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나랑 같이 살자.
2018.04.06.
“아, 쪽팔려.”
행사가 열리는 호텔 앞, 한적한 정원.
벤치에 자리를 잡은 태오가 괜히 얼굴을 문지르며 말했다. 그와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앉아 있던 나봄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그렇게 쪽팔려?”
“그냥, 너무 수선 떨었던 것 같아서.”
“…….”
“그리고 또…… 너한테 상의도 없이 퇴사 얘기 꺼낸 것도 왜 그랬나 싶고.”
그리 말하는 태오는 퇴사 결정을 후회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제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고 나니, 이 상황에 대해 하나도 몰랐던 나봄이 뒤늦게 걸려 오는 모양이다.
나봄은 그런 태오를 가만히 바라보았고, 이내 정면으로 시선을 두었다.
“올바른 결정 내렸으면 됐지. 나한테 상의하겠다고 시간 끌 거 뭐 있어.”
그런 뒤 꺼내 놓는 목소리는 태오의 걱정과 달리 담담했다.
이런 반응이 나올 줄 몰랐던 태오는 얼굴을 가렸던 손을 치우고 움츠러든 목소리로 말했다.
“나 우드레일 그만두면 백수야.”
“알아.”
“그래서 장인어른이 마음에 안 들어 하실 수도 있어.”
“아빠도 너 능력 있는 거 알고 계셔서 별걱정 안 하실걸?”
“회장이랑 대판하고 쫓겨난 거라서 이직도 힘들 텐데…….”
딱 거기까지 얘기한 순간.
“……뭐? 회장님?”
“어?”
“너 차준 오빠가 아니라 우드레일 회장님이랑 대판한 거였어?”
뜻밖에 사실에 놀란 나봄이 태오를 향해 고갤 돌리며 물었다. 자신이 괜한 소릴 했다는 걸 깨달은 태오는 당황한 얼굴로 고갤 저었다.
“아…… 아니.”
하지만 감출 수 없이 드러나는 그의 불안감은 나봄의 확신에 힘을 더했다.
“맞구나. 이 사달이 난 게 다 회장님 때문이었어.”
점점 찌푸려지는 그녀의 미간은 얼핏 분노와 비슷했다. 그런 그녀를 처음 보는 태오는 점점 더 난처해져 갔다.
그녀가 걱정할까 봐 알리지 않고 숨겨 온 일이 우리의 첫 싸움에 불씨가 될 줄이야.
“나봄아, 그게…….”
“대체 회장님이랑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직까지 걱정을 해? 저번에 내가 회사 문제 걱정했을 땐 괜찮다고 하더니 사실 괜찮은 게 아니었구나.”
“아니야, 괜찮……”
“그런 소리 하지도 마. 지금 프로젝트에서 혼자 쫓겨나 있는 것 자체가 괜찮지 않았고, 버티지도 못했다는 얘기잖아.”
나봄이 날카롭게 파악한 상황은 구구절절 정답이었다.
그녀의 앞에서 그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태오는 더더욱 면목이 없어졌다.
그래서 하려던 변명을 모두 집어 넣고.
“……미안.”
시선을 발끝으로 툭 떨궈 둔 채 부질없는 사과만 내뱉으니.
“단태오, 고개 들어.”
나봄이 단호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어느 때보다도 가라앉은 그녀의 분위기에, 태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그렇게 무서운 모습을 하고 나봄이 내뱉은 말은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누가 고개 숙이고 사과하래?”
“……어?”
“니가 뭘 잘못했다고 그렇게 주눅 들어 있어. 고개는 왜 자꾸 숙이고.”
여전히 눈빛이 날카롭고 표정이 싸늘한 걸 보면 화가 난 것 같긴 한데, 가만히 듣고 보니 그 대상은 내가 아닌 것만 같다.
지금 내 짐작이 맞다면…….
“한나봄, 그럼 너 지금…… 나 때문에 화내 주는 거야?”
태오는 일렁이는 눈빛을 띠고 물었다.
나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분한 감정이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럼 너 때문에 화내지 누구 때문에 이렇게 화를 내겠어? 대기업 총수가 고작 핀트 어긋났다고 프로젝트에서 사람을 내쫓아? 회장이 나서서 그러는 건 정말 너무했잖아.”
“…….”
“회장 하나 때문에 니가 이 꼴이 된 거면 더럽고 치사해서라도 진작 사직서 냈어야지. 너도 이렇게 비상식적인 회사 필요 없다고 니가 먼저 때려 치고 나왔어야지!”
“…….”
“맨날 똑똑한 척 하더니! 가만 보면 바보야, 진짜!”
점점 격해지나 싶더니 기어이 커져 버리고 만 그녀의 언성.
애초부터 회장이 문제였다면 그가 무슨 짓을 해도 수습이 되질 않았을 텐데, 어째서 그는 다 괜찮다고 버틸 수 있다고 말했던 건지.
퇴직을 선언하자마자 장인어른의 반대부터 걱정했던 걸 보면, 그의 속마음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지만 나봄은 그게 더 속상했다.
우드레일 현장팀장이든, 동네 백수든, 다 같은 단태오인데 내가 결혼이라도 무를 줄 알았나.
“내가 진짜 너 때문에…….”
나봄은 분통이 터진다는 표정으로 속상함을 드러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봄아.”
별안간 태오의 두 팔이 나봄의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아니, 안겨 들었다. 나봄의 목덜미에 얼굴을 포옥 파묻은 채.
“뭐, 뭐야. 나 지금 한창 화내 주고 있는데.”
갑작스러운 애정 표현에 당황한 나봄은 어정쩡하게 안긴 자세로 말했다.
그러나 태오는 그런 그녀를 더욱 꽉 옭아맸고.
“사랑해.”
“…….”
“다른 때도 사랑하는데 지금은 더 사랑해.”
먹먹한 음성으로 감격에 겨운 고백을 내뱉었다.
어린 애처럼 안겨 드는 그가 싫진 않았던 나봄은 허공에 멈춰 있던 손을 움직여 그의 넓은 등을 감싸 안았다.
“진작 이렇게 기대면 얼마나 좋아.”
이윽고 흘러나오는 그녀의 애정 어린 불만.
나봄은 보이지 않는 상처들로 가득할 그의 등을 조심스레 어루만져 주었다. 따스하게 스며드는 그녀의 온기는 태오의 가슴까지도 뭉근하게 데워 놓았다.
덕분에 더욱 뜨거워진 마음으로 태오는 어느새 푹 젖어 버린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누구한테 기대 본 적이 없어.”
“응?”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주변에 사람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그냥 내 스스로가 나한테 바라는 게 너무 많았어.”
“…….”
“그래서 힘들어 죽을 것 같은데도 다 괜찮은 척하고, 무조건 버텨 보겠다고 발버둥 치고…… 내 한계를 내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렇게 살아왔어.”
누구에게도 꺼내 놓은 적 없는 고백.
그렇게 열심히 살아서 남는 게 있었냐, 누가 묻는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고민해 볼 필요도 없이 ‘아니’였다.
나이가 들고 마주해야 할 세상이 점점 커질수록 그가 감당하지 못할 일들은 늘어 갔고, 그가 버티지 못할 상황들도 많아져 갔다.
사실은 잠시 쉬었다 가고 싶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지금껏 단 한 번도 스스로에게 휴식을 주지 못했다. 지쳐 있는 나를 내가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동안 나도 내 편이 아니었는데…….”
“…….”
“너라도 내 편을 들어 줘서 고마워.”
그렇게 인생을 전쟁 치르듯 살아온 태오에게 같이 싸워 주고 화내 줄 아군이 생겼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뜻깊은 일인지, 아마 나봄은 온전히 알지 못할 거다.
하지만 태오는 오늘 그녀가 자신이 여겨 왔던 것보다 더 소중하고,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내 편과 함께 하고 있는 거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도 특별한 오늘은 너에게 내 마음을 전하기 딱 좋은 날.
“잠깐만…….”
무언가를 결심한 태오는 나봄을 끌어안고 있던 두 팔을 풀었다.
그러고는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고 뒤적였다. 나봄의 호기심 어린 눈동자가 그의 손끝으로 향했다.
“이거 줄 때 니가 감동 받아서 울게 하고 싶었는데…….”
“…….”
“왜 내가 울면서 주냐. 쪽팔리게.”
그의 울음기 섞인 자책과 함께 꺼내지는 건 예전에도 본 적 있던 반지 케이스였다.
그의 프러포즈를 망쳐 버렸던 탓에 제주도에선 받지 못했던 그의 약혼 선물.
“태오야…….”
나봄은 일렁이는 눈빛으로 케이스를 바라보았다.
태오는 그런 그녀 앞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고, 케이스를 열어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보이며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한나봄.”
울음기가 가시지 않아서 더욱 간절하게 느껴지는 그의 눈빛.
그렇게 그녀가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태오는 오래 전부터 하고 싶었던 고백을 건넨다.
“나랑 살자.”
“…….”
“나 살면서 적어도 너 하나는 고생 안 시킬 자신 있으니까. 아니, 죽을 때까지 여왕님처럼 모셔 줄 테니까.”
“…….”
“나랑 같이 살자. 혼인신고서 쓰고.”
이미 내가 먼저 한 청혼이고 진작 했던 맹세인데, 니가 말하니까 왜 이리도 느낌이 다른 건지.
태오의 프러포즈는 너무나도 본인스러워서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분명 감동받아서 울게 만든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렇게 눈물 흘리며 기뻐하기에는 우느라 새빨개진 너의 코가 너무 귀엽잖아.
태오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단 나봄은 환히 웃는 얼굴로 그의 젖은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대답 대신 달콤한 입맞춤을 건넸다. 가득하다 못해 쏟아지는 애정을 듬뿍 담아.
촉촉한 그녀의 입술은 태오의 온몸에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아나게 만들었다.
그 달콤함에 녹아든 태오는 가만히 눈을 감았고, 따듯하게 배어드는 그녀의 숨결을 느꼈다.
평소 같았으면 시간을 멈춰 놓고 싶을 만큼 소중한 순간.
그러나 태오는 이대로 시간이 흘러가도록 놔두기로 했다.
오늘은 우리가 함께할 수많은 날들 중, 겨우 첫 번째 날일 테니.
“내가 더 사랑해, 태오야.”
입술을 뗀 나봄이 속삭이듯 말했다.
벌써 몇 번째 듣는 고백이었지만 마음의 크기만큼은 여전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확실히 장담해. 니가 아무리 날 사랑한다해도 내 마음을 따라오려면 한참 멀었어.
왜냐하면 난 지금 너 때문에 가슴이 아려올 정도로 설레서, 눈물조차 그치지 못하고 있는걸.
* * *
“좋은 아침입니다.”
평소보다 살짝 늦게 출근한 유리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어쩐지 사무실보다 팀장실 부근이 웅성거린다 싶더니, 직원들은 대부분 그쪽에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무슨 일 있어요?”
유리는 제 자리로 향하기 전, 그 근처에 잠시 발길을 멈춰 세우고 물었다.
그러자 한 직원이 그렁그렁한 눈가를 매만지며 대답했다.
“단태오 씨 사직서 내고 가셨어요.”
“……뭐?”
“안 그래도 어제 런칭 파티 때 퇴사하는 방향으로 결정할 것 같다고 하시더니…….”
태오의 퇴사 소식은 그리 느닷없진 않았다.
회사 분위기는 이미 그가 숨도 못 쉴 정도로 삭막해져 버렸고, 그런 그를 바라봐야 하던 유리도 차라리 그가 그만두고 나가기를 바랐었으니.
하지만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은 예상과 달리 유리의 마음에 찌릿, 하는 통증을 일으켰다.
갈 거면 나한테 말이라도 해 주고 가지. 마지막으로 인사할 새도 없이 그냥 가 버리냐.
“정나미 없는 새끼…….”
서운함을 참지 못한 유리는 작은 욕설을 내뱉었다. 상대도 없이 해 보는 괜한 화풀이였다.
그러나 분해 하기에는 너무나도 옳은 결정이라서, 유리는 제 감정을 추스르고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잘됐지, 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걘 여기보다 더 나은 곳으로 가야 해.”
내가 따라나설 수 없는 곳이라 해도 나는 그를 더 나은 곳으로 보내 줘야 한다.
“맞아요, 단 팀장님 능력은 모두가 알아주잖아요.”
“그렇지. 걔야 뭐…….”
“그나저나 파트장님이 너무 섭섭하시겠어요. 단 팀장님이랑 가장 친하셨잖아요.”
직원은 한때 태오의 단짝이었던 유리를 떠올리며 말했다.
비록 요즘 들어 둘 사이의 분위기가 서먹해지긴 했었으나, 회사가 태오를 도태시킬 때 그걸 제 일처럼 화내 줬던 유일한 사람은 유리였다.
유리의 섭섭함이야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도 없었지만 그녀는 일부러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섭섭할 거 뭐 있나? 지가 지 인생 찾아서 떠나겠다는데.”
그러고서 내뱉는 거짓말은 그럴싸하게 들릴 만큼 담담했다.
그건 얼핏 평소의 쿨한 척으로도 보일 수 있는 모습이었으나, 사실 유리는 지금 나름대로 연습을 하는 중이다.
그녀가 눈으로라도 쫓을 수 없게 훌쩍 떠나가 버린 그를 슬슬 마음에서도 떠나보내는 연습을.
“그럼 오늘 하루도 수고해. 이따 커피라도 같이 마시자.”
유리는 끝까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태오를 추억하는 직원들의 곁을 떠나왔다. 제자리로 향하는 발걸음엔 의식적으로 힘이 실려 있었다.
한동안은 이렇게라도 멀쩡한 척 해 봐야지. 니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는 짓도 이젠 그만해야지.
너 하나를 지워 내려는 것뿐인데 뭐 이리도 해야 할 게 많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잘 지내야지.
그렇게 너 없이도 괜찮아져야지.
숱한 다짐을 반복하며 유리는 자리에 도착했다.
외투를 벗어 의자에 걸어 두고 가방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지친 몸을 겨우 앉혀 놓았더니 벌써 지치는 기분이었다. 퇴근 시간은 아직 8시간이나 남았는데 큰일이다.
이럴 때 필요한 건 커피였다.
카페인으로 복잡한 머릿속부터 깨우기로 결심한 유리는 책상 구석에 놓아두었던 동전 통으로 손을 뻗었다.
그때.
“어……?”
오자마자 가방으로 가리는 바람에 미처 보지 못했던 무언가가 그녀의 눈에 띄었다.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초콜릿 한 봉지.
누가 보냈는지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포스트잇에 적힌 전형적인 어른 글씨의 주인을 그녀가 못 알아볼 리 없었다.
“단태오…….”
유리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초콜릿 봉지를 집어 들었다.
[담배 좀 끊어라. 폐로 연필 만들 일 있냐. -태오]
농담 섞인 그의 충고는 떠나는 사람의 작별 인사치고는 퉁명스러웠다.
하지만 너무나도 단태오다웠다. 눈으로 읽은 글씨가 귓가에서 그의 음성으로 들려올 만큼.
“하하…….”
유리는 서러운 마음도 잊은 채 저도 모르게 실없는 웃음을 흘려보냈다.
아무리 감정에 젖어 보려 해도 역시 너랑 얽히면 도무지 진지해질 수가 없다.
하지만 덕분에 가슴속의 쓰라림이 무뎌진 지금, 문득 내가 널 좋아했던 이유가 떠올랐다.
‘단태오, 담배 좀.’
‘와, 진짜 양심 없네. 담배 피러 나오면서 담배를 안 들고 오냐. 애초부터 들러붙을 생각이었구만.’
‘하나 가지고 치사하게.’
‘돗대라서 그런다. 한 갑으로 갚아라.’
매사에 까칠하고 버릇없던 너는.
‘자, 이거.’
‘이건 뭐야?’
‘사탕.’
‘사탕인 건 아는데, 왜 이렇게 많이 줘.’
‘그거 다 천천히 녹여 먹고 기어 들어와.’
‘술 취한 노인네들 진상 짓 좀 멈추면 데리러 나올게.’
가끔씩 보여 주던 배려가 몹시도 따듯했던 사람이라서.
좋아하지 않고선 배길 수가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어서 조금도 아프지 않은 작별인사를 받은 지금 이 순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