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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용의 채, 책이라니요?”
연은 저도 모르게 사내를 노려보며 묻고 말았다. 노려보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인간에게 존대를 쓰다니.
제국에 숨어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익힌 일이기는 했으나, 아직도 쉽지 않았다. 존대를 할 때면 연은 말을 더듬고 눈빛이 사나워지고 말았다.
사내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연을 이상한 눈빛으로 마주했다. 연의 태도가 예상 밖이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의아한 듯 그녀를 바라보던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되돌아왔다. 그가 부드러운 음색으로 나직이 물었다.
“허락하기 전엔 내게 말을 걸어선 안 될 텐데?”
물음인 척하고 있으나 딱히 궁금해서 묻는 것은 아닌 듯했다. 연이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사내의 미소가 천천히 서늘해졌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가?”
“아, 알고 있습니다.”
연은 뒤늦게 머리를 조아렸다.
허락 없이는 평범한 자들이 먼저 말을 건넬 수조차 없는 존재. 그런 예법이 아예 제국의 법처럼 굳어져 있는 자들이라면, 황족뿐이었다.
황족이라면 어차피 제국에 단둘뿐이다.
황제 하을령과 그 오빠인 하신후.
연도 잠입 전 하신후의 얼굴을 초상화로 본 적은 있으나, 실물은 초상화와 전혀 달랐다. 하여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대체 이런 얼굴을 그따위로 그려놓은 화공은 누구란 말인가. 화공 자격을 잃어 마땅한 자였다.
자신의 적이 이렇게 잘생긴 사내라고 왜 누구도 미리 언질을 주지 않았단 말인가?
용인 연은 온갖 감각이 둔하기 짝이 없는 인간과 달리, 후각도 시각도 민감했다. 정확히는 온갖 본능이 곤두서 있었다. 하여 이런 미남을 보면 저절로 저 얼굴에 자꾸만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용의 본성은 본래 아름다운 것을 탐하는 법이다.
고개를 조아린 연은 괜히 짜증이 치밀어 입술을 깨물었다. 계획대로라면 연은 언젠가 하신후를 멸해야 한다. 그런데 저런 사내를 어찌 그냥 죽인단 말인가? 신경질 날 정도로 손해 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신후는 리경에게로 향하던 걸음을 멈춘 채, 고개 숙인 연을 바라보았다. 이 원정에 들 만한 주술사라면 당연히 자신이 누군지 정도는 한눈에 알아보아 마땅하다.
볼수록 태도가 묘한 여인이었다.
게다가 이제 보니 연의 등에는 피가 번져 있기까지 했다.
하신후가 슬그머니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열려 하는 순간이었다.
그르르르르륵-.
점액을 흘리며 요마 두 마리가 앞뒤에서 그들을 포위했다. 하신후는 고개를 돌려 요마를 돌아보았다.
이제 이 전투를 마무리할 때가 된 듯했다. ‘용의 책’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사인이 있다는 것 역시 확인했고, 부하들에게 적당한 벌도 내렸으니 말이다.
하신후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번진 순간이었다.
연은 조아렸던 고개를 멈칫 들어 올려, 눈앞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연의 색이 탁한 눈에 경악이 번졌다.
하신후의 기운이 돌연 전혀 달라진 까닭이었다.
순간적으로 하신후에게서 강렬한 기운이 돌출했다. 다음 순간, 후드득 소리를 내며 밤하늘에서 무언가가 비처럼 떨어졌다.
비라기엔 너무 덩어리가 진 무언가가.
“요, 요마들이-!”
조금 떨어져 서 있던 리경이 경악하여 중얼거렸다. 그들이 지금까지 고군분투하며 상대하던 요마들이, 하신후의 힘으로 순간 모조리 도륙된 것이다.
점액과 피, 요마의 살점들이 무사와 주술사들을 희롱하듯 덩어리져 낙하했다. 그 와중에도 하신후의 흰 옷자락에는 한 점 얼룩이 남지 않았다.
이 검붉은 비마저도 그의 뜻대로 낙하하는 모양이었다.
틀린 것은 초상화만이 아니었다.
암왕 하신후의 힘 또한 연이 잠입 전 들어왔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그는 더 강했다.
인간이 아니라, 신에 가깝도록.
그의 힘은 연 자신이 억누르고 있는 힘과 비슷해 보였다.
“네 등에서 피가 나는데.”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연이 하신후를 돌아보았다.
“네?”
“등.”
그가 손가락을 까딱이며 연을 가리켜 보였다. 그제야 연은 자신의 옷자락에 피가 밴 것을 깨달았다. 등이 요마의 손톱에 베인 것이다. 뒤늦게 자신이 얼마나 긴장해서 싸우고 있었는지 느껴졌다. 다친 걸 알아채지 못할 만큼 긴장해 있었다니. 평생 신전에서만 살아온 연에게는 실전 경험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게, 진작 신전 밖을 돌아다니고 싶다 할 때 자기 말을 들어줬으면 좋았을걸. 이게 다 신관들이 고집불통 멍청이들인 탓이었다.
고작 이 정도 하급 요마에게 등을 내주다니.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용의 자존심에 금이 쩍 갈 만한 일이었다. 연은 얼굴이 굳다 못해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하신후는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겨우 이 정도 요마에게 당하다니. 올해 선발된 자들이 모두 너와 같다면 큰일이겠군.”
그는 그대로 등을 돌려 리경에게로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연은 창백한 얼굴을 찌푸리고서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굳이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더 부끄러우라고 그러는 건가?
모든 인간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면 인간 세상은 매일 전쟁터이리라.
자신이라고 고작 이런 요마에게 당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마음만 먹으면 그가 멋진 척하며 그리했듯 한순간에 요마를 도륙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녀는 누가 뭐래도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하고 존귀한 존재니까.
연은 스스로를 타이르며 인내심을 기르려 노력했다. 다만 그러고 있으려니 사방에서 요마의 진액 냄새가 밀려들어 도무지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이 뛰어난 후각은 확실히 제국 생활의 걸림돌이었다.
‘물론 맛있는 걸 먹을 때는 다르지만 말이지.’
문득 품에 소중히 품고 있던 살구가 떠올랐다. 연은 무너진 자존심을 달랠 겸 품에서 주섬주섬 살구를 꺼냈다. 다른 무사들이 보지 않을 때 얼른 한 알 먹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손수건을 펼쳐 막 살구 한 알을 입에 넣었을 때였다.
“…흡!”
“…….”
하필이면 딱 그 순간 그녀를 돌아본 하신후와 눈이 마주쳤다.
“컥!”
실실 웃으며 살구를 씹으려던 연은 사레가 들려 기침을 뱉고 말았다. 터져 나온 기침과 함께 입속에서 막 씹힌 살구가 날아갔다.
어느새 하신후 곁에 선 리경마저도 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
연은 풀밭에 떨어진 살구 조각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돌아섰다. 더는 이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었다. 지나치게 민감한 후각 말고도 연의 약점은 한 가지 더 있었다. 지엄한 신룡으로서의 고고한 자존심이었다. 그녀는 긍지 높은 용이었다. 그러니 이런 추한 꼴을 보이고도 견딜 수 있을 리 없었다.
돌아선 연은 창백해진 얼굴로 정신없이 두 사람 앞을 벗어났다.
하신후와 리경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용이 남긴 책’이 무엇인지 여전히 신경이 쓰이기는 했다. 그것은 차차 알아보리라. 특히나 ‘용의 책’이 무엇인지는 꼭 알아야 했다.
하나의 시대에 신룡은 늘 하나뿐이다.
그러니 연이 남긴 적 없는 그 책이란, 연보다 먼저 존재했던 전대의 용인 월이 남긴 서책일 터였다.
죽은 월에 대해 신관들은 늘 이상할 정도로 비밀을 지켰다. 연이 무엇을 알고 싶어 하든, 그들은 제대로 알려준 적이 없었다.
그래놓고 이렇게 무턱대고 적진으로 보내다니. 아무리 연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직접 이곳 생활을 겪어볼수록 그들이 괘씸할 정도였다.
연은 여러모로 얼굴을 찌푸린 채 의술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우선은 이 욱신거리는 등부터 어떻게 해야 할 것 같았다. 한 번 아픔을 자각하니 점점 더 견딜 수 없이 아파오는 것 같았다.
* * *
“상처 깊이에 비해 출혈이 많아서 그렇지 큰 상처는 아니야. 이 정도는 훈련하면서도 다칠걸?”
다홍은 한심하다는 듯 연을 보며 혀를 쯧쯧 찼다. 연은 상체를 칭칭 붕대로 감은 채 끙끙 앓고 있었다.
“하지만 아픈 걸…. 너무 아파.”
차마 다홍에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연은 이 정도로 다쳐본 적이 처음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는 신전의 제의를 치를 때가 아니고서는 처음이었다.
제의를 치를 때면 연은 매번 보검으로 팔에 상처를 내어 피를 내주어야 했다. 물론 신관의 보검은 통증이 없도록 미리 주술을 걸어둔 것이었다.
용의 피는 신민을 구원하는 힘이다. 연의 피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한 힘을 지녔다. 그러니 제의를 치를 때 상처를 입는 것은 구원자로서 연이 지닌 숙명이었다.
하지만 이 상처는 전혀 달랐다. 요마의 손톱에 당한 상처는 연의 실수로 생긴 것이다. 그래서인지 훨씬 더 아팠다. 의술사가 발라준 약이며 붕대는 아무 쓸모도 없었다.
“다시는 다치지 않을 거야.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어.”
연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다홍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너 다친 적 없니? 꼭 그렇다는 것처럼 말하네.”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연은 투덜거리다가 말을 흐렸다.
“내가 얼마나 잘 피해 다니는데. 내가 겁도 많고 조심성도 깊은 편이라서.”
“흥, 헛소리하네. 며칠 봐도 알겠는걸. 솔직히 말해 봐. 너 살면서 제국인들에게 크게 당해본 적 한번 없지? 늘 이상하게 기세등등하잖아. 나는 얻어맞아서 뼈가 몇 군데나 부러진 적도 있어. 요마한테 말고, 제국인들에게 말이야.”
다홍의 말에 연은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늘 씩씩해 보이는 그녀라서 그런 일을 겪은 줄은 몰랐다. 여기 오는 길에도 내내 무사들에게 괴롭힘당하기는 했지만, 누구도 그들을 그 정도로 때리지는 않았었으니까.
“그 정도로 심하게 당했다고?”
“당연하지. 우리는 사인인걸. 태어났을 때부터 제국인과 달리 요기 어린 땅에서도 살 수 있는 반괴물이니까. 그러니 네 상처도 약과 붕대로만 치료해줄 뿐, 다른 제국인들처럼 주술로 낫게 해줄 수 없는 거잖아. 제국의 주술은 우릴 위한 게 아니니까.”
그것은 알고 있던 일이었다. 제국의 주술은 의술 쪽으로도 꽤나 발전해 있었다. 하여 다른 이들은 모두 주술로 상처를 치료받을 수 있었다. 연만이 아직도 칭칭 붕대를 감은 신세였다.
“…그래. 이 땅의 모든 건 우릴 위한 게 아니지.”
연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이곳은 제국이다. 100년 전쟁에서 사인들을 이기고, 그들 위에 군림하게 된 자들의 땅인 것이다. 그리고 연은 이 땅에서 자신의 신민들을 구원해야 했다.
제국의 정점에 선 하 씨 남매를 무너뜨려 그들이 ‘수호’하는 이 땅을 차근차근 손에 넣는 것.
그것이 연이 이곳으로 보내진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