거기까지가 알려진 이야기였다.
어째서 제국 북쪽 끝 출신의 귀족이 심장부의 옥좌를 거머쥐게 된 것인지, 그 비밀을 온전히 아는 것은 이제 하신후와 하을령 둘뿐이었다. 분명한 것은 하 씨 황가의 수호 결계가 지 씨 황가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하여, 더는 누구도 옛일을 의심스럽게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한데 왜일까. 제국의 수도도, 하 가의 북단 영지도 아닌 이 남루한 땅에 하신후가 직접 관심을 갖는다는 점이 이상했다. 정체 모를 불안이 느껴질 정도였다.
유백은 말에 오르면서도 떨떠름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건지 모르겠군…. 늘 그렇기는 하지만.”
유백이 말을 출발시키자 그의 뒤에 서 있던 원정대가 그를 따랐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삼진이 그리 멀지 않은 고장이라는 것 하나뿐이었다.
* * *
“예쁘다…!”
연은 등의 통증도 잊고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그동안 시골 마을들만 돌아다닌 덕분에 이런 도시는 처음이었다.
축제가 막 시작되었다더니 도시는 정말 화려했다. ‘용의 산’의 풍경과는 달랐다. 검은 기와로 된 성문으로 들어서자 노랗고 둥근 열매가 잔뜩 달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길에는 납작한 돌들이 평평하게 깔려 있었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이전 마을들보다 좋아 보였다.
주위를 둘러보는 연을 보고 리경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남쪽 출신이라 서북은 처음이에요. 진이라서 그런지 성벽도 엄청 튼튼해 보이네요. 요괴가 들어오기 힘들 거 같아요. 성문에 새겨진 주문이나 사람들 차림새도 남쪽과는 좀 다르고요. 제국이 광활하기는 한가 봐요.”
연의 눈에는 그저 좋아 보이기만 하는 도시가 리경에게는 다르게 비치는 모양이었다. 연은 리경에게 아직도 하신후가 말했던 ‘용의 책’에 대해 묻지 못한 채였다. 처음에는 그냥 바로 물어볼까 했지만,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그날 전투를 마치고 돌아온 리경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물어도 답해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연이 아무리 신전에서만 살아 세상 경험이 부족하다 해도 그 정도 감은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연의 감은 인간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해야 했다.
그 뛰어난 감에 따르면, 이 서북 삼진에는 전에 거쳤던 다른 어떤 마을보다도 풍족한 먹거리가 존재했다.
말로만 듣던 그 ‘축제’라는 것 덕분인가. 도시 전체에서 달콤한 과실과 독특한 특산물들 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여기 얼마나 머물지는 모르겠으나, 머무는 동안은 우선 자유 시간이라 했다. 다시 말해 연이 얼마든지 맛난 걸 찾아다닐 시간이 있단 뜻이었다.
“리경은 또 어딜 간 거지?”
객점에 짐을 풀고 나서 살피니 리경이 보이질 않았다. 슬그머니 사내들 방 쪽을 살피던 연이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여인과 사내가 방을 따로 쓰니 리경을 챙기기가 쉽지 않았다. 여인과 사내로 나눠, 저마다 둘씩 짝지어 방에 묵게 된 참이었다. 여인은 3층, 사내는 2층의 객실을 배정받았다. 연의 짝은 당연히 다홍이었다. 그러나 사인과 방을 쓰겠다는 사내가 아무도 없어 리경은 혼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도 그래왔으니 딱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함께 저자를 구경하자고 권하려 했더니 리경이 없을 줄이야.
연은 슬그머니 눈을 찡그렸다.
애초에 이 도읍은 본래 정해진 여정의 거점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신후가 나타난 뒤 돌연 행로가 바뀐 것이다. 게다가 하신후는 리경의 ‘용의 책’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가.
“…설마 또 그 자에게 불려간 건가?”
추측과 감을 더해 생각해보자면,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하신후가 굳이 원정대를 이곳으로 오게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용의 책’과 무언가 관련이 있는 걸까.
그렇다면 지금 리경과 하신후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 그들의 대화를 염탐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미리 염탐할 필요 뭐 있겠는가. 나중에 리경에게 비밀을 알아낼 길은 얼마든지 있었다. 지금은 우선 저자에 가보고 싶었다.
저자라니!
잠입 전 이름만 들어봤을 뿐 한 번도 가본 적 없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온갖 물건을 파는 거리라고 했다. 용의 산 마을에도 비슷한 거리가 있기는 했으나 연은 그곳을 제대로 거닐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제국에 와서야 비로소 그 ‘저자’를 제대로 구경하게 된 것이다.
연은 다홍과 함께 객점 1층으로 내려가면서도 설렘을 감출 수 없었다.
“뭐가 그렇게 즐겁니? 등도 아플 텐데 좀 쉬지.”
“아냐. 그러다가 갑자기 여길 떠나자고 하면 어떡해. 갈 수 있을 때 꼭 가보고 싶어.”
연이 간절하게 중얼거리자 다홍이 이상하다는 듯 보다가 픽 헛웃음 지었다.
“넌 가끔 참 이상하다니까.”
다음 순간, 다홍의 얼굴에서 문득 웃음기가 가셨다. 대신 다홍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보고 있던 연이 놀라 멈칫했다.
“어딜 가는 거냐.”
막 객점 안으로 들어선 이는 유백이었다. 유백 뒤에 서 있는 것은 리경이었다. 연과 눈이 마주치자 리경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자, 자유 시간이라고… 하, 하셔서요.”
존대를 하려니 어김없이 말이 더듬어져 나왔다. 연은 찌푸려지려는 얼굴을 간신히 태연하게 유지하며 답했다. 연이 말을 높일 때면 더듬고 만다는 것은 다홍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얼른 말을 거들었다.
“달리 시키실 일이 없다면 저자에 가보려 합니다. 서북이 처음이라 신기해서요.”
유백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들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섰다.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된다.”
리경이 쭈뼛거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슬쩍 그들을 돌아본 리경은 입 모양으로만 소리 없이 말을 건네왔다.
‘나중에 이야기할게요’
그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 유백을 따라 계단 쪽으로 사라졌다. 다홍이 중얼거렸다.
“리경이 왜 저 사람과 있는 거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이는데.”
연의 생각도 같았다. 혹시 다홍이라면 리경의 그 서책을 본 적 있을지도 모른다. 연이 리경의 서책을 본 것은 숲에서가 처음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연은 다홍에게 책에 대해 물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객점 뜰로 나오자마자 또 다른 아는 사내가 나타난 까닭이었다. 하신후였다.
그가 조금 떨어진 채였는데도 연은 곧바로 예의 좋은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저절로 눈이 감길 만큼 기분 좋은 향기였다. 그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 다시 아쉬워졌다.
“어….”
연이 너무 얼빠진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던 것일까. 어느새 가까워진 그가 묘한 눈빛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인사는?”
물음은 정확히 연을 향해 있었다.
옆을 돌아보니 다홍은 어느새 예를 갖춰 머리를 조아린 채였다. 연은 자신도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대로 그들을 지나쳐 가면 좋으련만. 하신후는 두 사람 앞에 잠시 멈춰 섰다.
“…너는 사인인데 눈이 어둡구나.”
이번에도 연을 향한 말인 듯했다. 인사 한번 늦은 것을 가지고 굉장한 핀잔이었다. 연은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다시 그를 보며 변명했다.
“누, 눈은 잘 보이는데 딴 생각을 하느라….”
“그 뜻이 아닌데.”
“하, 하면-.”
뒤늦게 눈동자 색깔 이야기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한 번에 알아들을 법한 말이었는데, 이렇게 그와 가까이에 서 있자 향기 때문에 자꾸 생각이 흐려졌다. 연은 저도 모르게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답했다.
“저, 저주흔 때문에….”
하신후가 서늘하게 헛웃음을 지었다.
“말을 더듬는 것은 그렇다 치고. 하던 말을 맺을 줄 모르나?”
물음이 아니라 핀잔인 것이 틀림없었다. 정말이지 예의에 굉장한 집착을 보이는 사내였다. 제국의 귀족은 본래 모두 이런 것인가?
존대를 쓰는 것으로 모자라, 존댓말을 맺기까지 하는 건 더욱 거슬리는 일이었다. 용인 자신이 인간에게 존대 어미라니. 차라리 혀를 깨물어버리고 싶은 마음까지 치밀었다.
그러나 연은 임무를 위해 치미는 짜증을 태연히 숨겼다.
“아, 아닙니다. 저, 저주 때문에 이리 되, 된 것입니다.”
“말을 맺을 줄 모르는 것도 저주 때문이라고?”
“네? 아, 아니오. 그게 아니라 누, 눈이….”
이번에는 존대 때문이 아니라 그의 표정 때문에 말을 흐리고 말았다. 하신후는 어느새 재밌다는 듯 웃고 있었다. 연을 비웃는 것이 분명했다.
대답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그냥 자기 재밌으려고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에게 말을 높여 답하는 게 얼마나 고역인 줄 꿈에도 모른 채 말이다.
연은 그의 수려한 얼굴과 거기 드리워진 미소를 황망하게 올려다보았다. 비웃음을 사다니? 그의 비소는 유백의 부하들이 던지던 질 낮은 모욕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다.
“가 보거라.”
간신히 분을 삭이고 있자 드디어 그가 그녀를 지나쳐 갔다. 연은 그제야 얼굴을 구기며 그의 뒷모습을 쏘아보았다.
“연아, 표정 풀어. 너 대체 뭘 믿고 그렇게 겁이 없니? 미친 거야?”
다홍의 기가 차다는 듯한 목소리가 날아든 것은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