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상처뿐인 프러포즈
2018.03.09.
기어이.
정말 기어이 와 버리고 말았다.
내일 태오를 위한 깜짝 프러포즈가 열릴 이 호화로운 디너크루즈에 나봄은 하루 먼저 그와 발을 들여 버렸다.
“단태오라고 합니다. 디너 예약해 뒀는데요.”
“아,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리로 안내해드리죠.”
디너크루즈에 탑승하자마자 태오는 승무원의 안내를 받으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 뒤를 따르는 나봄의 다리는 천근만근 무겁기만 했다.
태오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마지못해 크루즈로 따라온 그녀는 꼬여 버린 내일 일정으로 인해 머릿속이 복잡하다.
사실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나봄의 계획은 굉장히 간단했다.
크루즈를 얘기를 미리 꺼내면 태오가 예약하려 들 테니 최대한 이곳에 올 거란 티를 내지 않고 있다가, 오늘 밤쯤 되었을 때 선물 공개하듯 탑승권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태오야! 너랑 좋은 곳에서 식사하고 싶어서 예약해 뒀어!’
이런 느낌으로.
하지만 이미 와 버렸으니 다시 탑승권을 꺼내 봤자 좋은 반응은 얻지 못할 터였다. 내가 미리 예약해 뒀었다는 걸 알게 되면 그는 괜한 고집을 부렸던 자신을 탓하게 될 것이다.
그럼 기대 가득했던 우리의 첫 여행은 엄청 우울해지고 말겠지.
“그럼 이제 어쩌면 좋지…….”
고민스러운 혼잣말을 내뱉은 그때.
“한나봄, 어디까지 가.”
태오의 목소리가 그녀의 발길을 붙들었다. 멍하니 앞으로 향하던 나봄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앞서가던 태오는 어느새 디너크루즈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여기가 우리 이 자리야.”
“아…….”
“밖에 봐. 야경 엄청 잘 보인다.”
그러게. 되게 좋은 자리 잡았네. 나는 내일 이만한 데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봄은 착잡한 심정을 애써 숨긴 채 태오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테이블 위에 미리 준비되어 있던 차가운 물부터 들이켰다.
그런 그녀를 본 태오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되게 긴장했네. 이렇게 좋은 데는 처음이신가 봐요.”
평소라면 같이 웃으며 받아쳐 줄 수 있었겠지만 잔뜩 예민해진 오늘은 아니었다.
나봄은 곧바로 입술을 삐죽 내밀고 툴툴거리듯 대꾸했다.
“그러는 단태오 씨도 처음이신가 봐요. 엄청 들떠 보이시는데.”
“너랑은 처음이지.”
“그 말은 다른 여자 친구랑 와 본 적이 있다는 소리야?”
“설마요. 예전에 남자 바이어랑 비슷한 유람선에서 점심 식사 한 번 해 봤습니다. 질투 안 하셔도 돼요.”
“지, 질투한 건 아닌데…….”
“질투가 아니면 뭐냐. 너만 예뻐해 달라고 애교 부리는 건가?”
뾰로통한 나봄의 표정마저도 귀여웠던 태오는 쭉 손을 뻗어 그녀의 콧잔등을 톡 건드렸다.
순간 코끝을 스치는 그의 향기에, 나봄의 가슴은 쿵쿵쿵쿵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의 손짓만으로도 가슴이 이토록 반응을 해 대니, 도저히 꽁한 마음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나봄은 너무 쉽게 붉어져 버린 얼굴이라도 감추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애피타이저 나왔습니다.”
때마침 정장 스타일의 유니폼을 잘 차려입은 웨이터가 연어 카나페를 가져왔다.
다른 데선 본 적 없던 화려한 플레이팅에, 잠시 어긋났던 나봄의 눈동자도 테이블 위로 돌아왔다.
“우와, 되게 예쁘다.”
포크를 갖다 대기 전 사진부터 남겨 놓고 싶었던 나봄은 휴대폰을 들었다.
그러고는 이 음식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카메라 필터를 찾아 연신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태오는 웨이터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고, 들릴락말락 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기, 그건 언제쯤…….”
“아, 준비는 다 되었습니다. 원하시는 타이밍 때 말씀 주세요.”
“그럼 곧바로 하겠습니다. 끝내기 전엔 뭘 먹어도 얹힐 것 같아서.”
충분히 의미심장해 보이는 대화임에도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나봄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태오야, 이거 봐! 사진작가가 찍은 것처럼 잘 나왔지?”
그래서 마냥 신이 난 얼굴로 나봄이 방금 찍은 연어 카나페 사진을 보여 주자, 태오는 황급히 웨이터의 귓가에서 얼굴을 떼어 내고 과한 칭찬을 건넸다.
“그러네. 엄청 잘 나왔네. 너 이쪽 길로 진출해도 되겠다.”
“하여간, 띄워 주기는.”
나봄은 너스레를 떠는 태오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이고는 포크를 들었다.
아직 내일의 대책을 세우지는 못했지만 일단 음식이 나왔으니 먹고 생각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카나페 하나를 막 집어든 그 순간.
“크음, 나봄아. 나 화장실 좀.”
눈치를 보던 태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봄은 고개를 끄덕이며 카나페를 한입에 넣었다.
그러자 곧바로 테이블을 떠나는 태오의 걸음은 왠지 초조해 보였다.
화장실이 많이 급했나.
나봄은 멀어지는 태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물 한 잔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다시 포크를 움직이려는데.
Lovin’ you it’s easy coz’ you’re beautiful―♬
익숙한 사랑 노래가 크루즈 안에 울리기 시작했다. 이전의 클래식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음악이 바뀌자, 나봄은 스피커 쪽으로 슬쩍 시선을 두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별생각이 없었다.
아무래도 태오는 이 디너크루즈의 식사가 끝내주는 걸 알고 그토록 오고 싶어 했나 보다, 하며 음식을 음미하고 있었을 뿐.
하지만.
촤르륵―!
피아노가 놓여 있는 크루즈의 단상에서 분홍빛 현수막 하나가 떨어지자, 오물거리던 나봄의 입은 그대로 멈춰 버리고 말았다.
[단태오♡한나봄]
저거…… 내 이름인가?
차마 단번에 받아들일 수가 없어 그리 생각할 때쯤.
클래식 콘서트 영상이 반복 재생되고 있던 단상 빔 프로젝터에 또 다른 문구 하나가 떠올랐다.
[너에게 할 말이 있어.]
“흐음…….”
[나, 너랑 결혼하고 싶어.]
“응……?”
[오늘 밤, 내 프러포즈를 받아 줄래?]
“으응?!”
‘프러포즈’라는 네 글자에 나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버렸다.
보통의 여자라면 남자 친구가 사라지자마자 시작된 이벤트가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알아차리겠지만, 바로 내일 같은 프러포즈를 준비한 그녀는 순순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비록 신청한 멘트와는 많이 다르지만, 흘러나오는 BGM도 많이 다르지만.
“세상에, 내 프러포즈가 왜 지금……!”
로맨틱하게 시작되고 있는 프러포즈가 자신의 것이라 확신한 나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당황한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여 태오가 오는지 지켜보았다. 화장실에 간다던 그는 아직 나오지 않았는지, 다행히 눈에 보이지 않았다.
‘더 늦기 전에 당장 중단시켜야 해! 프러포즈 할 때 주려고 사 온 시계도 캐리어에 있단 말이야!’
결심이 선 나봄은 달리다시피 단상 근처 웨이터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당장 멈춰 주세요!”
“네, 네?”
“제가 한나봄인데요! 오늘 아니란 말이에요!”
웨이터는 매달리는 그녀를 얼떨떨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현수막에 큼직하게 적힌 그녀의 이름 석 자를 확인하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이 프러포즈 당사자 되시나요?”
“네!”
내가 바로 이 프러포즈를 내일 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걸 중단시켜 달라는 말씀이시죠?”
“네! 지금 당장이요!”
“이벤트를 원치 않으신다고 전해드리면 될까요?”
“원치 않아요! 빨리 내려 달라고 전해 주세요!”
시계 챙겨 와서 내일 할 거니까요!
나봄의 말을 듣고 제 나름대로 상황을 파악한 웨이터는 잠시 단상 뒤쪽을 살폈다.
그러고는 난처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준비하신 분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진정하시고 자리에 앉아 계세요.”
내가 신청했고, 내가 내려 달라고 하는데 누구한테 말씀을 드리겠다는 건지.
나봄은 이해되지 않았지만 혹시나 태오가 이 모습을 볼까 싶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웨이터는 황급히 단상 뒤편으로 뛰어갔고, 뒤편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팟―!
그제야 다급히 꺼지는 프러포즈 영상. 뛰어나온 웨이터가 서둘러 떼어 내는 현수막.
나봄은 그때까지도 초조한 시선으로 태오가 오는지를 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상황이 애초부터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말끔히 정리됐을 때.
“휴우…….”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자칫 기껏 준비한 시계도 없이 프러포즈를 할 뻔했는데, 겨우 참사를 막았다.
나봄은 그제야 단상에서 등을 돌리고는 다시 제자리로 향했다.
오자마자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고, 조금 가빠진 호흡도 가다듬고.
태오가 화장실로 떠나기 전처럼 가만히 앉아 있으니, 거의 떨어져 나갈 듯이 요동쳤던 가슴도 차츰 진정되기 시작했다.
‘휴, 정말 큰일 날 뻔했어.’
그렇게 숨을 돌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머지않아 테이블로 돌아오는 태오가 눈에 보였다.
돌아오는 어깨는 어쩐지 출발했을 때보다 눈에 띄게 축 쳐져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굴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나봄은 미처 그 점을 신경 쓰지 못했다.
“태오야, 얼른 와. 카나페 되게 맛있어.”
그래서 싱글벙글 웃는 표정으로 태오 쪽으로 음식 접시를 밀어 주니.
“…….”
태오는 대답 대신 그녀의 얼굴만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하아…….”
이내 서러움 가득한 한숨을 땅이 꺼져라 내쉬었다.
갑작스럽게 변한 그의 온도를 느낀 나봄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 * *
태오가 조금 이상해졌다.
분명 애피타이저가 나왔을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아 보였던 것 같은데, 화장실에 다녀온 뒤로 급작스레 분위기가 삭막해졌다.
말수도 부쩍 줄어들고, 눈도 잘 마주치려 들지 않고.
“왜 그래?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 보여.”
나봄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물었으나 되돌아오는 건 이해 못 할 대답뿐이었다.
“미안, 내가 쿨하질 못해서.”
“응?”
“없던 일로 해야 하는데…….”
뭐가 쿨하지 못하다는 건지. 대체 뭘 없던 일로 하겠다는 건지.
“대체 뭘?”
나봄은 몇 번이나 되물었으나, 태오는 그 뒤로 입을 꾹 닫아 버렸다.
이유라도 알면 적절한 대처라도 해 볼 텐데, 도무지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눈치만 보며 서먹한 식사를 마치고, 어색한 정적만이 감도는 차에 타고, 이제 막 호텔 야외 주차장에 도착한 순간.
“오늘은…… 따로 자는 게 좋겠지?”
태오가 예상치도 못한 얘길 꺼냈다.
당연히 한방을 쓰는 줄 알고 예쁜 잠옷까지 들고 왔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람.
더 이상 이상해진 태오를 두고 볼 수 없었던 나봄은 직접적으로 물어보기로 했다.
“태오야, 혹시 나한테 화난 거 있어?”
“어?”
“갑자기 쌀쌀맞아진 것 같아서…… 내가 잘못한 게 있으면 얘기해 줘.”
그러자 태오는 나봄의 눈을 물끄러미 마주하더니, 이내 옆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잘못한 거 없어.”
“…….”
“내가 너무 서둘렀던 건데, 뭐. 내 감정에 취해서 일방적으로 일만 벌였지.”
응? 그게 무슨 소린지 여전히 이해가 안 돼.
나봄은 좀처럼 알아듣지 못할 얘기만 하는 그를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하지만 혼자만의 세계에 깊이 빠져 버린 태오는 그대로 안전벨트를 풀고 차문 밖으로 나서 버렸다.
여전히 영문은 모르겠으나 그녀에게 원인이 있다는 게 확실시되는 순간이었다.
‘내가 뭘 했더라?’
나봄은 태오를 따라 차에서 내리며 지난 기억들을 곰곰이 곱씹었다.
문제가 되는 시간은 태오가 화장실에 갔던 그 잠깐의 타이밍.
그때 한 거라고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이거 당장 멈춰 주세요!’
‘네, 네?’
‘제가 한나봄인데요! 오늘 아니란 말이에요!’
분명 내일로 예약했었던 프러포즈가 오늘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열리는 바람에 필사적으로 중단했었지.
“설마…… 그걸 본 건가?”
문득 스친 생각은 제법 일리가 있었다.
아마도 태오는 나봄이 프러포즈를 서둘러 접는 모습을 봤고, 그래서 기분이 나빠진 모양이다.
하지만 왜?
받을 줄 알았는데 결국엔 못 받아서? 아니면 혹시 프러포즈 하려는 걸 알게 되니까 부담스러워져서?
뒤따라 피어나는 의문들은 그녀의 머릿속을 더욱 복잡하게 헝클여 놓았다.
뭔가 상황이 이해될 듯하면서 이해되지 않는 게, 꼭 그가 내준 수수께끼를 푸는 기분이다.
바로 그 순간.
‘내가 너무 서둘렀던 건데, 뭐. 내 감정에 취해서 일방적으로 일만 벌였지.’
아까 들었던 태오의 말이 그녀의 뇌리에 총알처럼 박혀 들어갔다.
이제 보니 그가 서러운 목소리로 꺼내 놓았던 의미심장한 멘트들은 프러포즈를 받은 사람이 아닌, 프러포즈를 했다가 거절당한 사람이 서운함에 꺼냈을 얘기들이었다.
“설마…… 그 프러포즈가 내 것이 아니라…….”
얼핏 실마리만 붙잡았을 뿐인데, 이것이 정답임을 알려 주듯 등골이 오싹해졌다.
만약 내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내가 아까 저지른 짓이 그런 깽판이 맞다면…….
‘그러니까…… 이걸 중단시켜 달라는 말씀이시죠?’
‘네! 지금 당장이요!’
‘이벤트를 원치 않으신다고 전해드리면 될까요?’
‘원치 않아요! 빨리 내려 달라고 전해 주세요!’
“안 돼.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끔찍하게 꼬여 버린 사태를 뒤늦게 파악한 나봄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그래서 멀어지는 태오에게로 당황한 시선을 두자, 때마침 눈가를 매만지는 안쓰러운 그의 모습이 목에 가시처럼 걸려 들어왔다.
세상에나, 어쩜 좋아!
프러포즈고 뭐고, 저 남자 제대로 상처받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