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내게도 봄이 오려나 보다
2018.03.05.
“와아, 제주도 날씨 진짜 좋다.”
겨우 짐을 찾고 빠져나온 제주 공항.
여행 시즌은 아니었지만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청명하고 예뻤다.
워낙 비가 자주 오는 섬이라 흐리면 어쩌나 걱정했건만, 다행히도 여행 기간의 일기예보는 맑음 그 자체였다.
신이 난 나봄은 공항에서 챙겨 온 박물관 팸플릿들을 훑어보며 태오에게 물었다.
“태오야, 넌 가장 먼저 뭘 하고 싶어? 갈 만한 곳은 엄청 많은데.”
“…….”
“태오야?”
“어, 어?”
“하고 싶은 거 있냐구.”
“아…….”
프러포즈 일정을 확인하느라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태오는 그제야 나봄에게로 시선을 두었다. 그러고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나는 너랑 같이하는 건 다 좋아.”
“그래도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있을 거 아냐.”
“있긴 있는데 지금 갈 데는 아니라서. 여섯 시 예약이거든.”
“여섯 시?”
내일의 중대사 말고는 별 계획이 없었던 나봄은 그의 오늘 일정이 반가웠다.
“왜? 우리 여섯 시에 어딜 가는데?”
그래서 두 눈을 반짝이며 한 번 더 묻자.
“어, 어?”
태오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 모습은 마치 들어선 안 되는 질문이라도 들은 사람 같았다.
그걸 본 나봄은 좀 더 꼬치꼬치 캐물어 보기로 했다.
“왜 그렇게 놀라?”
“내, 내가 뭐.”
“혹시 못 갈 데 가는 거야? 엄청 음흉한 곳이거나.”
나봄은 그리 추궁하며 태오의 눈앞에 팸플릿 하나를 내보였다.
낯부끄러운 조각상 사진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는 그 팸플릿은 다름 아닌 ‘성(性) 박물관’ 안내 책자였다.
“그, 그건 또 어디서 가져왔어!”
그걸 본 태오는 더욱 당황한 표정으로 격한 반응을 보였다.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얼마 만에 보더라.
연애 극초반의 태오는 작은 스킨십이나 애정 표현에도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곤 했지만, 요즘은 능글맞은 늑대가 따로 없었다.
이별의 불안도 어느새 가셨는지 나봄의 마음을 들었다가 놨다가, 방심하게 했다가, 훅 파고 들어왔다가.
그에게 휘둘리는 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가끔 나봄은 그녀 앞에서 어쩔 줄 모르던 부끄럼쟁이 태오가 그리워졌다.
그러다 찾아온 오늘의 기회.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던데.”
“뭐, 뭐라는 거야.”
“우리 태오, 어른의 세계가 그렇게나 궁금했어?”
태오를 놀려 먹을 생각뿐이었던 나봄은 짓궂은 말을 연달아 건넸다.
그러자 괜히 애먼 곳으로 고개까지 돌려 버린 태오는 이내 ‘에라, 모르겠다’ 식으로 파격적인 대답을 내뱉었다.
“그, 그냥…….”
“그냥 뭐.”
“그냥 너 크루즈 한 번 태워 주려고 한다, 왜.”
“크루…… 뭐?”
크루즈.
딱 그 단어가 나온 다음부터 당황하는 건 오히려 나봄 쪽이 되어 버렸다.
크루즈는 내일 밤에 내가 널 데려가야 하는 곳인데, 오늘 여섯 시에 예약이 되어 있다니? 혹시 같은 배 아니지?
물어보고 싶은 건 많았으나 쉽사리 꺼내 놓을 수는 없었다. 자칫 수상하게 굴었다간 태오를 위한 프러포즈 계획이 들통나 버리기 십상이었다.
“예약을 했다는 건…… 돈까지 이미 다 내고 입장료를 샀다는 거야?”
나봄은 그의 야심찬 계획이 취소 가능한지 확인하기 위해 최대한 돌려 물었다.
그러자 태오는 자랑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띠웠고, 당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냈다마다. 입장료뿐만 아니라 디너 풀코스로 어렵게 예약했어.”
“아…….”
“뭘 기대하든 그 이상으로 어마어마할 거다, 아마.”
그 어마어마한 거, 내일 밤에 나도 예약해 놨는데.
내 불길한 예감이 맞는다면, 디너 풀코스 메뉴도 토시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을 것 같은데.
설렘만 가득하던 나봄의 얼굴에 곧바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첫날 일정을 빡빡하게 잡아 놓고 올 걸 그랬다.
‘오늘 크루즈를 타 버리면 내일 프러포즈 할 때는 어떻게 데려가지?’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고민은 쉽사리 해소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예상치 못한 위기의 돌파구를 찾고 있던 그때.
“뭘 그렇게 생각해?”
“어, 어?”
“아, 너 혹시 거기 가고 싶은 거야?”
태오가 그녀 손에 들린 성 박물관 팸플릿을 턱 끝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한 순간에 페이스가 말려 버린 나봄은 아까 전의 그보다도 당황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그게…….”
그 모습을 본 태오는 언제 수줍어했었냐는 듯, 다시 능글맞은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알았어, 알았어. 시간 나면 성 박물관도 데려가 줄게.”
“누가 간대? 그런 게 아니라……!”
“일단 거기 가려면 렌터카 찾아야지. 가시죠, 저쪽입니다.”
“안 간다고! 안 가!”
시원시원하게 올라간 그의 입꼬리는 나봄이 좋아하는 단태오의 매력 포인트였지만, 오늘은 어쩐지 살짝 얄밉게 느껴졌다.
본인 때문에 꼬여 버린 나의 야심찬 프러포즈는 알지도 못하고, 속 편히 장난만 치고 있다니. 너는 지금 내 마음을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거야.
이벤트사에서 주관해 주는 만큼 걱정을 덜고 있었던 프러포즈였으나, 나봄은 어쩐지 슬슬 성공 여부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화려한 배 위에서 고급스러운 코스 요리를 먹으며 준비한 시계와 함께 나와 결혼해 주지 않겠냐고 묻는다면, 너는 당연히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어쩌면 내일 듣게 될 대답은.
‘뭐야, 한 번 왔던 데 말고 다른 데서 좀 하지.’
정도일 수도 있겠다.
그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난 오늘 절대 그 배에 오르면 안 되겠다.
어차피 니가 그렇게 타고 싶어 하는 크루즈는 내일 내가 태워 줄 건데, 뭐!
* * *
드르륵―
회색 커튼을 걷어 내자 눈부신 햇살이 방에 찾아들었다. 그 빛을 알람 삼아 늦은 잠에서 깬 태준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곧바로 시야에 걸려 들어오는 건 창문 앞에 서 있던 낯선 실루엣.
“잘…… 잤어?”
그가 서먹한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태준은 그를 금세 알아차리지 못했다.
눈앞에 있는 그는 어느덧 함께 있는 것보다 닿을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게 더욱 익숙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늦긴 했지만 아침 차려 놨는데…… 형 된장찌개 좋아하는 거 맞나?”
하지만 망설이던 그가 한 번 더 용기를 내서 말을 걸자, 태준은 그제야 이 순간 함께하고 있는 존재를 실감한다.
“차준아…….”
태준이 푹 잠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차준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띤 채 너스레를 떨었다.
“잠을 너무 잘 자길래 죽은 줄 알았어. 앰뷸런스 불러야 하나 엄청 고민했다니까, 하하.”
내 앞에서 기뻐하는 그의 얼굴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저렇게 밝은 모습은 꿈에서도 잘 보여 주지 않았는데.
아직 예쁘게 웃을 줄 아는구나. 그 미소엔 흉이 지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겁게 벅차오르는 감정은 태준의 눈가를 뜨거워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반가운 그의 미소에 눈물 바람으로 화답하고 싶지는 않아서, 그는 눈가를 정리하는 척하며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말 오랜만에 푹 잤어. 태오 씨 방 되게 아늑하더라.”
“어, 아늑하긴 한데 여기 나봄이랑 찍은 사진들 보여?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오늘 아침에 보란 듯이 펼쳐 놓고 갔더라.”
“그래?”
“어, 나 이렇게 속내가 훤한 사람은 오랜만에 봐.”
차준은 투덜거리듯 말했으나 딱히 기분 나쁜 눈치는 아니었다.
하긴. 사이가 좋지도 않은데 차까지 태워 주고 집까지 빌려주었으니, 껄끄러운 과거와 상관없이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차준은 나봄과 태오의 커플 사진을 물끄러미 내려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려보냈다.
그 순간 그의 눈빛에선 참 많은 감정들이 묻어 나왔으나, 그는 머지않아 깨끗이 감춰 버리고는 다시 태준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밥 먹자. 식겠다.”
태준은 고개를 끄덕여 주려고 하다가 멈칫, 그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참 신기한 일이지.
얼마 전까진 그렇게나 새까맣게 가려져 있던 너의 마음이 이젠 예전처럼 투명하게 비쳐 나오는 것 같다.
다 큰 줄 알았는데, 여전히 손길이 많이 필요한 어린아이구나. 서른 살짜리 내 동생은.
“으쌰.”
태준은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차준은 그가 휠체어에 몸을 싣는 걸 도와주기 위해 그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태준은 차준이 내미는 도움의 손길에 몸을 내맡기기 전, 두 손으로 그의 차가운 손을 꼭 붙들었다.
그러고는 내리쬐는 햇살보다 따스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많이 시리다, 그렇지?”
“어?”
“빨리 따뜻해졌으면 좋겠네.”
“아…….”
이 순간, 차준은 다정한 형이 무슨 얘길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가 나의 무슨 마음을 안쓰러워하고 있는지도.
이럴 때마다 나는 어떻게 그의 걱정을 위로해 줬더라.
차준은 낡은 추억을 뒤적였다. 머지않아 떠오르는 말은 참 오랜만에 내뱉어보는 것이었다.
“괜찮아, 나한테는 형이 있잖아.”
그를 위해 건넨 말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내 손이 정말 따뜻해졌다.
이대로라면 오랜 시간 조금씩 두터워졌던 마음의 성에도 금세 녹아들겠다.
나에게도 봄이 찾아온 것처럼.
* * *
“와, 뭘 했다고 벌써 다섯 시냐.”
드높은 나무가 우거져 있는 제주도의 사려니 숲길.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셔터를 눌러 대느라 정신이 없던 태오가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나봄은 유달리 신나 했던 그를 떠올리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너 여기서 살려는 줄 알았어.”
“내가 그렇게 오래 있었나?”
“응, 우리 벤치에 거의 두 시간 동안 앉아 있었을걸.”
그 말을 듣고 나서 하늘을 보니, 정중앙에 있던 해는 벌써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그건 결전의 시간이 그만큼 가까이 다가왔음을 뜻했다.
‘아, 이제 슬슬 출발해야겠네.’
태오는 아름다운 풍경에 빼앗겼던 정신을 겨우 다잡고, 서둘러 주차장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서둘러야겠다. 거기까지 가려면 사오십 분은 걸릴 텐데.”
거기라면 내가 내일 너를 데려가야 할 크루즈를 말하는 거겠지.
나봄의 정신도 그제야 바짝 곤두섰다.
태오를 위해 준비한 크루즈 프러포즈가 오늘의 일정 때문에 제대로 꼬여 버린 지금.
나봄은 사려니 숲길을 따라 걸으며 이 위기를 극복할 방법을 용케 생각해 뒀다.
그 계획은 이름하여 ‘갖은 핑계를 대서라도 오늘의 배를 내일로 미루기’.
“아, 태오야. 있잖아.”
나봄은 핑계를 꺼내기 위해 말문을 열었다.
“어?”
곧바로 그녀에게 향하는 태오의 눈동자는 오늘따라 반짝반짝 빛나고 있어서 더 안타까웠다.
하지만 나봄은 미안하고 짠한 마음은 잠시 제쳐 두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크루즈는 내일로 미루면 안 될까?”
“내일로?”
“응, 찾아보니까 여기 근처에 엄청난 맛집이 있다고 하던데. 내일은 마침 쉬는 날이라지 뭐야.”
“아…….”
“입장권은 아직 안 썼으니까 내일로 미룰 수 있을 거야. 내가 전화해서 미뤄 놓을게!”
됐어. 자연스러웠어.
태오는 평소에 고집을 잘 안 부리니까 순순히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양보해 줄 거야.
거짓말을 한 건 양심에 콕콕 찔렸지만 나봄은 좀 더 뻔뻔해지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의 서운함은 내일의 감동으로 갚아 주면 되는 문제였다.
하지만 가만히 멈춰 있던 태오가 이내 흔들리는 눈빛으로 꺼내 놓는 대답은.
“안 돼.”
“……응?”
“이 근처 맛집은 마지막 날 공항 가기 전에 들르고, 오늘은 크루즈 타러 가자.”
이럴 수가, 그런 방법이 있었다니.
예상치 못한 해결책은 나봄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제법 그럴싸한 이유라고 생각했건만 변명은 너무나도 쉽게 무색해져 버렸다.
여기서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던 나봄은 조금 더 버텨 보기로 했다.
“마, 마지막 날에 스케줄을 잡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 여기서 공항까지는 거리도 꽤 되잖아!”
“출발 시각이 그렇게 이르지 않아서 괜찮을걸.”
“그리고 마지막 날엔 피곤할 텐데!”
“그럼 내일 일정을 너무 무리하게 잡지 말아야겠네.”
이 남자가 이렇게 고집 센 사람이었던가.
완강한 태오의 태도는 평소와 달랐다.
오늘 크루즈를 타지 못하면 큰일이라도 생길 것처럼, 그는 어떻게든 그녀를 데려가려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
이건 태오를 걱정하게 만드는 거짓말이라 어지간해서는 삼가려고 했는데…….
“사실은 태오야! 나 지금 다리가 너무 아파서 못 움직이겠어!”
나봄은 급기야 아픈 척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말을 들은 태오의 얼굴엔 고집 대신 걱정이 어리기 시작했다.
“왜? 어디 다쳤어?”
그리 묻는다는 건 나봄의 뜻대로 움직여 줄 여지가 보인다는 뜻이었다.
아픈 척도 너무 과하게 하면 안 됐기에, 그녀는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면 말끔히 나을 수 있을 것처럼 가벼운 엄살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니, 너무 걸었더니 물집이 잡혔나 봐. 빨리 호텔에 들어가서 쉬고 싶어.”
“…….”
“너무 졸리기도 하고…… 또 운동화가 불편한지 발바닥도 아프고…….”
순간 태오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잠시 그녀에게서 벗어난 그의 눈동자는 몹시 심각한 기운을 띠고 있었다.
이건 곧 태오가 풀이 죽어 버릴 거라는 신호였다.
가슴은 아프지만 나봄은 어떻게든 오늘 안으로 달래 주겠노라 다짐하며 보란 듯이 무릎을 톡톡 쳤다.
“하이고…….”
의도적으로 내뱉어진 그녀의 지친 한숨.
그의 눈동자가 아까보다 흔들렸다. 그 모습의 희망이 생긴 나봄은 두 눈을 반짝이며 이어질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깊게 숨을 들이쉰 태오가 결심한 듯 나봄을 내려다보며 똑똑히 내뱉은 말은.
“나도 진짜 미안한데, 나봄아.”
“…….”
“내가 업어다 모셔 줄 테니까 제발 크루즈 같이 타 주면 안 되냐.”
사랑하는 그녀의 아픔조차 무시한 대쪽 같은 똥고집이었다.
“자, 타.”
그 목소리는 정말 크루즈까지 업어다 줄 기세로 비장해서, 나봄은 여기서 더 감히 변명을 꺼내 놓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