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초대받지 못한 주인공
2018.03.30.
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단태오 팀장님…… 아니, 단태오 대리 자리는 이쪽입니다.”
태오 대신 팀장직에 오른 김 대리에게 개인 사무실을 내어 주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바깥 자리로 내몰리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태오는 커다란 박스에 챙겨 온 제 짐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선 주변 분위기를 살피려 눈길을 돌리자, 태오를 몰래 지켜보고 있던 직원들의 시선이 뿔뿔이 흩어졌다.
마치 눈을 마주친 사람은 돌로 변하게 한다는 메두사가 된 기분이다.
“사무실 행거에 걸린 옷들은 오늘 퇴근하면서 들고 가겠습니다.”
태오는 그런 그들에게서 눈길을 돌리고,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천천히 챙겨 가셔도 됩니다. 그런데요. 단 팀, 아니. 단 대리.”
“네. 말씀하세요.”
“내일 ‘Lily’ 프로젝트는 그래도 참석하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
“마무리는 이렇게 되었지만…… 그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총괄했던 사람은 단 대리니까.”
김 대리가 꺼낸 ‘Lily’ 프로젝트 얘기에 태오의 안색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이미 내 손을 떠난 일.
미련을 끊고는 싶지만 워낙 열정을 쏟아부었던 프로젝트라 타인에게 넘겨주는 게 쉽지는 않다.
하지만 지금 와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건 내일 있을 ‘Lily’ 프로젝트 런칭 행사 때문에 온 직원이 바쁜 와중에, 저 혼자만 아무 일도 배정받지 못한 걸 보면 알 수 있다.
“내일 스케줄 봐서요.”
마음 같아선 너 같으면 거길 가겠냐며 화를 내도 시원찮았지만, 그랬다간 휘청거리는 자신이 들킬까 봐 애매모호한 대답을 했다.
그러나 곧바로 잘못 대답했음을 깨달았다.
나 일거리가 없는 건 현장팀 전부가 알고 있을 텐데. 차라리 말을 하지 말걸.
“네, 네. 그럼 오늘도 수고하세요. 단태오 대리.”
김 대리는 더 이상 할 얘기도 없는지 어색한 인사를 남겨 두고 곁을 떠났다.
그제야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완벽히 혼자가 된 태오는 조용히 제 자리에 앉았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자리에 짐을 풀어 놓는 것이었으나, 정리한답시고 수선을 피웠다간 사람들의 눈에 띌까 싶어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그래서 꺼진 모니터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그때.
“단태오.”
바로 옆에서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눈에 들어오는 사람은 착잡한 표정의 유리였다.
“허유리…….”
태오는 이 순간 누가 다시 와 줬다는 것에 안도하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런 그와 달리 돌연 얼굴에 한기를 띤 유리는.
“회사 때려 쳐라, 그냥.”
“…….”
“나이 처먹고 동료 따돌림이나 시키는 놈들 사이에서 굳이 버티고 있을 필요가 뭐 있어.”
그녀의 성격대로 가감 없이 거친 말을 쏟아 낸다. 얼어붙은 태오에게 잘 부탁한다는 말 한 마디를 건네주지 않는 주변 직원들을 훑어보며.
태오의 속눈썹이 일순 가늘게 떨려 왔다. 하지만 이내 겁먹은 듯한 눈동자로 주변을 살피는 그는 확실히 패기 넘치던 예전과 달랐다.
이래서 사람을 가장 괴롭게 만드는 건 폭력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하나 봐.
몇 주째 이 많은 사람들에게 투명인간 취급만 당하다 보니까, 그 드세던 사람이 보이지도 않게 흐려져 버렸잖아.
유리는 그런 태오가 답답했다.
비록 한때는 그가 사랑으로 인해 좀 더 힘겨워지기를. 더욱 더 비참해지기를.
그래서 바로 곁에서 비슷한 사랑을 하고 있는 나를 이해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었지만, 그런 욕심을 버린 지금은 다시 예전처럼 강한 빛을 띠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유리는 그 바람을 담아 태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고는 간절한 진심이 물든 한 마디를 나직이 내뱉었다.
“제발…… 너답게 맞서 싸우기라도 해.”
나답게라…….
나답게 다 때려 부수고 나오면 뭐가 좀 달라지려나. 그 사람의 미래만 괜히 불안해지게 만들 것 같은데.
태오는 밀려오는 회의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고, 고개를 돌렸다.
유리는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고, 이내 그의 곁에서 조용히 떠나갔다.
태오는 그제야 뒤늦은 한숨을 내쉬어 보려 했으나 꽉 막힌 숨통은 좀처럼 트이질 않았다.
가슴에 커다란 바위가 내려앉은 느낌.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데도 한 치 앞이 보이질 않는다. 꼭 안개가 자욱한 미로를 나 홀로 헤매고 있는 것 같다.
* * *
[태오야! 어디야? 나는 첫째 줄에서 맨 왼쪽 테이블 배정받았어.]
우드레일 ‘Lily’ 라인 런칭 행사가 열리는 연회장.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서 태오를 찾을 수 없었던 나봄은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것으로 벌써 세 통째.
그녀는 연회장에 도착해서부터 열심히 그를 찾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연락도 없이 약속에 늦을 사람은 아닌데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좀처럼 받아 주질 않았다.
이쯤 되니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하는 걱정들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나봄도 그의 회사 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니.
“한봄 도어락 한나봄 팀장님! 한나봄 팀장님 어디 계시죠!”
“네, 네! 저 여기 있습니다!”
“아, 바로 다음 순서가 협업사 대표 순서니까 준비해 주세요. 지금 무대 아래로 가시면 됩니다.”
하지만 걱정에 빠져 있기엔 현재 나봄의 상황이 너무나도 다급했다. 협업사들 대표로 무대에 오를 시간이 채 10분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씩씩하게 대답한 나봄은 서둘러 발표문을 챙겨 들었다.
그러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역시나 태오는 보이질 않았다.
이왕이면 그가 봐 줬으면 좋겠는데. 이러다가 내 순서가 다 지나가 버리게 생겼다.
“하아……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나봄은 보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무대 아래 행사 스텝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때.
“어? 김 대리님……?”
낯익은 얼굴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바로 태오와 함께 일하는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 소속 김 대리였다.
“아…… 나봄 씨. 아, 안녕하세요.”
태오가 내동댕이치듯 밀려난 자리를 대신 메운 처지인 김 대리는 나봄을 보자마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심적 여유가 없었던 나봄은 그의 반응을 곱씹지도 못했다.
“김 대리님, 여기 계셨네요? 안 그래도 현장팀 사람들이 안 보여서 찾고 있었는데.”
“그, 그냥 뭐…… 다들 발표 준비 때문에 정신없죠.”
“단태오 팀장님은 어디 계세요?”
그래서 대놓고 꺼내 놓은 질문.
김 대리의 옆에 있던 몇몇 직원들의 시선이 죄다 나봄에게로 향했다. 휘둥그레진 채 굳은 눈동자를 보니 꼭 못 할 말이라도 한 분위기였다.
그것만큼은 확실히 읽어 낼 수 있었던 나봄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왜 그러세요? 혹시 팀장님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그게…….”
순간, 그녀의 눈을 사로잡는 김 대리의 명찰.
그의 이름 옆에 따라붙은 직함은 ‘프로젝트 현장팀장’.
“팀장……?”
그제야 무엇이 잘못되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나봄의 눈빛이 옅게 떨려 왔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난처해하던 김 대리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간의 일을 설명했다.
“사실…… ‘Lily’ 프로젝트 주요 인사가 많이 바뀌었어요. 선우차준 본부장님은 회사를 아예 그만두셨고, 단태오 대리는 이 프로젝트에서 제외되었고.”
“…….”
“단 대리가 프로젝트 관련해서는 손 뗀 지 오래예요. 그래도 그동안 해 온 게 있으니까 런칭 행사는 꼭 참여하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안 오지 않을까…….”
차준의 퇴사에 대해선 그에게 직접 들었다. 그러나 태오의 해임은 들은 적도 없었다.
그와는 거의 매일 통화를 했고, 이틀에 한 번씩 데이트도 했었으나, 그는 늘 신이 난 표정만 짓고 있었을 뿐 이런 상황을 내색하지도 않았다.
“태오가…… 제 발로 관뒀나요?”
나봄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고개를 밑으로 툭 떨어트리는 김 대리는 온몸으로 대답하고 있다.
이것은 그의 선택이 아닌, 그가 가만히 당할 수밖에 없었던 시련이라는 것을.
‘나봄아, 내 얘기는 빼.’
때마침 일주일 전 들었던 태오의 말이 떠올랐다.
‘내가 신경 쓰여서 그래. 혹시나 괜한 오해라도 사면 너무 미안해질 것 같으니까…….’
그는 나봄을 위해서라 말했으나, 지금 떠올려 보니 그의 표정은 걱정보단 절망에 가까웠다.
‘너…… 아직 회사랑 분위기 안 좋은 거야?’
‘어?’
‘널 프로젝트에서 제외시키기라도 하겠대?’
그리 물은 순간 잠시 숨조차도 멈칫하던 너.
그때 고개조차 바로 끄덕이지 못하는 너를 보며 알아채 줬어야 했는데.
‘제외는 무슨 제외야. 내가 그런 거 당한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날 사람으로 보여?’
‘정말 별일 없는 거야?’
‘그래.’
‘프로젝트도 무사히 진행하고 있는 거 맞지?’
‘당연하지. 내가 팀장인데.’
내 앞에서 제대로 힘든 내색도 하지 못하게 널 몰아세우지 말았어야 했는데.
“태오가…… 그동안 많이 힘들었을 텐데…….”
나봄은 그의 아픔을 들여다봐 주지 못한 죄책감을 담아 흐린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그 말에 더욱 더 면목이 없어진 김 대리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깊은 한숨으로 내뱉었다.
태오는 어쩔 수 없었던 김 대리를 이해한다고 해도, 사실 그는 윗선의 압박에 못 이겨 함께하던 팀원을 배반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했다.
결국 모두가 상처뿐인 전장 같은 연회장.
“다음으로, 협력사 대표로 한봄 도어락 소속 한나봄 팀장의 기념사가 있겠습니다.”
그 안에 나봄의 이름이 울려 퍼졌다.
“한나봄 팀장님, 무대 위로 올라가세요!”
행사 진행 요원은 서둘러 나봄을 무대로 내보내려 했다. 나봄은 그제야 혼란스러운 정신을 똑바로 다잡았고, 손에 든 발표문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한나봄 팀장님!”
“네, 갈게요!”
그러고는 미련 없이 반으로 찢어 버렸다.
과감한 그녀의 행동에 김 대리는 놀란 눈으로 나봄을 바라보았으나, 무대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비장했다.
꼭 단태오 팀장의 전성기를 보는 것처럼.
* * *
안 오려고 했었는데.
괜히 꼴만 우스워질 것 같아서 얼굴도 안 비치려고 했었는데.
아침부터 계속 온 나봄의 연락을 차마 무시하지 못한 태오는 결국 ‘Lily’ 라인 런칭 행사 연회장에 발을 들이고 말았다.
굳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아도 의식되는 시선들.
태오는 그 안에서 최대한 조용히 머물다 가려 한다. 나봄에게 주기 위해 준비한 꽃다발도 모든 행사가 다 끝난 뒤에 은밀히 전해 줄 생각이다.
그래야 괜히 니가 나랑 엮이지 않을 테니.
어쩌다 자신이 이런 처지까지 되어 버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남들 앞에선 아무렇지 않아 보이고 싶었던 태오는 성큼성큼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동안 ‘Lily’ 프로젝트의 일원으로서 참 많은 것을 배웠고, 제 안에 잠들어 있던 열정을 다시 한 번 깨울 수 있었습니다.”
때마침 무대 위에 올라가 있는 건 세미 정장을 멋스럽게 차려입은 나봄이었다.
저 멘트는 기념사의 거의 마지막 부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늦어 버리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태오는 사람들과 조금 떨어진 테이블 뒤편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 당당히 서있는 나봄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동안 그렇게나 걱정하고 마음 졸여 하더니, 실전에서는 긴장한 기색도 없이 잘한다.
“하여간 한나봄. 잘할 거면서 엄살은…….”
태오는 자랑스러운 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한 마디를 조용히 내뱉었다.
그러고선 팔짱을 낀 채 보다 편안한 표정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데.
“오늘 이 자리는 함께 땀 흘려 주신 여러분들의 노고 덕분에 빛날 수 있었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앞으로도 함께 협력하여 성장해 나가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
“기념사를 마치며…….”
나봄이 돌연 하던 말을 중단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갑작스레 멈춰 선 자리엔 다름 아닌 오늘 이 자리에 초대받지 못한 손님, 단태오가 서 있었다.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찾았는지, 그를 발견하자마자 두 눈을 일렁이는 그녀.
태오는 그런 그녀를 향해 난 여기 있으니 걱정 말라는 뜻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자 나봄은 무언가를 참아 내듯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고, 다시 고개를 들어 끊어진 멘트를 마무리했다.
“기념사를 마치며 ‘Lily’ 프로젝트 기간 동안 함께 달려왔던 협력사들, 많은 도움을 주신 관계자분들…….”
“…….”
“무엇보다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에 리더로서 가장 뜨거운 열정을 나누었던 팀장님께 특별한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그 감사인사를 들은 태오의 입술 새로 안도의 한숨이 샜다.
기념사에서 빠진 자신의 이름 때문이었다.
일주일 전엔 그렇게나 넣겠다고 그렇게나 고집을 부리더니, 아무래도 내부 사정을 아는 관계자에게 저지라도 당한 모양이다.
아니면 내 이름을 언급하지 못할 분위기를 눈치채 버렸든가.
“아…… 끝나고 나서 왜 아무 말도 안 했냐고 엄청 혼나겠네.”
태오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체념 섞인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의 머릿속에선 벌써 이 사태를 아무렇지 않아 보이도록 포장할 변명들을 생각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마지막으로…… 이 자리에 모시고 싶은 분이 있습니다.”
다 끝난 줄 알았던 나봄의 말이 이어졌다.
“불참하시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저 뒤편에 계셨네요.”
이건 기념사에서도 본 적 없었던 터라, 태오의 눈빛은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그러자 그런 그를 똑바로 마주하며, 또박또박하게 꺼내 놓는 나봄의 목소리는 태오의 심장을 멎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Lily’ 프로젝트의 영원한 현장팀장, 단태오 대리님의 소감 발표가 있겠습니다.”
그녀가 태오가 서 있는 곳으로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옮겨 간 핀 조명은 어둠 속에 숨어 있던 태오를 환히 비추었다.
“한나봄…….”
놀란 마음에 그대로 얼어붙은 태오는 그녀의 이름만 작게 흘려보냈다.
“단태오 대리님, 얼른 무대로 올라와 주세요. 이렇게 좋은 날에 한 말씀 하셔야죠.”
이어지는 그녀의 재촉에,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그에게로 행했다.
한동안 두렵게 느껴지던 시선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이 순간만큼은 가슴이 뛰었다.
마치 처음부터 내가 화려한 연회의 주인공이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