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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왕을 사랑한 신룡 (2)화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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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파. 나 너무 배가 고프다.”

연은 남루한 침상에 걸터앉아 입술을 비죽였다.

투덜거리는 소리에 다홍이 머리를 땋다 말고 인상을 구겼다.

“그만 좀 투덜거려. 그러게 왜 술잔은 붙잡아서 이 고생을 해? 그냥 살짝 피하기나 하면 됐을걸. 누군 그런 걸 못해서 얻어맞고 있는 줄 아니? 너 때문에 우리까지 쫄딱 굶게 됐잖아.”

“하지만 정말 붙잡고 싶은 속도로 날아왔는걸….”

날아오는 술잔이 제 눈에는 허공에 떠있는 듯 보여 거슬린 것을 어찌하겠는가.

연은 잠시 눈을 찡그리고 입술을 비죽이다 바닥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스쳤다.

“아까 객점 주인은 어차피 여길 떠난다고 했지?”

“그렇지. 혼자 계속 여기 있기엔 무사들이 무서울 거 아냐. 술 취해서 무슨 행패라도 부리면 어쩌겠어? 이런 허름한 객점에서 우리가 뭘 훔쳐 갈 리도 없고.”

어찌 되었든 그들은 북왕 휘하의 무사들이었다. 이런 시골 산지의 마을 객점주 하나가 그들에게 행패를 당했다 해도, 누구 하나 제대로 시시비비를 따질 엄두를 내지 못할 터였다. 주인은 그런 짐작에 식사를 내준 뒤 얼른 꼬리를 내뺀 터였다.

다홍의 답에 연의 두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저주흔으로 얼룩진 가운데서도 두 눈의 총명하고도 맑은 빛은 또렷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맑은 눈빛이라고는 해도, 그 눈빛에 담긴 목적은 기실 단순했다.

“그럼 지금 부엌엔 어차피 아무도 없는 거 아냐? 다른 사람들은 다들 취해서 잠들었고, 우리가 몰래 내려가도 알아챌 사람 없을걸.”

“그게 무슨 뜻이야? 가서 뭐 남은 음식이라도 훔쳐 먹자는-.”

다홍이 스스로 말을 멈추었다.

연이 초롱초롱 간절한 눈으로 리경을 돌아보았다. 리경은 셋 가운데 가장 겁이 많았다. 그러나 그도 종일 굶어 배가 고프긴 마찬가지였다. 리경은 결국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곧 세 사람은 조심스럽게 복도로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 왼쪽으로 돌면 부엌이다. 앞장선 것은 연이었다.

연은 주위를 둘러볼 필요도 없이 편안하게 복도를 지났다. 어차피 다른 이들은 술에 취해 늘어져 있었다. 그나마 눈치가 빠른 대장 유백 역시 무슨 생각에 잠긴 건지 기운이 잠잠했다.

평범한 인간들의 기운 흐름을 읽는 것은 매우 쉬웠다.

연은 태연하게 다홍과 리경을 부엌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과연 기대했던 대로 부엌에는 남은 음식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연이 노리던 것은 처음 보는 ‘낯선 음식’이었다. 분명 향기로운 냄새가 났는데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었다.

제국의 경계 바깥, ‘버려진 땅’의 용의 산에서 온 연에게는 제국 음식 가운데 모르는 것이 무척 많았다. 아무리 숨어들기 전 공부를 했다고는 해도 진짜 제국은 전혀 달랐다.

다홍과 리경은 곧 저마다 음식을 찾아 와구와구 먹기 시작했다. 연은 슬그머니 그들에게 등을 돌리고 눈독을 들이던 ‘낯선 음식’을 손가락으로 들어 입에 가져갔다.

음식을 입에 넣는 순간, 연의 눈빛이 변했다.

너무 맛있었다…!

이렇게 맛있는 것은 제국에서도 처음이었다.

“…정말 달콤하다.”

연은 저도 모르게 음식의 향기와 맛에 취해 중얼거리고 말았다. 우물거리며 물컹한 그것을 씹자 달콤하면서도 새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과실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는데, 과실의 종류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용의 산’에서는 나지 않는 과실이었다.

연이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서 과실을 음미하고 있자, 그 모습을 본 리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연, 뭘 먹고 있어요?”

암만해도 연의 표정이 괴상했다.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고작 말린 살구를 먹으며 저렇게 행복해한단 말인가.

리경은 무심코 작게 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많이 배고팠나 보네요. 꿀도 설탕도 없이 그냥 말린 살구라니. 여기가 시골이긴 한가 봐요. 딱딱해서 씹기도 힘들어 보이는 걸 정말 맛있게 먹네요.”

“…씹기 힘들지 않아.”

연은 조금 부끄러워져서 샐쭉하게 대꾸했다. 조금만 맘에 들지 않는 것이 있어도 입술을 비죽이는 것은 연의 오랜 버릇이었다.

‘용의 산’의 신전에서 살 때는 모두가 연에게 공손했다. 물론 자유라고는 조금도 없는 갑갑한 삶이었지만 말이다. 그에 비해 제국에 숨어든 뒤로는 모두가 툭하면 연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기 일쑤였다.

연은 습관적으로 입술을 비죽이며 말린 살구 몇 개를 손수건에 감싸 품에 넣었다. 남들이 보지 않을 때 몰래 먹을 생각이었다.

인간들은 신룡인 연에 비해 맛과 향기를 느끼는 능력이 뒤떨어졌다. 특히나 후각은 그 정도가 아주 심했다. 지나치게 민감한 후각은 연의 약점일 정도였다.

물론 음식을 음미할 때는 그 뛰어난 후각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연은 품속에서도 은은하게 풍겨오는 새콤한 살구 냄새에 기분 좋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오래 가지 못했다.

곧 위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온 까닭이었다. 세 사람은 얼른 발소리를 죽여 위층으로 돌아갔다. 셋을 본 동료 주술사 하나가 짜증스럽게 외쳤다.

“너희는 뭘 하고 있어? 얼른 준비해. 출격해야 하니까!”

“출격이라니?”

“못 들었어? 숲에 요마 떼가 나타났대!”

요마 떼라고?

아무리 위험천만한 경계 지역이라고 해도 이렇게 갑자기 나타난단 말인가.

셋은 놀란 얼굴로 서로를 보다가 얼른 검을 챙겨 들었다. 그들은 주술사이나 기본적인 요건을 따르기 위해 검술 역시 어느 정도 익혀둔 채였다.

부랴부랴 검을 챙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들은 모두 숲 가까이에 집결했다. 유백이 어두운 표정으로 숲을 바라보았다. 숲에서는 정말로 요마 떼의 기운이 번져 오고 있었다.

‘용의 산’의 괴물 가운데도 저 정도 요마는 넘쳐났다.

물론 연이 지키는 신민들의 영토를 넘어오는 괴물은 없었다. 신룡의 영토를 넘어오는 짓은 암만 괴물이라도 하지 않는 법이었다. 괴물이라고 해서 딱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오늘 밤 다른 이들 앞에서 괴물들이 벌벌 떠는 꼴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당장 정체를 의심받고 말 것이다.

‘쳇, 이게 항상 제일 곤란하단 말이야.’

연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영력을 다스려 억눌렀다. 사인인 다홍이나 리경을 비롯한 다른 제국인 주술사들과 비슷한 힘만을 보여야 했다.

임무를 마치기 전까지는 절대로 의심을 사서는 안 된다. 그것이 연의 각오였다.

그래, 그랬을 텐데….

처음에는 분명 각오를 지키기가 쉬울 거라 생각했건만, 어째 쉽지 않았다.

“흠, 헉, 대체 언제까지 싸워야 하는 거지?”

연은 숨을 몰아쉬며 검을 고쳐 쥐었다. 제국에 숨어들 때 어설프게 배운 검술이었다. 평생 고생 따위는 해본 적 없는 연에게 이런 전투는 꽤나 힘든 일이었다. 평소라면 그냥 자신의 기운을 내비치는 것만으로도 사라졌을 요마 떼 아닌가.

그런데 지금은 한 마리 한 마리와 검으로 싸워야 했다. 검에 영력을 조금 담기는 했으나, 그야말로 평범한 인간 수준의 힘이었다.

연은 짜증스럽게 인상을 찡그렸다. 그녀의 눈에 멀리 있는 리경을 덮치는 요마가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하필 리경은 외딴곳까지 몰려 있었다.

주위를 돌아보아도 그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연은 숨을 몰아쉬다 말고 리경에게로 달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리경! 조심해!”

연은 급하게 외치며 리경을 감싸 밀쳐냈다. 요마의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등 뒤 허공을 날카롭게 갈랐다. 거세게 팔을 내민 탓에 목표물을 놓친 대두 요마가 앞으로 기우뚱하는 순간이었다. 연은 발길질로 요마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요마가 균형을 잃고 땅으로 고꾸라졌다.

황급히 리경을 돌아보니 그는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연, 미안해요. 내가-.”

“나도 너무 지쳤어. 그냥 달아나자!”연은 때아닌 사과를 주절거리는 리경의 팔을 붙들고 달음박질을 치려 했다. 그러나 리경은 따라 달리는 대신, 품에서 웬 서책을 꺼냈다.

“자, 잠깐만요. 다, 다, 다리가 풀려서 못 달려요. 그, 그냥-. 그냥 이 책으로-.”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었다.

제국 주술 중에는 책을 펼쳐 주문을 외우는 것도 있는 건가?

연은 제국이 주술사들에게 가르치는 주술의 종류를 잘 알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자신을 여기로 잠입시킨 신관들도 참으로 터무니없는 자들이었다. 아는 것도 거의 없는 대장을 무턱대고 적진에 보내는 자들이 어디 있단 말인가.

연은 멍하니 리경을 바라보았다. 리경은 꾸르륵거리며 땅을 짚고 일어서려 하는 요마를 앞두고 더듬거리며 몇 마디 주문을 외웠다.

파르르륵-.

서책의 장들이 돌연 검붉은 빛에 감싸이며 저절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나, 나를 지켜라. 네 주인인 나를 지켜줘!”

리경이 커다란 눈에 간절함을 담아 외쳤다. 그 말과 더불어 책에서 뿜어나온 검붉은 광채가 요마를 향했다. 요마의 형체가 검붉게 물들더니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저건 대체 무슨 주술이지?

처음 보는 주술에 연의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처음 본 것이어야 마땅한데 어쩐지 그 기운이 너무도 낯익다는 점이 이상했다.

연을 스친 기묘한 인상은 다음 순간, 더욱 놀라운 목소리의 등장으로 사라졌다.

“재미있는 것을 보게 되었군.”

부드러운 웃음기가 스민 사내의 목소리였다. 연은 흠칫 놀라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처음 보는 사내가 서 있었다. 온통 요괴의 시체와 진액으로 더러워진 곳에서, 그는 홀로 말끔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나타난 순간부터 기묘할 정도로 좋은 향기가 느껴졌다.

뭐지? 꽃인가? 아니, 꽃은 아니다.

뭔지 모를 좋은 향기에 연은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사내는 얼굴도 인간 따위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무척 수려했다.

연은 자신을 지나쳐 곧장 리경에게로 가는 사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태어나서 저렇게 아름다운 인간은 처음이었다. 이 정도로 매혹적인 향기도 처음이었다. 제국의 상등(上等) 귀족은 인간임에도 강한 힘을 지녀 불로불사 한다더니, 설마 그들 모두가 이런 것일까?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네가 용이 남긴 책을 지니고 있다는 사인 술사로구나.”

멍해진 연의 귓가에 사내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취한 듯 흐리멍덩하게 풀려 있던 연의 눈동자에 흠칫, 경악이 스몄다. 용이 남긴 책. 사내는 분명 그리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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