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우린 모두 잘될 거예요
2018.04.02.
“단태오 대리님, 얼른 무대로 올라와 주세요. 이렇게 좋은 날에 한 말씀 하셔야죠.”
나봄이 태오의 이름을 불렀다.
그와 동시에 몰려드는 사람들의 시선은 태오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한동안 두렵게 느껴 왔던 그들의 눈동자.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순간만큼은 가슴이 뛰었다. 마치 처음부터 내가 화려한 연회의 주인공이었던 것처럼.
“하아…….”
태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주제 파악도 못 하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내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내가 나서도 되는 자리가 아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막아서는 건 순전히 방어기제 때문이었다. 태오는 여기서 더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단태오 대리…… 아니, 단태오 팀장님.”
태오를 부르는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척이 가까워지는 쪽으로 고개를 틀자 일렁이는 눈에 담겨 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김 대리였다.
이제 ‘Lily’ 프로젝트의 팀장이 된 만큼 나봄의 자리 마련이 불편했을 그의 표정은 아니나 다를까 난처함이 가득했다.
그가 자신을 중재하러 왔다고 생각한 태오는 서둘러 김 대리를 안심시키려 했다.
“소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습니다. 전 그저…….”
“아니요, 뜯어 말리러 온 거 아니에요.”
하지만 태오가 변명을 다 꺼내 놓기도 전에, 김 대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고.
“단 팀장님이 올라가세요.”
“네……?”
이윽고 예상치 못한 제안을 건넸다.
“그동안 단 팀장님 배신하고 불의에 침묵한 주제에 멋있는 척하는 것 같아 염치없지만…….”
“…….”
“오늘은 저 대신 단 팀장님이 올라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이 프로젝트의 구 할을 책임졌잖아요.”
이런 자리에서 김 대리가 같은 편이 되어 줄 줄은 몰랐던 태오의 눈빛이 잔잔하게 흔들렸다.
“김 대리님…….”
김 대리는 그런 태오를 이끌듯 무대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런 뒤 흘려보내는 한 마디는 움츠러든 태오의 마음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팀원들도 비슷한 생각일 거예요. 그러니까 올라가서 인사라도 해 주세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다르게 느껴지는 나를 향한 시선들.
모두가 나를 기피하는 줄 알았는데. 내 존재를 껄끄럽게 여기는 줄 알았는데.
다시 둘러본 직원들의 눈동자는 그런 날카로운 감정들을 머금고 있는 게 아니었다.
대놓고 바라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아예 외면해 버리지도 못하는 그들의 눈동자는 그간 차마 드러내 놓지 못했던 죄책감과 걱정, 그리고 연민이 가득했다.
그동안 나를 보며 무슨 말들을 삼켰는지, 사실은 어떤 말을 전해 주고 싶었었는지.
아주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 같아.
그런 당신들에게 난 어떤 대답을 들려줘야 하는지도.
“하아…….”
두려움뿐이던 마음을 정리한 태오는 고개를 떨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뒤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두니, 태오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당당한 빛을 띠고 있었다. 언제 움츠러들었었냐는 듯 곧게 펴진 어깨는 나약했던 생각들을 흔적 없이 감추어 주었다.
이렇게 심신을 재정비한 태오가 바라보는 곳은 나봄이 그를 위해 마련해 준 무대 위 단상이었다.
이제 보니 굿바이 인사를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제격인 장소.
그걸 보자 더욱 더 결심이 섰는지, 태오는 크게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앞을 향해 나아가는 그의 모습은 패기롭던 시절의 단태오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서, 그의 걸음을 바라보는 김 대리의 입꼬리가 은은하게 올라갔다.
그를 향한 안도감이 묻어 나오는 다정한 미소였다.
.
.
.
“아아.”
낯선 표정으로 무대 위에 올라선 태오가 목소리를 냈다.
순간 삐익― 하고 울려 퍼지는 마이크 노이즈는 태오의 미간을 살짝 찌푸려지게 했다.
하지만 태오는 이내 표정을 정리하고는 조심스레 입술을 뗐다.
“우선…… 여러분들 앞에 서게 될 줄 모르고 좀 더 격식 있게 차려입지 못한 점, 너그럽게 양해 부탁드립니다. 저는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 소속 단태오 대리입니다.”
짝짝짝―
크지 않은 박수 소리가 무대 아래편에서부터 들려왔다. 흘깃 눈길을 준 그곳엔 함께 일했던 직원들이 애타게 태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오는 그들에게 살짝 입꼬리를 들어 웃어 주었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고서 마저 이어 보내는 목소리는 무척이나 조곤조곤했다.
“‘Lily’ 프로젝트는 제가 처음으로 맡았던 프로젝트였습니다. 처음엔 성격이 좋지도 않은 제가 팀장의 역할을 잘할 수 있을까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팀원들이 제 성질 머리를 잘 견뎌 준 덕분에 무사히 런칭까지 왔네요.”
태오의 농담 섞인 그 말에 직원들은 작게 웃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미소였다.
그 표정에 한결 긴장이 풀어진 태오는 보다 부드러운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순전히 가구 만드는 게 좋아서 이 업계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마주한 현장은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더 치열하고 고된 곳이더군요.”
“…….”
“입사 첫날 현장팀 식구들이 여기로 자원한 제게 보였던 반응들이 이해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다들 안타까워하는 분위기였잖습니까.”
그 말을 하며 태오는 처음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에 발을 들였던 순간을 떠올렸다.
‘안녕하십니까. 신입 사원 단태오입니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내뱉은 인사에.
‘지옥에 온 걸 환영하네!’
‘본사 붙었는데 여기로 직접 자원해서 온 거라며? 대체 왜 그랬어?’
‘고생이 체질일 수도 있는 거지! 하하!’
이곳 사람들은 살가운 악담으로 답해 주었다.
그게 웃자고 하는 농담인 줄도 몰라서 정색을 하고 서 있었더니, 당시 바로 위 기수였던 김 대리는 태오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에이, 그런 얘길 뭐하러 해! 그나저나 참 잘생겼다. 모델로 취직한 건 아니지?’
‘네, 아닙니다.’
‘바로 정색하는 것 좀 보게! 단태오 씨 제법 성깔 있구나? 하하!’
참 실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낯가림 심한 태오를 첫날부터 제 가족처럼 품어 주었던 고마운 사람들.
“솔직히 살짝 후회할 뻔했습니다. 입사 동기가 본사에서 매일 같이 칼퇴근할 때마다 ‘대체 난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길 왔지’ 싶기도 했습니다.”
“…….”
“하지만 지금 와서 결론을 내려 보자면 역시 현장팀에 오길 잘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팀원으로 둘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요.”
원래 좋은 건 없어 봐야 깨닫는다고 했던가.
지난 한 달간, 팀원들과 동떨어져 홀로 지냈던 태오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수선스러운 분위기가 나와는 맞지 않아서 멀리 했던 사람들이었고, 사적으로 가까워지기엔 부담스러운 사람들이었지만.
그렇게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스레를 떨어 주고, 귀찮도록 말을 걸어 주었기 때문에 적어도 외로움을 느낄 새는 없었다는 사실을.
“그 사실을 조금 늦게 깨달았네요.”
귀여운 구석이 조금도 없는 태오가 현장팀에 첫날부터 잘 적응했던 건 순전히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줬던 팀원들 덕분이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큰 프로젝트의 팀장까지 맡을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능력을 스스럼없이 인정해 주었던 팀원들 덕분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혼자가 아닌 함께였기에 가능했던 지난날의 성과들.
“‘Lily’ 프로젝트가 막을 내린 지금에 와서야 내가 어떤 사람들과 함께였는지 알아 버린 것 같아서…….”
“…….”
“사실 그게 많이 안타깝습니다. 이렇게 미련이 남을 줄 알았으면 술자리든, MT든 좀 더 많이 갈걸.”
태오의 말엔 잔잔한 웃음기가 스며 있었으나, 무대 아래 팀원들을 내려다보는 눈빛엔 씁쓸한 미련이 가득했다.
일렁이는 그의 눈동자는 더 진솔하게 풀어내지 못한 그의 속마음을 여실히 드러내 주는 듯하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팀원들의 눈빛도 이내 축축이 젖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왕 그들의 앞에 선 거 끝까지 담담하고 씩씩하게, 태오는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그동안 믿고 따라와 주셔서 고마웠습니다.”
“…….”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그 말을 하며, 태오는 끝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사실은 조금 더 버텨 보려 했다. 악착같이 붙어 있어 보려 했다.
조금 더 현장에서 함께할 수 있기를, 다시 내가 머물 자리가 생겨나기를 기다려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늘 이 무대 위에 올라, 나를 보는 당신들의 눈빛을 보며 깨달았다.
버티는 것도, 맞서 싸우는 것도 당신들과 나, 우리 모두에게 못할 짓이라는 걸.
말을 마친 태오는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팀원들을 향해 허리를 숙여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짝짝짝짝짝―!
곧바로 터져 나오는 박수 소리는 처음보다 훨씬 커져 있었다.
이로써 마지막만큼은 떳떳하게 맞이할 수 있게 된 우리.
남은 일은 이대로 각자의 자리를 찾아 떠나는 일뿐이다.
그토록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이별이 이제야 겨우 쓰라림 없이 받아들여졌다.
* * *
한창 행사가 진행되고 있는 연회장 밖 로비.
“단태오!”
나봄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팀원들과 나름 마무리도 잘했겠다, 일단 밖으로 나가 있으려 했던 태오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또 어디 가게! 나한테 말도 안 하고!”
그러자 높은 구두를 신고서도 빠르게 달려오는 나봄은 살짝 화가 난 얼굴이었다. 그렇게 다가와 태오의 팔을 꽉 붙드는 손아귀엔 제법 힘이 실려 있었다.
“널 두고 어딜 가겠냐. 밖에서 기다리려고 했어.”
태오는 그런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장난기를 섞어 말했다.
하지만 나봄은 그래도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다그치듯 따져 물었다.
“프로젝트에서 아예 쫓겨났다는 얘기 왜 안 했어?”
“그게 뭐 좋은 얘기라고 하냐. 다 해결되면 말하려고 했어.”
“해결 안 되면. 나는 끝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거고?”
“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몰랐잖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힘들어하는 동안 나만 바보같이 모르고 있었잖아. 미안해지게…….”
나봄의 화는 어느새 자책이 되어 있었다.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는 이기적인 이유로 가장 솔직하게 대하지 못했던 사람.
태오는 그녀가 왜 화내고 있는지, 자신은 무엇을 잘못했는지,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이렇게 화를 내는 것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아니었다.
그런 그녀를 달래 주고 싶었던 태오는 나봄의 손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그러고는 뒤늦은 사과를 꺼내 놓았다.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
“…….”
“죄 없는 니가 미안해지게 만든 건 더 미안해.”
태오의 나긋한 목소리에 나봄은 더욱 더 마음이 아려 오는 듯했다.
그동안 혼자 힘들어했었다는 걸 알고 나니까, 어쩐지 부쩍 지쳐 보이는 것 같아.
나봄은 한결 누그러진 눈빛으로 태오를 올려다보았다. 사실 그녀는 지금 불만을 드러내는 것보다 더욱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나는 니가…….”
하지만 그 말을 꺼내 놓기가 무섭게.
“단 팀장님!”
우렁찬 고함이 연회장 입구에서부터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부름에 놀란 태오와 나봄이 동시에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혹시나 그를 놓칠까 싶어, 빠르게 달려오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Lily’ 프로젝트를 함께했던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의 소속 팀원들이었다.
한 달 만에 다가와 준 그들을 본 태오의 눈동자가 옅게 떨려 왔다.
“어? 현장팀 사람들이잖아? 아, 안녕하세요!”
나봄은 금세 가까워진 사람들에게 서둘러 인사했다. 하지만 막상 대놓고 그들을 마주한 태오는 고갯짓도 하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무대 위에선 그렇게나 말을 잘해 놓고선, 막상 사적으로 대해야 될 때가 되니 긴장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런 태오의 모습엔 이골이 난 김 대리는 태오의 앞에 멈춰 서자마자 넉살을 부렸다.
“단 팀장님, 말도 없이 와서 말도 없이 가는 거예요?”
“아…….”
“사람이 왜 그래, 대체. 혼자만 인사하면 다야?”
정말 오랜만에 들어 보는 그의 친근한 목소리.
태오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렇게 편히 대화 나누는 게 대체 뭐가 그리 힘들어서, 우린 그동안 살얼음판처럼 지냈던 걸까.
“단 팀장님, 퇴사하실 거예요?”
함께 있던 직원들 중 한 명이 그렁그렁 눈물을 머금은 채 물었다.
“아유, 아라 씨 아까부터 단 팀장님한테 미안해 죽겠다고 계속 웁니다. 이대로 퇴사하면 자기는 어떻게 하냐고.”
그녀를 핀잔하는 김 대리도 의미심장한 인사를 건넨 태오가 정말 퇴사할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이 분위기로만 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그때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아무래도 퇴사하는 방향으로 결정 내릴 것 같습니다.”
태오는 알고 있다.
돌아가면 회사가 밀어내는 자신의 자리는 여전히 없을 테고, 그 자리를 이들 중 한 사람이 억지로 넘겨받게 될 테고.
그럼 또 모두가 상처 입는 전개가 또 다시 반복될 것이라는 걸.
“그래도…… 저희가 뭐라도 해 볼 테니까…….”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신입이 용기를 내서 태오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태오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가로저었고, 한결 편안해진 목소리를 이어 붙였다.
“누가 뭘 한다고 해서 나아질 문제는 아니잖습니까.”
“…….”
“제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자책하는 사람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단 팀장님…….”
순간 먹먹해지는 팀원들의 눈빛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들도 태오와 마찬가지로 하고 싶은 말은 많으나, 그걸 다 꺼내 놓기는 망설여지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숙연한 분위기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던 태오는 잠시 고개를 숙여 표정을 정리했고, 이내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해집시다.”
그러고선 진심 어린 바람을 내비치며 손을 내밀자, 대표로 김 대리가 나서서 그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
“네…… 그럽시다, 우리.”
도로 젖어 든 목소리는 차마 숨기지 못했다. 억지로 하던 밝은 척도 더는 무리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태오는 그런 그를 굳이 진정시키려 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않아도, 다음번엔 한결 더 기쁜 얼굴로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맞잡았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한동안 열정을 나누었던 이들의 입가엔 하나같이 잔잔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걸 보고 나니, 가슴을 답답하게 짓누르던 불안감도 차츰 잦아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조금도 불안하지 않아졌다.
뭐 하나 제대로 정해진 것 없는 미래지만, 결국엔 모두 다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당신들이 떠나는 나의 발걸음을 축복하며 배웅해 주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