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그를 위한 토끼 여왕님
2018.04.20.
“나봄아! 꼭 행복해야 한다! 알았지!”
나봄과 태오의 결혼식이 이뤄졌던 호텔 앞.
풍선으로 꾸민 웨딩카에 탄 나봄에게 소라가 울며불며 소리쳤다.
“아아, 주책맞게 왜 울어. 장인어른도 안 우는데.”
그걸 본 태오는 장난 섞인 핀잔을 주었다. 뻔뻔한 그는 아무래도 본식 때 감격에 젖어 엉엉 울던 제 모습을 잊은 모양이다.
그런 태오가 살짝 얄미웠던 소라는 보닛을 두드리며 거친 고함을 내질렀다.
“단태오 네 이놈! 너한테 뺏겼다는 게 분해서 그런다! 나봄이 보고 싶어서 너희 집 가면 쌍수 들고 환영해 주겠다고 약속해!”
“안 돼. 오지 마. 우리 신혼집에서 얼마나 술을 퍼마시려고.”
“뭐어?! 지금 우리 나봄이를 가둬 놓겠다는 거냐!”
겉으로는 사이가 안 좋아 보여도 소라와 태오는 결혼 준비를 하며 더욱 친해진 사이였다.
지금 태오가 입고 있는 턱시도도 소라가 직접 디자인해서 제작해 준 것이었으니.
그런 두 사람이 마냥 우스웠던 나봄은 함박웃음을 머금은 채 소라의 손을 붙잡았다.
“우리 집이랑 너희 집이랑 여전히 가깝잖아. 언제든 놀러 와도 돼. 내가 허락할게.”
“진짜?”
“응, 진짜!”
그 말에 소라는 언제 역정을 냈었냐는 듯 다시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러고선 메고 있던 커다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자, 그럼 이걸 받으시오!”
“이게 뭐야?”
나봄은 소라가 창문 틈으로 집어넣어 주는 커다란 상자를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이게 뭐야?”
그러고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으니 소라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한다.
“내가 직접 만든 선물이야! 가서 유용하게 쓰도록!”
“수고롭게 뭐 이런 걸 다 준비했어!”
“절친 시집가는데 뭔들 못하겠니. 전공 분야만 맞았으면 단태오 턱시도가 아니라 니 웨딩드레스를 만들어 줬을 거다.”
언제나 그녀를 신경 써 주는 소라의 진심에 나봄은 가슴 한편이 뭉클해졌다. 이래서 인생에 진정한 친구 한 명쯤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나 보다.
“그래, 이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워. 잘 쓸게.”
“우리 나봄이 저 성난 망아지 같은 놈 데리고 잘 살 수 있지? 비혼주의자인 내가 결혼 뽐뿌 올 만큼 행복해져야 돼.”
“하하하, 성난 망아지라니.”
한창 훈훈한 두 여자의 분위기.
하지만 태오는 틈만 나면 자신에게 이상한 별명을 붙이려 하는 소라가 참 고까웠다.
지이이잉―
그래서 열렬한 작별 인사를 나누는 나봄과 소라 사이의 조수석 차창을 올려 버리자, 소라는 몹시 당황한 얼굴로 차창을 쿵쿵 두드렸다.
“앗! 단태오! 잠깐! 나봄이랑 셀카 찍을 거란 말이야! 이거 열어!”
“아, 이제 좀 조용하다. 슬슬 출발하자.”
태오는 노발대발하는 소라를 무시하며 웨딩카의 시동을 걸었다.
그때 이번엔 태오가 앉아 있는 운전석 창문 쪽으로 또 한 명의 불청객이 불쑥 나타났다.
“이제 신혼여행 출발하는 거야? 재밌게 놀고 집들이 때 보자, 나봄아.”
내 심사가 뒤틀린 건지는 몰라도, 선우차준은 세상 젠틀한 척할 때 제일 보기 싫다. 특유의 능글맞은 눈웃음을 띤 채 날 쳐다볼 때도.
나봄은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하고 있는 차준에게 손을 흔들며 화답해 주려 했다.
하지만 태오는 삐딱한 반응으로 두 사람의 인사를 막았다.
“집들이한다는 말도 안 했는데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 그렇게 고생스러운 거 패스할 겁니다.”
“아, 걱정 마세요. 그럼 우리 집에서 하면 되니까.”
“아니, 우리 집들이를 왜 그쪽 집에서…….”
“신혼여행 비행기 표도 퍼스트 클래스로 끊어 주고, 직접 집들이도 열어 주고. 나 진짜 형으로서 최고다. 안 그래?”
하지만 태오가 아무리 까칠하게 굴어도 차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태오에겐 얼굴에 철판이라도 깐 사람처럼 뻔뻔하게 들이대야 겨우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건, 그와 몇 달을 같이 일하며 어렵게 배운 노하우였다.
“형은 무슨…… 아, 좀 뒤로 가! 그 비싼 비행기 놓치겠다!”
태오는 괜히 성질을 내며 차준이 매달린 운전석 쪽 차창도 올려 버렸다.
그러고 나서야 겨우 찾아온 마음의 안정.
“하아…….”
태오는 긴 속눈썹을 내리감고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태오를 보며 지켜보고 있던 나봄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그렇게 열심히 반응해 주니까 사람들이 너 괴롭히는 걸 좋아하나 봐.”
“뭐?”
“성질내는 게 너무 귀여워, 하하.”
태어나서 화내는 모습까지 귀여워해 주는 여자가 생길 줄이야.
보통 나봄이 귀엽다는 말에 뾰족이 돋아난 심통도 집어넣는 태오였으나, 오늘은 순순히 풀려 줄 생각이 없었다.
공식적으로 부부가 된 오늘만큼은 그녀에게 귀여운 남자가 아닌 상남자로 각인되고 싶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곰곰이 고민하던 태오는 나봄에게로 시선을 틀었다.
신부 화장이 지워지지 않아서 그런지 오늘따라 더욱 초롱초롱해 보이는 그녀의 눈동자.
태오는 그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마른침을 삼켰고.
“오늘 성질낼 건 따로 있는데. 그것도 귀여울까, 과연.”
이내 해석해 보자면 아주 노골적으로 야릇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차창이 닫혀 있다곤 해도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악! 얘가 미쳤나 봐!”
민망해진 나봄은 주변을 훑어보며 태오의 어깨를 찰싹찰싹 때렸다.
태오는 그녀의 매운 손에 맞으면서도 크게 웃음을 터트렸고, 시원스럽게 액셀을 밟았다.
“가자! 하와이로!”
“엄마야! 천천히 출발해! 바보야!”
어린 아이처럼 부푼 가슴을 안고 출발하는 신혼여행.
둘이서 떠나는 여행이 처음은 아닌데, 마치 첫 여행처럼 가슴이 설렌다.
살짝 수줍고, 살짝 긴장되는 이 기분은 우리를 꼭 연애를 막 시작했던 그 시절로 데려다주는 듯하다.
마주한 눈빛까지도 괜히 두근두근거리게.
* * *
8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하와이 공항.
“와, 이게 우리 차야?”
나봄이 공항에 주차되어 있는 렌터카를 보고 탄성을 질렀다. 한국에서는 본 적도 없는 까만 스포츠카는 할리우드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생겼다.
반짝반짝한 나봄의 눈을 보니 흐뭇해진 태오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말했잖아. 여왕님처럼 모시겠다고. 오늘이 그 시작이야.”
“정말 예뻐!”
“마음에 들어 하시니 다행입니다, 여왕님. 한 번 타 보시지요.”
태오는 능청스레 고개까지 숙이며 나봄을 에스코트했다.
덕분에 더욱 신이 난 그녀는 망설임 없는 걸음을 내딛었다. 조수석 쪽이 아닌 운전석 쪽으로.
“운전 니가 하게?”
그녀의 운전기사를 자처할 생각이었던 태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나봄은 스스럼없이 운전석에 몸을 실으며 대답했다.
“여왕님은 이런 스포츠카를 얻어 타는 게 아니라 직접 몰고 다니잖아.”
“뭐, 그렇긴 하지.”
“하와이로 휴가차 놀러 왔다가 잘생긴 청년한테 반한 게 오늘의 컨셉이야.”
“아아, 컨셉도 있어?”
태오는 나봄이 귀엽다는 듯 하하 웃었지만, 나봄은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표정으로 가방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우아하게 커다란 선글라스를 썼다.
한 쪽 팔은 차창에 올려놓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핸들을 잡는 그녀의 자세는 화보만큼이나 완벽했다.
하지만 태오의 눈엔 그런 그녀가 마냥 사랑스러울 뿐이었다.
아무리 멋진 척을 해 봐도 얼굴이 앳돼서 그런가, 아니면 체구가 작아서 그런가, 고고한 여왕님이 아니라 잔뜩 들뜬 병아리 같기만 하다.
“나봄아, 의자가 너한테 너무 큰 거 아니야?”
태오는 아빠 미소를 지으며 나봄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나봄은 그러든가 말든가 여전히 도도한 표정을 유지한 채 스포츠카에 시동을 걸었고, 턱 끝을 살짝 올린 채 저돌적인 질문을 던졌다.
“거기 잘생긴 분! 나랑 호텔로 가지 않을래요?”
“으, 응……?”
“타, 내 옆자리에 앉게 해 줄게.”
순간.
간지럽기만 하던 태오의 심장은 폭발할 듯이 두근두근두근.
병아리가 여왕님으로 탈바꿈하는 마법이 일어났다. 그녀에게서 갑작스레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는 이대로 순순히 따르고 싶게 만든다.
그 분위기에 압도된 태오는 수줍은 하와이 청년처럼 조심스레 되물었다.
“오늘 밤 재워 주실 건가요?”
그러자 나봄은 태오를 흉내 내듯 한쪽 입꼬리만 씨익 들어 올리며.
“일주일 동안 재워 줄 수도 있어.”
그녀의 여유로운 대답을 들은 태오는 더 이상 망설일 것도 없이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이제야 상황극이 마무리 지어졌다고 생각한 나봄은 그녀다운 해맑은 웃음을 띤 채 말했다.
“나 여왕님 흉내 꽤 잘 내지? 그치?”
태오는 그녀의 자신감에 절절히 동의한다는 의미에서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돌연 진지한 눈빛으로 뒤바꾸고는 엄중한 당부를 건넸다.
“너무 어울리긴 하는데, 너 어디 가서 장난으로라도 이런 거 하면 안 된다. 특히 남자들 앞에서는 선글라스도 끼지 마. 너무 섹시하니까.”
“하하, 뭐라는 거야.”
하여간 나봄에게는 약해도 너무 약한 남자.
아마 이런 어리숙한 상황극에서도 가슴 설레어 하며 넘어오는 건 태오밖에 없을 것이다. 그걸 알고 있는 나봄은 전전긍긍하는 태오가 마냥 우습기만 하다.
그러나 별거 없는 모습도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그의 착각을 굳이 고쳐 주고 싶지는 않아서.
“그럼 나만 믿고 따라 와. 일주일 동안 제대로 책임져 줄게.”
나봄은 여왕님 놀이를 좀 더 즐기기로 했다.
“네, 여왕 마마. 저는 몸도 마음도 다 준비가 됐습니다.”
좀 더 이 모습을 즐기고 싶어 하는 듯한 그녀의 남자를 위해.
* * *
“우리 바로 나갈 거지?”
와이키키 해변이 한눈에 보이는 하와이풍 풀빌라.
방에 도착한 나봄이 가방에서 지갑만 꺼내 들며 물었다. 가지고 온 캐리어를 정리하던 태오는 흘깃 시계를 확인하고는 대답했다.
“어, 벌써 세 시가 다 됐네. 지금 나가면 바다 구경하고 저녁 먹으러 갈 수 있겠다.”
“진짜? 바로 와이키키 해변 보러 갈 거야?”
“응, 첫날엔 피곤해서 멀리 나갈 수도 없으니까.”
“우와, 나 갑자기 너무 신나.”
바다를 좋아하는 나봄은 마냥 들뜬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태오는 시원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오늘 밤 늦게까지 바닷가에 있을 거니까 실컷 구경해.”
그러고는 짐을 정리하던 손을 더욱 분주히 재촉하던 그때.
“어, 이거…….”
소라가 선물했던 상자가 눈에 띄었다.
잘 쓰라고 했던 걸 보니 뭔가 유용한 물건인 것 같은데, 한 번 열어 볼까.
“나봄아, 나 채소라 선물 봐도 돼?”
태오는 이미 상자의 리본을 풀고 있으면서 형식적으로 물었다. 바다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찬 나봄은 거울 앞에서 화장을 고치며 대답했다.
“응, 봐도 돼!”
그 말을 들을 때쯤 상자를 감싸고 있던 리본은 순순히 풀어졌고, 태오는 별 감흥 없는 손길로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훅 하고 들어오는 진한 향수 냄새와 함께 눈앞에 드러난 정체 모를 털 뭉치.
“이게 뭐야.”
“왜? 소라가 뭐 줬어?”
태오의 의미심장한 반응을 본 나봄이 뒤늦은 관심을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털 뭉치의 정체를 짐작하지도 못한 태오는 무심히 꺼내 들고 몸을 틀었다.
“글쎄. 뭐 인형 같은 거 아닐까?”
그러고는 그녀에게 보여 주기 위해 어깨높이 정도로 들어 올렸는데.
“……어머.”
나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꼭 못 볼꼴이라도 본 사람처럼.
그녀의 표정이 수상했던 태오는 그제야 고개를 내려 제 손에 들린 선물을 확인했다.
분명 상자에 고이 접혀 있었을 때까지만 해도 복슬복슬한 인형처럼 보였는데.
“어……?”
왜 지금 내 손엔 가슴이 훤히 뚫려 있는 토끼 의상이 들려 있는 건지.
“아악!”
소스라치게 놀란 태오는 어른들을 위한 토끼 의상을 집어 던지다시피 떨어트렸다.
하지만 덕분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토끼 의상의 뒷면은 더욱 가관이었다.
등판이 전부 속이 훤히 비칠 만한 망사로 되어 있는데다가, 그 와중에 꼬리뼈 부분엔 동그란 솜 뭉텅이까지 달려 있었으니.
“지금 저거…… 꼬리야?”
태오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혼잣말처럼 되물었다.
그제야 민망함이 확 솟구친 나봄은 서둘러 달려가 떨어진 옷을 주워 들었다.
“이런 거 안 입을 거야!”
“어, 어?”
“괜히 상상하지 마! 알았지!”
나봄은 그리 말했지만, 생긴 것과 달리 순진한 태오는 맹세컨대 아무런 상상도 안 하고 있었다.
망측하게 생긴 토끼 의상을 보고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걘 걸레로도 못 쓸 옷을 대체 왜 줬지?’뿐이었다.
하지만 황급히 옷을 숨기려 하는 나봄의 새빨간 얼굴을 보자, 그제야 뒤늦게 파악된 소라의 의도.
너 입으라고 만든 옷이었구나. 우리의 신혼여행 밤에 니가 이 옷을…….
생각이 거기까지 흘러가자.
“하여간 채소라도 참 주책이야. 이걸 어떻게 입으라고…….”
두리번거리는 눈앞의 나봄이 조금 색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 입고 있는 수수한 옷이 아닌 채소라표 토끼 의상을 입은 모습으로.
그와 동시에 터질 듯이 뛰는 심장과 활화산처럼 달아오르는 몸.
“얼른 옷 입어. 해 지기 전엔 나가야지.”
그런 그의 상태를 알 리 없는 나봄은 토끼 옷을 가방에 쑤셔 넣으며 말했다.
그러나 태오는 가방 문을 닫으려는 그녀를 뜨거운 손으로 붙잡았고, 이미 달뜬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나 갑자기 나가기 싫어졌는데…….”
“응?”
“토끼 여왕님이랑 이 방에서 놀다 가면 안 되나?”
흑심 섞인 질문과 함께 그녀의 허리를 휘어 감는 손끝.
그 노골적인 손길이 스친 나봄의 등골에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아났다.
바다가 보고 싶어서 하와이에 왔는데. 이제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아이, 참…… 간지럽게.”
갑자기 아름다운 와이키키 해변보다 바로 뒤편을 돌아보고 싶어졌다.
가만히 있어도 섹시한 그 남자의 얼굴은 알맞게 달궈진 지금이 가장 절경일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