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나를 믿고 따라와 줘
2018.03.26.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의례적으로 건네 보는 인사였다.
아무도 달갑게 받아 주지 않는 인사였으나 이거라도 해야 태오는 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의 모든 업무에서 소외당한지 벌써 3주째.
기존에 맡고 있던 일들이 정리될수록 태오의 역할은 점점 작아지고, 사람들 사이에서 도태되는 일도 잦아졌다.
곧이어 워크숍이니 뭐니 해서 단체 활동도 많아질 텐데 그곳에선 또 어떻게 버텨야 하나. 아니, 그전에 참여할 수나 있을까.
이런저런 고민들은 태오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헤집어 놓았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는 제 사무실 안으로 몸을 숨겼다.
“하아…….”
사무실 문을 닫고서야 태오는 긴 숨을 내쉬었다. 요즘 들어 더욱 차가워진 직원들의 분위기는 아무리 마이웨이인 그라도 견뎌 내지 못할 수준이었다.
이렇게 상황이 악화되는 이유는 태오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는 애써 의식하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의 행복을 내가 불행해진 원인으로 삼는 건 기분만 더 더러워져서 못 하겠다.
지금 태오에게 필요한 건 그저 이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 버틸 수 있는 힘이었다.
그런 힘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딱 한 명 있지. 오늘 점심은 나봄이네 회사 근처 가서 먹을까.
그렇게 뒤숭숭한 마음을 그녀로 메우며, 겉옷을 막 벗어 두었던 그때.
똑똑―
한동안 들린 적 없던 노크 소리가 울렸다.
“……네, 들어오세요.”
태오는 살짝 굳은 목소리로 방문자에게 답했다.
그러자마자 천천히 문을 열고 들어서는 사람은 다름 아닌 김 대리였다.
그의 표정은 평소보다도 더 어두워 보였기에, 나쁜 소식을 직감한 태오는 괜히 벗어 놓은 겉옷의 먼지를 툭툭 털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저기…….”
“듣고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이번 인사고과 때 말인데요…….”
그의 서두만으로도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는 뻔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태오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먼저 알아준다고 해서 나아질 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외면하는 태오 때문에 더욱 입을 열기가 불편해진 김 대리는 보다 주눅 든 목소리를 이었다.
“제가 ‘Lily’ 프로젝트 팀장 자리를 넘겨받게 될 것 같습니다.”
“…….”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릴 동안 아무런 도움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비록 ‘단태오 죽이기’의 수혜자인 김 대리였지만 사과는 진심이었다.
매사에 업무 처리가 정확하고 빠르던 태오는 그가 믿고 의지하던 팀장임이 분명했으니까.
그 마음은 태오도 백번 이해하고 있었다.
회사 차원에서 태오를 밀어내는 이상, 그에 반기를 들면서까지 자신을 지켜 주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축하드립니다. 이제 이 사무실도 비워드려야겠네요.”
그래서 아무리 마음이 뒤틀리고 울분이 치밀어도 내색하지 않고.
태오는 진심 어린 축하를 건넸다.
그걸 받는 김 대리의 표정이 더욱 울적해질 뿐이었지만.
“인사고과 결과 나오는 날 맞춰서 이 방은 정리하겠습니다. 그 전에 제 자리나 미리 알려 주시죠.”
“단 팀장님…….”
“아, 그리고 팀장 직함은 그냥 떼고 부르세요. 일주일 더 달고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리 말하는 태오의 목소리는 지독히도 낮았다. 그러나 그의 입가엔 씁쓸하게나마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그게 자신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라는 걸 아는 김 대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한 번 더 건네진 사과는 젖을 대로 젖어 있었다.
그걸 보니 참…… 너나 나나 회사 때문에 몹쓸 짓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김 대리님이 죄송할 일 아닙니다. 그러니까 기쁜 일 앞두고 마음 쓰지 마세요.”
태오는 다정한 위로를 건넬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새까맣게 썩어 들어가는 건 제 속이면서.
* * *
회사 앞 오르막길을 오르는 나봄의 표정은 매우 밝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점심시간을 맞아 친히 찾아온 사람이 그녀의 사랑스러운 남자 친구이기 때문이었다.
“태오야!”
나봄은 정문에 서 있는 훤칠한 그에게 휘휘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태오는 특유의 예쁜 미소로 화답했다. 나봄은 그가 이런 표정으로 자신을 맞이해 줄 때가 가장 행복하다.
“오늘은 나 없이 얼마나 잘 지내고 있었나.”
태오는 가까이 다가온 그녀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나봄은 한쪽 어깨에 메고 있던 에코백을 흔들어 보였고, 신이 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 일주일 뒤에 런칭 행사에서 읽을 기념사 작성 다 끝났어! 글을 잘 쓰는 편이 아니라서 걱정 많이 했는데, 어제는 칭찬도 받았다!”
“아아, 그래? 역시 우리 한 팀장님.”
“에이, 그렇게 띄울 정도는 아니고. 그런데 도움 주신 우드레일 관계자분들 성함이 정확한지 모르겠네. 이따가 단 팀장님께서 확인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나봄은 장난스러운 말투로 태오에게 부탁했다.
명단을 확인하는 것 정도라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태오의 눈빛은 일순 떨려 오는가 싶더니.
“확인하는 건 해 줄 수 있는데…… 혹시 그 안에 내 이름도 있어?”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연인 관계를 떠나 태오에게 가장 많은 도움을 받았었던 나봄은 가장 길고 자세하게 적어 둔 감사 인사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당연히 있지. 왜?”
“아…….”
하지만 그녀의 태오의 심장을 내려앉게 만들었다.
런칭 행사 전에 ‘Lily’ 프로젝트에서 내쫓겨 버릴 그는 더 이상 관계자가 아니었다.
“나봄아, 내 얘기는 빼.”
잠깐의 머뭇거림 끝에, 태오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이 의아했던 나봄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러나 태오는 별일 아니라는 듯 미소까지 띠운 채 뒷말을 이었다.
“그냥 내가 너무 편애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그렇지. 나 다른 협력사 팀장들한테는 사무적으로만 대한단 말이야.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도 않고, 잘 도와주지도 않고.”
“아니야. 너 협력사들 사이에서도 평가 되게 좋아.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대놓고 전해도 될 거야.”
“내가 신경 쓰여서 그래. 혹시나 괜한 오해라도 사면 너무 미안해질 것 같으니까…….”
그 말을 하며 태오는 나봄에게 향했던 시선을 애먼 곳으로 거두었다. 이건 태오가 뭔가를 감추고 싶을 때 내보이는 버릇과도 같았다.
그의 상황은 유리에게서 얼핏 들었었던 나봄은 입가에 묻어 있던 웃음기를 거두었고, 이내 조심스러운 질문을 꺼내 놓았다.
“너…… 아직 회사랑 분위기 안 좋은 거야?”
“어?”
“널 프로젝트에서 제외시키기라도 하겠대?”
정답이었으나 태오는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이 순간 제 모습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비칠까 봐서.
그래서 마른침을 삼키며 목소리를 정돈하고, 딱딱하게 굳었던 입꼬리를 다시 들어 올리고.
“제외는 무슨 제외야. 내가 그런 거 당한다고 해서 순순히 물러날 사람으로 보여?”
태오는 쓸데없는 허세를 부려 보기로 했다. 이것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괜히.
“태오야…….”
나봄은 여전히 걱정 어린 눈빛으로 태오를 바라보았다.
태오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 눈을 마주했고, 보다 힘을 준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니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다. 더 이상 니가 헛소문들 때문에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으니까.”
“…….”
“그것 때문에 불안해졌으면 미안해. 그냥 내 의견일 뿐이었어. 관계자 이름은 식당가서 확인해 줄게.”
태오는 얼어붙은 분위기를 모면하려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차가운 마음과 달리 손이 따듯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나봄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이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별일 없는 거야?”
“그래.”
“프로젝트도 무사히 진행하고 있는 거 맞지?”
“당연하지. 내가 팀장인데.”
두 번의 질문에 대한 두 번의 거짓말.
다행히 그걸 곧이곧대로 믿어 준 나봄은 제 뺨에 닿은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난 그래도 꼭 사람들 앞에서 내 마음을 전할래.”
“…….”
“내가 사랑하는 남자 친구 단태오한테 말고, 내 일을 지지해 주고 믿어 주고 같이 고민해 주고 도와줬던 우드레일 단태오 팀장님한테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
“…….”
“그래야 다른 사람들도 깨달을 거 아니야. 단태오 팀장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그러고는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응원의 말을 건넸다.
아마도 그녀는 윗선의 압박으로 인해 외면받는 태오를 런칭 무대에서라도 빛나게 해 주고 싶은 모양이다.
‘그런다고 해서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을 텐데…….’
이미 지쳐 버린 태오의 마음에 회의감부터 스며들었다. 하지만 굳이 겉으로 드러내진 않기로 했다.
결혼을 약속한 이상, 불안한 상황은 실수로라도 내비쳐지지 않게 깊숙이 묻어 두고만 싶은 심정이다.
“……고마워. 나 생각해 주는 건 역시 너밖에 없네.”
결국 잠깐의 망설임 끝에 꺼내 놓은 대답은 솔직하진 않았으나 정답임은 확실했다. 다시금 곱게 휘어진 나봄의 눈가가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보자 뒤숭숭했던 태오의 마음에도 안도감이 찾아왔다.
그것이 마음속 불안까지 줄여 주는 건 아니었으나, 일단은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나의 행복은 너의 행복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니, 내 마음도 곧 괜찮아질 수 있을 것 같아.
* * *
서울 외곽의 5성급 호텔 스위트룸.
태오의 집에 비하면 궁궐 수준인 그곳은 서 대표가 준비해 준 차준과 태준의 새로운 은신처였다.
비록 누군가의 눈에 띌까 싶어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지만, 청소부터 음식까지 모든 서비스가 제공되니 굳이 나갈 필요는 없었다.
그 안에서 차준은 오늘 하루 종일 분주했다.
아침부터 노트북 앞에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그는 분주하게 무언가를 작성하고 있었다.
“차준아.”
그때, 침실에서 나온 태준이 차준에게로 다가왔다.
반가운 휠체어 소리를 들은 그는 노트북에서 눈을 떼고 태준을 바라보았다.
“어, 왜? 뭐 필요한 거 있어?”
그러자 태준은 고개를 저었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어머니한테 전화가 왔어.”
“아…… 형은 잘 있다고 어젯밤에도 말씀 드렸는데.”
“내 걱정 때문이 아니라 니 얘기 하시려고 전화하셨어.”
“내 얘기?”
“너…… 우드레일 이사장 자리 관두고 나왔다며.”
태준의 말에 차준의 입꼬리가 일순 굳었다. 하지만 이내 부드럽게 들어 올린 그는 평소의 장난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아아, 서 대표님 입이 되게 가볍네. 플랜 세울 때까지는 형한테 비밀로 해 달라니까.”
“플랜이라니?”
“하지만 뭐, 거의 다 완성되어 가는 중이니까 지금 말할게.”
“뭐?”
“그럼 지금부터 새로운 사업 계획안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새로운 사업 계획안.
회사와 연을 끊은 뒤로는 들어 본 적 없던 단어에 태준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제야 불현듯 이해되기 시작한 것은 방금 전 서 대표가 태준에게 했던 부탁이었다.
‘오늘은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전화했어.’
‘부탁…… 이요?’
‘태준이 니가 이쪽 업계에 학을 떼는 건 알아. 나도 너 하기 싫다는 일은 시키고 싶지 않고. 하지만 그래도 너의 재능은 눈 높은 회장님도 높이 사셨지.’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너의 도움이 필요해.’
‘어머니, 저는…….’
‘나 말고 선우차준. 그 애는 지금 태준이 네 도움이 필요하다고.’
멀쩡히 걷지도 못하는 내가 그 애한테 무슨 도움이 된다는 소리인지.
그때의 차준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차준의 말들은 서 대표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확실히 깨닫게끔 만들었다.
“형, 내가 왜 우드레일에 악착같이 붙어 있었는 줄 알아?”
“왜 그랬는데?”
“거기 있으면 형이랑 다시 뭔가를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였어. 형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형이 일하는 모습을 꽤 좋아했거든.”
“…….”
“그런데 형을 회사로 부를 수 있는 위치까진 가 보지도 못하고 때려치워 버렸으니까, 이제 뭐 별수 있나. 형이랑 같이할 수 있는 공간을 직접 만들어야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차준은 보고 있던 노트북을 들어 태준의 무릎 위에 놓아주었다.
‘Made by Forest’
프레젠테이션 자료 가장 맨 앞장에 적힌 이름은 어디서 많이 들어 봤던 것이었다.
“Made by Forest…… 이거 우드레일에서 준비하려고 했던 원목 가구 라인 아니야?”
“딩동댕.”
“이걸 왜 니가…….”
“내가 기획한 브랜드야. 콘셉트도, 시장조사도, 구체화 스케줄도 전부 내 손에서 탄생했어. 내 새끼는 당연히 내가 데려오는 게 맞지.”
차준의 계획을 어렴풋이 알게 된 태준의 눈에 걱정이 어렸다.
아무리 차준이 계획했다 하더라도 ‘Made by Forest’는 우드레일이 가장 유력하게 선정해 둔 신규 브랜드였다.
그걸 건드리는 건 우드레일에 도전장을 내미는 것과 같은 셈.
하지만 그런 염려까지도 충분히 알고 있었는지, 차준은 둥글게 눈가를 휘며 웃었다.
그런 뒤 꺼내 놓는 음성은 불안이 가실 만큼 나직했다.
“걱정하지 마. 아무도 태클 걸 사람 없으니까.”
“그래도…….”
“사이가 워낙 안 좋아서 자꾸 까먹나 본데, 나 이래 봬도 서미란 대표 둘째 아들이야. 형은 그 여자가 제일 아끼는 첫째고. 이렇게 빽 좋은 사업체를 누가 건드리겠어.”
“…….”
“그러니까 한 번만 믿고 따라와 줘. 나 이번 일, 정말 자신 있어.”
이젠 스스럼없이 자신을 그녀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차준의 모습.
그건 꿈에서나 볼까 했던 기적 같은 일이었다.
언제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바깥에서 서성이던 너는 이제야 안으로 들어설 마음이 생겼나 보다.
차준의 걸음이 무엇보다 대견했던 태준은 따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같이 가자.”
그러고는 차준이 가장 바라던 대답을 꺼내 놓았다. 태준을 내려다보는 차준의 눈동자가 선명하게 반짝였다.
태준은 그런 그에게 손을 뻗었고, 조심스레 차준의 손을 붙잡았다.
“이젠 어디든 같이 가기로 했으니까 내가 너랑 함께할게.”
“…….”
“장소도 찾고, 좋은 기술자도 찾아서 우리가 일할 공간 한 번 제대로 만들어 보자.”
머지않아 건네진 동경하는 그 사람의 믿음.
차준은 다른 한 손으로 태준을 맞잡았다. 그런 뒤 믿음에 보답하듯 확신에 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좋은 기술자는 이미 찾아 놨어.”
“…….”
“이직을 권유할 만큼 괜찮은 관계는 못 되지만 내가 어떻게든 영입해 볼게.”
그가 누군지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이제야 차준의 계획이 마음에 쏙 든 태준이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