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오늘 밤 주인공은 너야 너.
2018.03.12.
‘잠깐만 마음 좀 추스르고 올게.’
그것이 태오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멀어지는 뒷모습은 세상 슬픔을 혼자 다 짊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나봄은 차마 그를 붙잡아 세우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대로 그가 슬픔에 겨워하도록 놔둘 수는 없었기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찾아온 그의 방 앞.
“하아…….”
나봄은 지금 그의 호텔 방 벨을 누르기 직전이다.
사나운 생김새와 달리 마음이 여린 내 남자는 프러포즈에 큰 상처를 받은 나머지, 말릴 새도 없이 방을 따로 잡고 그 안에 꼭꼭 숨어 버렸다.
‘마누라! 얼른 와! 서방 옆구리 시리다!’
생각해 보면 공항에서부터 묘하게 들떠 있긴 했었다.
‘나도 진짜 미안한데, 나봄아.’
‘내가 업어다 모셔 줄 테니까 제발 크루즈 같이 타 주면 안 되냐.’
크루즈에 데리고 갈 때도 뭔가 심상치 않았어.
그때 눈치를 챘더라면 이런 참사는 막을 수 있었을까.
나봄은 잠시 생각했으나 어차피 지나간 일을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지금은 후회를 하기보단 벌어진 사태를 수습해야 할 때였다.
“큼큼!”
일부러 크게 헛기침을 한 나봄은 조심스레 벨 위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잠깐의 망설임 끝에 힘주어 벨을 눌렀다.
삐이이―
요란한 벨소리는 복도까지 새어 나왔으나 안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삐이이―
“태, 태오야?”
나봄은 한 번 더 벨을 누르며 태오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방음이 좋은 건지, 아니면 철저히 무시를 하는 건지 여전히 고요하기만 한 그의 호텔 방.
“화가 안 풀렸나…….”
무반응에 소심해진 나봄은 일단 되돌아가야 하나 싶어졌다. 해명도 들을 기분이 나야 효력이 생길 터였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발길을 다시 돌리려던 그때.
철컥―!
잠금장치가 다급히 풀리는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 있던 문이 활짝 열렸다. 이때를 기다렸던 나봄은 곧바로 방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곧바로 시야를 사로잡는 건.
“미안. 오래 기다렸지. 목욕 물 받아 놓느라.”
“아…….”
남자의 가슴이었다.
그것도 섹시한 아몬드 빛으로 물들어 있는 단태오의 탄탄한 맨가슴.
자극적인 광경에 넋이 나간 나봄은 그의 잔근육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한동안 얼어붙어 있었다.
태오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뒤늦게 그녀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깨닫고 황급히 몸을 가렸다.
“보, 보지 마.”
“왜?”
“왜…… 라니?”
“아, 아니야. 응. 안 볼게.”
살짝 흑심이 드러날 뻔했지만 나봄은 가까스로 소란스런 마음을 추슬렀다.
지금 그녀는 태오의 몸을 감상하러 온 것이 아니라 깊은 오해를 풀기 위해 찾아온 참이었다.
“그나저나 목욕하려던 중이었나 보구나.”
본론을 상기시킨 나봄은 부자연스럽게 끊어진 대화를 이어 보려 했다.
순간 태오의 까만 눈동자는 바람 앞 촛불처럼 일렁이는가 싶더니.
“원래 우울할 때마다 반신욕 한다.”
나봄의 양심에 콕콕 찔려 오는 말을 했다. 태오의 우울감에 큰 몫을 차지한 나봄은 고개를 들 면목도 없어졌다.
그래서 똑바로 마주하고 있던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옅은 한숨을 푹 내쉬고.
“있잖아, 태오야. 아까 프러포즈 말이야…….”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그가 잊고 싶어 하는 단어를 꺼내자, 태오의 숨이 일순 경직되었다.
하지만 나봄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정말 전하고 싶은 얘기를 이어 나갔다.
“상황은 이상하게 꼬여 버렸지만 거절하려던 건 아니었어.”
“…….”
“니가 준비한 프러포즈인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우리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까지 내려왔는데.
나봄의 설명이 충분치 않았던 태오는 한쪽 눈썹을 구겼다.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나봄은 고갤 들어 기운 빠진 그와 눈을 마주했고, 진심을 담은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내일 저녁에 모든 걸 설명해 줄게.”
“설명?”
“응! 그러니까 일단은 이것부터 받아 줬으면 좋겠어.”
그리 말한 그녀는 걸치고 있던 카디건 주머니에서 종이 티켓 하나를 꺼냈다. 그걸 본 태오의 눈동자가 옅게 떨려 왔다.
“디너 크루즈…… 식사권?”
오늘 너에게 제대로 차였던 그 배를…….
“이걸 나한테 왜 주는 건데.”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태오는 경직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나봄은 곧바로 미소를 퍼트렸고, 또박또박 대답했다.
“널 정식으로 초대하려고! 내일 저녁 일곱 시에 여기서 보자!”
“초대? 나를 왜.”
“너를 위해 준비해 놓은 게 있으니까!”
“준비해 놓은 거 뭐.”
“엄청 중요한 거야. 꼭 와 줬으면 좋겠어!”
몇 번의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갔으나 태오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직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녀가 내민 티켓을 넘겨받자.
“태오야.”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나봄은 태오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런 뒤 이어 내는 말은 무척이나 진지하고 신중했다.
“내일 내가 너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로 만들어 줄게.”
“뭐……?”
“그러니까 프러포즈 거절당한 거라고 생각하진 마.”
거절이 아니면 대체 뭐라는 거야, 라고 생각할 때쯤.
태오의 뇌리에 그럴싸한 예측 하나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한나봄, 너 설마…….”
흐리게 이름을 부르자 둥글게 눈가를 휘어 보이는 너.
내가 이해한 게 맞다면, 내 눈치가 정답이라면.
오늘 내게 상처로 자리 잡은 그 네 글자가 자꾸만 떠오르고 있지만.
“태오야, 와 줄 거지?”
“…….”
“응?”
일단은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을래.
요즘 들어 너와의 인연이 하도 잘 풀려서 잊고 있었는데, 사실 넌 내 인생을 종잡을 수 없게 뒤흔들어 놓는 재주가 있거든.
“……몰라.”
태오는 자신을 향한 나봄의 눈빛을 애써 외면하며 작게 대답했다.
화답이라고 볼 순 없었지만 표정이 한결 누그러진 걸 보니 와 주기는 하려나 보다.
그제야 초조한 마음을 내려놓은 나봄은 남몰래 한숨을 돌렸다.
드디어 내일로 다가온 프러포즈.
시작하기까지 우여곡절은 너무 많았으나 나봄은 그래서 더더욱 욕심을 내보려 한다.
본의 아니게 오늘 맘고생을 하게 된 너를 로맨틱한 영화 속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너를 향한 애정이 가득 담긴 욕심을.
* * *
“오늘 달빛 되게 좋다.”
유달리 달이 밝게 떠오른 밤.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태준이 감상에 젖은 음성으로 말했다. 마른 수건으로 태준의 휠체어를 닦고 있던 차준은 뒤늦게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게. 보름달이라서 그런가.”
마음 속 절망이 걷혀서 그런지, 오늘따라 아름다워 보이는 서울의 밤하늘.
이렇게 느긋하게 하늘을 감상한 지가 얼마나 오랜만인지 모르겠다.
하루에 세 번씩 하늘을 볼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던데, 바로 이런 여유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이 밤이 무심히 지나가 버리는 게 아쉬웠던 태준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예전엔 밤에 할 일 없을 때, 너랑 한강도 놀러 가고 그랬었는데…….”
그 말을 들은 차준은 그때가 떠오르는지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오래된 추억 하나를 즐거운 목소리로 꺼내 놓았다.
“맞아. 형 덕분에 내가 한강에서 처음으로 술을 마셔 봤지, 아마.”
“내가 줬었나?”
“당연히 형이 줬지. 간단히 캔 맥주로 준 것도 아니고 어디서 양주 한 병을 구해다가 따라 줬어.”
차준의 이야기는 태준의 오랜 기억을 톡톡 건드렸다.
그때가 떠오르자 행복했던 기분까지 새록새록 되살아난 태준은 이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맞아. 그랬어. 아무래도 니가 사회생활 할 땐 맥주보다 양주를 더 많이 마실 테니까.”
차준은 그런 그를 따라 미소 지었고, 이내 살짝 당황스러운 말을 이었다.
“그거뿐만이 아니야. 나 거기서 형한테 담배도 배웠어.”
“담배를 나한테 배웠다고?”
“응. 형한테.”
생각보다 많은 차준의 흡연양을 걱정스러워하고 있던 태준은 그 시작이 자신이라는 얘기를 믿을 수 없었다.
술은 다른 데서 잘못 배울까 봐 미리 가르쳐 줬던 게 확실하지만, 담배는 권유도 해 본 적 없는 걸로 기억한다.
“아냐, 그건 가르쳐 준 적 없어.”
태준은 확신 어린 대답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이윽고 차준의 입에서 꺼내지는 건 태준은 결코 알아채지 못했던 자신만의 비밀이었다.
“기억 안 나? 한강 다리 밑에 있는 매점 갔을 때, 형이 거기서 담배 한 갑 샀었잖아.”
“그게 뭐?”
“난 그때 형이 담배 피우는 거 처음 알았어. 그전까진 담배 생각이 딱히 없었는데, 그날 이후로 나 혼자 열심히 연습했지.”
“아…… 그런 거였어?”
뜻밖의 고백에 태준은 더욱 난처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차준은 그저 밝기만 한 목소리로 회상을 이어 나갔다.
“그땐 형이 하는 건 전부 다 따라 하고 싶었어. 왜, 그 있잖아. 꼭 연예인 좋아하는 열성 팬처럼.”
“그 정도였어?”
“당연하지. 그 깊은 팬심을 가족애로 포장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
넉살 부리는 차준은 예전으로 돌아간 듯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얼굴이 참 보기 좋았던 태준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너한테 다시 그렇게까지 사랑받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농담처럼 꺼낸 소리였으나 그 안에 아쉬움이 묻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함께라서 행복했던 그 시절은 간절한 만큼 멀어져 버렸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차준이 이런 마음조차도 부담스러워할까 봐, 옅게 비치는 미련을 감춰 두려던 그때.
“지금도 그때랑 별 다를 거 없어.”
차준의 다정한 목소리가 태준의 귓가로 흘러들어 왔다. 뜻밖의 고백에 휘둥그레진 태준의 눈동자가 그에게로 머물렀다.
그러자 이어지는 차준의 말은 태준의 귀가 아닌 마음으로 스몄다.
“형은 내 형이니까.”
“…….”
“어떤 모습이든, 어떤 삶을 살든, 형이 우리 형인 이상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차준아…….”
투명하게 비친 그의 진심은 지난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변함이 없었다.
이젠 욕심일 뿐이라고, 체념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던 너의 마음은 한시도 떠나지 않고 내 곁에 머물러 있었나 보다.
“그러니까 앞으로 날 두고 혼자 어디 갈 생각도 하지 마. 사람이 이렇게 변함없이 좋아해 주면 책임질 줄도 알아야지.”
이어지는 차준의 장난스러운 협박은 사실 멀어지지 말라는 간절한 부탁과 비슷했다.
예전엔 떨어져 있는 것보다 같이 있는 게 당연했던 사이였는데, 다시 함께하게 되기까지가 왜 이리도 힘들었는지.
그래도 흘러간 시간 덕분에 나아진 것이 있다면, 더 이상 맞출 필요도 없이 비슷해진 서로의 발걸음이었다.
어리고 여리던 모습이 기억나지 않을 만큼 훌쩍 자라나 버린 동생과 그런 그를 긴 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기다려 준 형.
이제야 비슷하게 걸음을 맞출 수 있게 된 두 사람은 앞으로 그 어떤 가시밭길이 닥쳐온다 해도 헤쳐 나갈 자신이 있었다.
“그래. 두 번 다신 너 혼자 두고 떠나지 않을게.”
나약함을 털어 낸 태준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심을 다해 말했다. 그리고 이 순간 영원히 변치 않을 약속 하나를 건넸다.
“우리 어디든 같이 가자.”
그 한 마디를 들은 차준의 눈가에 다시금 예쁜 눈웃음이 어렸다.
가슴에 켜켜이 쌓여 있던 묵은 한숨들이 전부 깨끗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 * *
“프러포즈는 아니야.”
라고 생각하면서도 태오는 잔뜩 빼입고 왔다.
“프러포즈일 리가 없어. 그건 시트콤이지.”
라고 생각을 하면서도 렌터카에서 몸을 내리는 태오의 표정은 잔뜩 상기되어 있다.
지난밤, 이곳으로 와 달라는 나봄의 초대를 받고 하루 만에 다시 찾은 디너 크루즈.
어제 같은 장소에서 프러포즈를 제대로 거절당했던 태오는 두 번 다시 이곳에 발을 들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난처한 얼굴로 다가온 직원이 막 프러포즈를 시작하려던 그에게 ‘거절당하신 것 같다’라고 전하던 그 순간을 떠올리면 너무 낯부끄러워서 온 몸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마음을 움직인 건 긴장한 표정으로 내뱉었던 나봄의 한 마디.
‘내일 내가 너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로 만들어 줄게.’
그건 확실히 단순한 위로라고 하기엔 심상찮은 구석이 있었다.
그냥 행복한 남자도 아니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로 만들어 주겠다니, 그건 꼭 어마어마한 선물이라도 준비해 두고 있는 사람 같았다.
사고가 그쯤 흐르니 문득 떠오르는 건, 예전에 크루즈 예약을 도와주던 상담원의 했던 말이었다.
‘예약자가 여성분이세요! 남자 친구한테 몰래 프러포즈 해 주신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계시죠!’
우리의 여행 이튿날 밤, 남자 친구한테 프러포즈를 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는 그 여자 말이야.
혹시 니가 아니었을까.
“하, 단태오 미쳤네. 별 말 같지도 않은 상상을…….”
태오는 너무 큰 기대가 또 한 번 상처를 줄까 봐, 뒤숭숭한 마음을 애써 정리했다.
그러고는 크루즈 입구 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는데.
“뭐야, 장사를 하긴 하는 거야?”
불이 다 꺼진 크루즈가 태오의 심기를 건드렸다. 분명 나봄이 초대한 곳은 이곳인데 들어가는 입구서부터 깜깜하기만 하다.
기대를 열심히 접어 보긴 했지만 완벽하게 떨쳐 내진 못했던 태오는 실망감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아무것도 없네. 하긴 여기서 이벤트 하는 게 한두 푼 드는 일도 아니고…….”
그러면서 크루즈를 등지고 서려던 바로 그때.
♬♪♩♬―
입구 옆 스피커에서 로맨틱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깜짝 놀란 태오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다시 고갤 돌렸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거짓말처럼 펼쳐지는 광경은.
“뭐야, 이거…….”
입구에서부터 크루즈 내부까지 줄지어 켜져 있는 플로어 조명. 그 길을 따라 흩뿌려져 있는 심상찮은 하트 모양 풍선들.
로맨틱한 이벤트가 펼쳐지려는 듯, 한순간에 화려해져 버린 크루즈의 분위기.
당황한 태오는 쉽사리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가만히 얼어 있었다.
그때 스피커에서 지직거리는 마이크의 잡음이 들려왔고, 곧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또렷하게 이어졌다.
―태오야, 어서 와. 오늘 하루는 너만 입장할 수 있는 공간이야.
“……한나봄?”
이름까지 들려왔건만 현실감각이 무뎌졌다. 예상을 아예 못 한 건 아니었는데 막상 닥쳐오니 믿기지가 않았다.
그건 어쩌면 어제와 같은 소규모 프러포즈 이벤트 정도만을 기대했던 태오에겐 당연한 반응이었다.
몇천 대 일의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선정된 영화 같은 초호화 프러포즈.
그 영화 같은 이벤트의 주인공이 자신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