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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괴물을 멸한다.
괴물은 인간을 먹는다.
둘은 공존할 수 없으니 괴물은 인간의 제국 너머 버려진 땅으로 퇴치되어야 마땅하다.
사람들은 대개 이 신념을 따랐으나 힘을 동경하던 일부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괴물들만 살 수 있는 버려진 땅의 요기 속에서도 죽지 않았다.
괴물과 공존할 수 있었기에 그 힘을 탐했고, 끝내 가장 강력한 괴물을 따르며 그것을 신룡(神龍)이라 숭배했다.
제국은 그 탐욕스러운 자들을 괴물의 자손이라 불렀다.
괴물에 굴종해 그 뜻을 따르는 자들.
그리하여 더는 인간과 동등할 수 없는 자들.
기나긴 전쟁이 제국의 승리로 끝나자 신룡을 섬기던 자들은 머나먼 독의 땅으로 쫓겨났다. 더러는 제국에 흡수되어 가장 누추한 그림자에 기생했다.
그들은 인간이었으나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보다 못한 자들이자 괴물이나 다름없는 자들이었다.
신룡을 따르던 자들은 그 사악한 피를 물려받은 괴물 잡종이다. 용이 되지 못해 뱀으로 남은 사인(巳人)들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믿기 시작했다.
전쟁에 패배한 괴물의 자손은 영원히 패자의 굴욕을 짊어져 마땅했다.
그것이 제국의 정의였다.
“북왕께서는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지. 어쩌자고 그런 것들을 주술사로 뽑는단 말이야? 아무리 제국 최고의 권력자에 자기 혈육이라 해도 그렇지, 황제께서는 그냥 두고 보실 생각이란 말인가. 이래서야 북왕이 아니라 암왕이라 불리는 것도 당연해. 마치 그자가 진짜 황제 같으니 원.”
“쉿, 말조심해. 황제는 낮말도 밤말도 모두 듣고 있다는 거 모르나?”
동행이 주의를 주자 술꾼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외진 마을 유일한 객점은 평소에 비해 유난히 손님이 적어 조용했다. 그가 입을 다물자 객점은 더욱 썰렁해졌다.
술꾼이 늘어놓은 것은 기실 뻔한 말이었다.
북왕이라는 칭호보다 암왕(阴王)이라는 별칭이 더 어울리는 자. 북왕 하신후는 황제 하을령의 하나뿐인 생존 혈육이자 오라비였다.
불사하며 영원을 살아가는 그들에게 함께 영원을 살아나갈 혈육이란 몹시도 귀한 존재다. 하니 황제가 북왕의 뜻에 쉽게 반대할 리 없었다.
게다가 북왕 하신후는 누가 뭐래도 길고 참혹했던 100년 전쟁에서 제국을 지켜낸 일등공신이었다. 그 공이나 그가 지닌 힘을 따지고 보자면 가히 황제의 위상을 능가했다.
전쟁이 끝나고 그가 왜 직접 황위에 오르지 않았는지, 그 점은 제국인들의 오랜 의문이었다. 물론 현황제가 그의 여동생인 하을령인 이상, 왜 하신후가 황제가 되지 않았는지야 말로 입 밖에 내기 껄끄러운 의문이 되겠지만 말이다.
한참 떠들던 술꾼이 쩝,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 즈음이었다. 지켜보던 객점 주인이 슬그머니 다가와 말을 꺼냈다.
“저, 미안해서 어쩌나. 오늘은 이만 문을 닫아야 해서. 그만 돌아가 줘야겠어.”
“으응? 갑자기 거 무슨 소리야?”
“정말로 몰라서 묻는 건가?”
주인이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한숨을 내쉬며 타이르듯 일러주었다.
“밤낮 술타령도 좋지만 세상 돌아가는 것도 좀 알아두게. 마침 자네가 아까까지 떠들던 그 ‘괴물의 자손’들이 지금 이 마을 근처를 지나고 있잖아.”
“아 글쎄, 그게 우릴 쫓아내는 것과 무슨 상관이야?”
“자네들이 워낙 말실수를 해대니….”
“아니 우리가 말 좀 편히 한다고 그들이 와서 우리말을 듣기라도 할까 걱정하는 건가?”
헛웃음과 함께 던져진 말에 주인의 표정은 떨떠름해질 뿐이었다. 그에 비로소 말을 뱉은 자의 표정도 달라졌다.
“정말로 그들이 여길 온다고?”
이곳 마을은 제국의 경계 근처에 있는 곳이니, 그들의 행렬이 지나는 길목에 가까운 것은 알고 있었다. 하나 이렇게 마을 객점에 들른 적은 처음이었다.
주인은 눈이 휘둥그레 커진 주정뱅이 손님들을 부랴부랴 객점에서 몰아냈다. 말이 객점이지, 실은 통 외지 손님이 없는 덕에 그저 잠자리가 마련된 술집에 가까운 가게였다.
주정뱅이들이 떠나고 남겨진 지저분한 자리를 치우고 있을 즈음, 닫혀 있던 문을 누군가 두들겼다.
“실례하지.”
두들김은 그저 예의였는지 새로운 손님은 주인의 대꾸를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유려하고 고고한 느낌의 수도 말씨였다.
안으로 들어선 손님은 북왕가의 문양이 새겨진 검은 무복 차림의 사내였다.
“약속한 객실은 준비가 되었나?”
그의 물음에 주인은 머리를 조아렸다. 매년 새로 인가받은 주술사들을 이끌고 경계 지역을 순회하는 장수가 있다고 들었는데, 아마 이 자가 그인 듯했다.
주인의 짐작대로 사내는 원정을 지휘하는 장수 유백이었다. 유백은 검사였으나 주술에도 조예가 깊어 매년 이렇게 신입들을 이끌었다.
물론 올해 유백의 임무는 평소보다 조금 더 까다로웠다.
새 술사들 가운데 예의 괴물의 자손– 사인들이 끼어 있는 탓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객점 안으로 들어선 유백의 부하들은 곧 두 무리로 나뉘었다. 무리라 해봤자, 둘 중 한쪽은 단 세 명으로 이루어져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파리하고 겁먹은 얼굴로 눈치를 살펴대는 셋.
그 셋이 바로 사인들이었다.
유백은 세 명의 사인을 피곤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자리를 피하듯 계단으로 발을 옮겼다. 뒷일은 나 몰라라 할 생각이었다.
사인들을 괴롭히는 쪽은 오랫동안 유백을 섬겨온 부하들이었고, 괴롭힘당하는 쪽은 생면부지의 애송이들이었으니 더 따져 무엇하겠는가. 이럴 때는 그저 눈 감는 게 편했다.
유백이 자릴 비우자 곧 남은 무사들이 킬킬대며 이죽거렸다.
“봤느냐? 오늘도 대장은 너흴 돌볼 마음이 없으시다. 그럼 알아서 잘들 해야겠지?”
무사들 앞에 쭈뼛거리며 서 있는 것은 당연히 사인 셋이었다.
붉은 산 출신의 여자 주술사 다홍.
황금의 늪 출신의 남자 주술사 리경.
그리고 거기 있는 모두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외모를 가진 여자 주술사 연이었다.
다홍과 리경은 사인답게 붉은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보석 같기도 하고 핏방울 같기도 한 적안이었다. 그러나 연은 달랐다. 연의 눈동자는 칙칙한 잿빛이었다. 저주흔 탓이었다.
연의 눈가와 콧날은 온통 저주흔에 뒤덮인 채였다. 빛깔이 탁하고 얼룩덜룩한 것은 물론, 콧대까지 조금 일그러진 채였다. 저주흔은 평범한 흉터와 달리 저주 특유의 불길한 기운을 머금고 있어 비할 데 없이 꺼림칙했다.
“연, 너는 보기에도 흉하니까 들어가서 부엌일이나 해. 나머지 둘은 평소처럼 우리 식사를 열심히 날라오도록 해라.”
“굼뜨게 굴면 얻어맞을 줄 알아!”
점소이가 따로 없는 객점에 들를 때마다 음식을 날라오는 것은 죄다 사인들 몫이었다. 얌전히 일만 할 수 있으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제국인들은 사인을 괴롭히는 걸 당연히 여겼다. 유백의 무사들 역시 툭하면 손찌검을 해대고 험한 장난을 치기 일쑤였다.
객점 주인 역시 무사들이 으름장을 놓는 것을 멀찍이서 힐끔댈 뿐 사인을 동정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오늘도 또 억지로 술을 마시게 만들지도 몰라요. 정말 너무 싫어요.”
음식을 나르러 부엌으로 들어서자마자 리경이 소곤거렸다. 아직 소년처럼 어려 보이는 데다 예쁘장한 얼굴을 가진 리경은 무사들의 주된 괴롭힘 감이었다.
“수련을 마치고 황실 시험만 통과하면 멀쩡한 주술사로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나마 사인을 돌본다는 암왕의 부하들까지 이럴 줄이야. 앞으로 어쩜 좋죠?”
리경이 한숨을 내쉬자 연이 그를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나 무심한 객점 주인은 그들에게 어김없이 음식이 담긴 상을 내밀었다.
처음 술상을 들고 부엌을 나선 것은 다홍이었다. 연은 쭈뼛거리기만 하는 리경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얼른 이것만 가져다주고 돌아와.”
“하지만 제가 가면 분명 또 술을 마시라고 할걸요. 전에 억지로 먹었을 때 제가 토한 걸 뻔히 알면서요.”
리경은 울상이었다. 연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럼 내가 대신 다녀올게.”
자신이 간다면 돌아올 말은 뻔했다.
예상대로 무사들은 연을 보자마자 인상을 구겼다.
“이 흉측한 계집이! 누가 술맛 떨어지게 너더러 나오라고 했어? 너는 우리가 다 먹고 떠난 뒤에야 기어 나오란 말이야!”
누군가 짜증이 난다는 듯 안에게 술잔을 던졌다. 연은 공중에서 날아드는 술잔을 가볍게 붙잡았다.
“뭐야? 잘난 척하는 거냐? 이 흉한 괴물이 어딜 눈을 그따위로 뜨고-!”
술잔을 던진 이가 눈을 부라렸다. 연은 얼른 술잔을 다시 내려놓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화가 치밀었으나 참아야 했다.
분노를 다스리는 법.
그것이 인간 사이에 섞여들기 위해 제일 먼저 배워야 했던 기지였다.
연은 고개를 숙인 채 매서워지려는 눈빛을 애써 억눌렀다. 고개 숙인 그녀에게 온갖 조롱과 모욕이 날아들었다. 연은 최대한 침착하게 인내심을 다잡았다.
참아야 했다.
그래야 언젠가 이들을 모두 벌할 수 있다.
제대로 된 벌을 내리는 날, 자신을 따르는 이들 모두가 진정한 정의를 얻을 수 있으리라.
연은 제국에 숨어든 괴물의 우두머리, 이 하늘 아래 유일무이한 젊은 신룡이었다.
용은 본래 단 하나인 법.
그녀가 이 세상의 용이니, 자신을 따르는 용의 신민들을 돌봐야 하는 것 역시 그녀였다.
연은 그 대의를 위해 고고한 용의 자존심을 꾹꾹 눌러 꺾었다. 이런 버러지들이 던지는 모욕쯤이야 참을 수 있었다. 때려봤자 하찮기 짝이 없는 버러지의 주먹이다. 그저 한 귀로 듣고 흘린 뒤, 좀 이따 혼자서 맛있는 인간들의 요리로 주린 배나 채우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소란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숲.
어둠이 내리깔린 초저녁 숲속에서, 한 사내가 나무에 기대어 호수의 검은 수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얀 도포를 걸친 사내는 나른할 만큼 긴장감이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서 흐르는 분위기는 공기 중에 독을 퍼뜨리듯 무겁고 아득했다. 그는 고요한 수면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수면은 거울처럼 빛나며 그에게 유백이 이끄는 자들의 모습을 비춰주고 있었다.
남루한 객점에서 저주흔 가득한 사인 여인 하나가 무사에게 발길질 당하고 있었다. 사내는 잠시 무표정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어느 순간, 그의 입가에 뜻 모를 미소가 드리워졌다. 사내는 고개를 들어 숲을 돌아보았다.
까악, 까악-!
돌연 까마귀 떼가 저녁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까마귀가 날아간 자리로 찾아든 것은 돌연한 땅울림이었다.
쿵, 쿵, 쿵, 쿵-.
묵직한 울림들이 숲을 뒤흔들 듯 울려퍼졌다.
잠들어 있던 요마들이 깨어나 기지개 켜며 발을 구르는 소리였다. 숲에 잠든 요마 떼라니, 그런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위험은 마을을 위해 미리 없애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러라고 보낸 원정대였다. 한데 정작 하는 짓이라고는 연약한 사인 여인을 괴롭히는 것이라니.
“해야 할 일 대신 하지 말라 일렀던 짓을 하고 있으니, 이 정도 벌은 주어도 좋겠지.”
하얀 도포의 사내, 암왕 하신후는 퍼져나가는 요마의 발소리를 들으며 다시금 수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얻어맞던 여인이 몸을 웅크린 채 무사들 앞을 떠나고 있었다. 울상을 지을 법도 한데 분노한 표정일 뿐 겁먹은 기색 하나 없었다. 그 태도가 자못 고고할 정도였다.
하신후의 눈길이 연의 얼굴에 오래 머물렀다. 평범한 술사라기에는 어쩐지 기묘한 사인이었다.
이윽고 그의 입가에 드리워진 미소가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