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다시 나를 동정해 줘
2018.03.02.
“태준 씨. 손님이 찾아왔어요.”
강릉의 요양원, 그곳에서도 가장 고요한 병실.
누군가는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소식이 그 병실에 찾아왔다.
하지만 태준은 언제나처럼 텅 빈 시선으로 창밖만 응시할 뿐,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그를 찾아온 사람들 중, 그가 만나도 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번에도 돌려보낼까요?”
담당 간호사는 물었지만 태준은 어김없이 침묵만을 유지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부지런히 감정을 지운 덕분에 밖에 서 있는 사람이 그일 거라는 기대감도 들지 않는다. 되돌아가는 발소리도 더 이상 가슴 아프지 않다.
반응 없는 태준이 익숙한 간호사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그녀가 곧 체념하고 돌아가리라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담당 간호사는 이미 정돈되어 있는 태준의 침대보를 괜히 매만지며 다소 곤란해 보이는 목소리를 이었다.
“면화가 불가능하다고 말씀은 드렸는데 같이 오신 분이 워낙 막무가내로 나오셔서…….”
“…….”
“태준 씨가 그동안 면회 거부하셨던 가족이나 회사 쪽 인맥은 아니에요. 태준 씨를 도와줬다가 인생 쪽박 차게 생긴 사람이라고, 이름을 전하면 알 거라고 하던데…….”
나를 도와줬다가 인생 쪽박 차게 생긴 사람?
아무리 살아 있는 시체를 자처한 태준이라도 그런 설명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애초부터 그가 도움을 요청했던 사람은 몇 되지 않았고, 그들에게 피해가 갔다면 그건 태준이 외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설마…….
태준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이 들려오지 않기를 애타게 바랐다.
하지만.
“단태오 씨라고…… 혹시 알고 계시나요?”
단태오.
태준이 마지막 짐을 대신 맡겨 놓고 왔던 그 사람의 이름이 기어이 간호사의 입 밖으로 꺼내지자.
“하아…….”
태준의 입술 새로 긴 한숨이 새어 나오고 만다. 그와 동시에 불안하게 뛰는 심장은 나쁜 생각만 가득 차오르게 만든다.
늘 목석처럼 앉아 있던 태준은 그제야 담당 간호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데려다주세요.”
그리고 이 병실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낮은 목소리를 꺼내 놓았다.
“그 사람은 내가 만나야 해요.”
분명 가족이 아니라고 했는데. 자신을 단태오라고 소개했던 남자와 어째서 이리도 비슷한 느낌을 풍기고 있는 건지.
태오가 만든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버린 그녀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 * *
똑딱똑딱.
면회실에 걸려 있는 벽시계의 초침 소리는 유난히도 컸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차준은 지나가는 시간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태준 씨는 어느 누구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가족도 완강히 거부하는 상태니 돌아가세요.’
요양원 로비에서 수간호사가 했던 말들은 하나같이 차준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혀 들어왔다.
이곳에 오는 동안 그에게 거절당할 걸 걱정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애원하고 매달리면 한 번쯤은 나와 줄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예감은 점차 비관적인 쪽으로 기운다. 어쩌면 그는 혹시라도 내가 앉아 있을까 봐 이곳에 나와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돌아갈까.’
차준은 고요한 숨을 고르며 아직 남아 있는 미련을 떨어트리려 노력했다.
정말 그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그의 인생에서 사라져 주는 게 도리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마음을 막 다잡으려던 그때.
끼릭― 끼릭―
익숙한 쇳소리가 면회실 밖 복도 끝에서부터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누구의 인기척인지 직감한 차준은 순간 철렁 내려앉아 버리는 가슴을 어쩌지 못했다.
“형…….”
차준은 다가오는 그를 느끼며 조여드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머지않아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고.
끼릭―
휠체어 바퀴 소리가 면회실 안으로 들어섰다. 차준의 시선은 그와 동시에 숨을 곳을 찾듯이 바닥으로 맥없이 굴러떨어져 버렸다.
“아…….”
이어지는 옅은 탄식은 태준의 것이었다.
결코 긍정적이지 않은 그의 반응에, 푹 숙여진 차준의 고개가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당황해서 얼어붙은 건 태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혹시 태오가 자신 때문에 큰 문제에 처하진 않았을까 걱정돼서 다급히 내려왔건만, 어째서 그가 아닌 차준이 이곳에 앉아 있는 건지.
누구보다 그리웠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절대 만나선 안 될 사람이기도 해서, 태준은 가까스로 잘라 놓은 감정이 다시 뿌리를 내리기 전에 서둘러 사라지기로 결심했다.
“잠시만…… 비켜 주세요. 나가야 해요.”
“태, 태준 씨?”
휠체어를 다시 면회실 밖으로 빼내려는 태준의 손길이 다급해졌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간호사는 서둘러 면회실 문을 붙잡아 주었다.
하지만 태준이 휠체어 바퀴를 뒤로 돌리기도 전에.
“……가지 마.”
차준의 목소리가 떠나는 그를 간절히 붙잡았다. 그를 애써 외면하던 태준의 눈동자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렇게 가지 마…….”
“…….”
“그렇게 가 버리면 나는 어떡하라고…….”
어떻게든 참아 보려고 했지만 쌓아 왔던 서러움은 목소리에 적나라하게 녹아 버렸다.
이런 식으로 고집부리듯이 매달리기 위해 온 게 아닌데, 내가 그에게 전하고 싶은 감정은 이렇게 어린아이 같은 것이 아닌데.
태준은 차준의 애원을 들으며 그대로 나가지도, 들어서지도 못하고 가만히 멈춰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은 그간 엇갈렸던 세월만큼이나 아프고 무거웠다.
“일단…… 자리는 비켜드릴게요. 앞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 도움이 필요하면 부르세요, 태준 씨.”
그대로 멈춰 버린 태준을 살피던 담당 간호사는 결국 붙잡고 있던 문을 조심히 닫아 주었다.
비로소 둘만 남게 된 이 공간.
“차준아…….”
굳게 닫혀 있던 태준의 입술이 열렸다.
“돌아가.”
하지만 따라붙는 말은 차준의 바람과 달리 단호했다. 계속 숨기만 급급하던 차준의 시선이 그제야 태준을 향했다.
“……뭐?”
“돌아가라고.”
“…….”
“넌 여기 있으면 안 돼.”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차준은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든 그를 붙잡아 보겠다고 이곳에 오는 동안 내내 마음을 다잡았었다.
하지만 막상 싸늘한 그를 마주하고 나니, 차준은 목구멍부터 턱 막혀 오는 기분이었다.
조금의 틈도 보이지 않는 당신의 마음을 어떻게 비집고 들어가야 할지, 무턱대고 찾아온 것이 후회될 만큼 막막해진다.
망설이던 차준은 가까스로 다시 목소리를 내뱉었다.
“……미안해.”
그건 꾹꾹 참고 있었던 사과였다.
막중한 죄책감이 이 말로 다 표현되지는 않겠지만 돌아서 버린 태준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이 한 마디밖에 없었다.
“내가 미안해. 형…….”
‘형’이라는 말을…… 대체 얼마 만에 들어 보더라.
추억에 잠기기엔 그 말이 주는 아픔이 너무나도 컸다. 태준은 무언가를 삼켜 내듯 크게 숨을 들이쉬었고, 제법 완강한 음성을 내뱉었다.
“다 늦었어. 그건 너도 잘 알고 있잖아.”
“…….”
“되돌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이만 돌아가, 차준아.”
순간 차준의 눈빛이 일그러졌다.
자꾸 밀어내기만 하는 그에게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은 분노처럼 뜨거웠으나 그렇게 날카롭진 않았다.
나는 그저 당신이…….
‘안쓰러워.’
그래, 안쓰러워. 내가 등 돌리고 동안 이런 모습으로 혼자 버티고 있었을 당신이 너무 안쓰러워 미치겠어.
“……그럼 난 들어갈게. 앞으로 찾아오지 마.”
제 할 말을 끝낸 태준은 휠체어를 문 쪽으로 돌렸다. 이 순간, 그의 가슴은 조각조각 부서지다 못해 비참하게 허물어지고 있었지만 굳은 표정에 그러한 속마음이 드러날 리는 없었다.
그래서 이대로 영원히 사라질 것처럼 차준을 떠나가려던 그때.
드륵―
의자가 뒤로 밀려나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다급한 가까워지는 발소리와 함께 낯설고도 익숙한 온기가 태준의 목덜미를 감싸 안았다.
“형…….”
바로 귓가에서 들려오는 동생의 젖은 목소리. 애가 닳다 못해 다 녹아 없어져 버릴 듯한 서러운 숨소리.
태준은 숨을 참았다.
그동안의 노력이 무색할 만큼 금세 뜨거워져 버리는 눈시울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애원은 태준의 오기를 와르르 무너져 내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부탁이야…….”
“…….”
“제발 나한테서 멀어지지 마…….”
뻣뻣이 굳은 어깨를 더욱 꽉 끌어안으며 차준은 간절히 매달렸다.
태준은 혹시나 목소리가 떨려 올까 싶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차준은 그의 동요를 느낀 것처럼 뜨거운 고백을 쏟아 냈다.
“형 없이도 버틸 수 있을 줄 알았어. 아니, 형 없이도 보란 듯이 잘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야 형이 나만 남겨 두고 죽으려 했던 걸 후회할 것 같아서…….”
“…….”
“그런데 도저히 안 되겠어. 형도 알잖아. 나한테는 이 세상에 형밖에 없는 거.”
“…….”
“형을 잃어버리는 게 너무 무서워. 형 없이 혼자 남겨지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날 싫어해도 되고, 밀어내도 되고, 내가 했던 것처럼 온갖 저주를 퍼부어도 좋으니까…….”
“…….”
“제발 내 옆에만 있어 줘…….”
“…….”
“다시 나를 동정해 줘…….”
동정.
한때 차준이 가장 원망했던 태준의 감정.
하지만 다 늦어 버렸다는 지금에 와서야 되짚어 보니, 차라리 동정받을 때가 행복했었다.
나를 가엾게 여기던 눈빛. 불쌍해서 떠나지 못하던 발걸음. 안쓰러움이 가득 담긴 손길.
그 모든 것이 동정심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살아갈 자신도 있었다. 사랑하는 건 전부 내가 해 줄 테니.
“형…….”
차준은 애절한 만큼 그의 목덜미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그의 온기는 그동안 안겨 줬던 상처들이 갚지 못할 죄로 느껴질 만큼 여전히도 따듯했다.
태준은 그런 차준의 품에 안긴 채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하아…….”
가까스로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안에 울음기가 섞여 있는 건 뺨을 타고 흐르는 투명한 눈물로도 알 수 있었다.
함께하면 고통스러워질 운명.
이때껏 숨도 못 쉬게 외롭고 괴로웠던 차준을 위해서는 내가 물러나는 것이 옳은 일인데.
돌아온 너의 존재가 나는 왜 이리도 가슴 저리도록 반가운 건지.
잘라 놓았던 미련이 자꾸만 자라난다.
이번엔 조금 더 마음껏 그를 사랑해 주고 싶다는 바보 같은 욕심이 주체하지 못할 만큼 커져 간다.
‘뒷감당을 할 수 있을까.’
태준은 잠시 일말의 이성을 붙잡고 고민했다.
그러자 답안지처럼 따라오는 건 그동안 차준을 위해 견뎌 왔던 시간들이었다.
차준과 같이 새장 속에 갇혀 있는 동안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감당하려고 했고, 짊어지고 있는 짐이 차준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악을 쓰고 버텨 냈다.
새장에서 혼자 끌려 나오자마자 보란 듯이 무너지긴 했지만…….
너만 곁에 있어 준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 어떤 고통이 찾아온다 해도 견뎌 낼 수 있다.
‘나에겐 그 누구보다 니가 제일 소중하니까.’
결심이 바로 선 태준은 휠체어 바퀴를 붙잡고 있던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자신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있는 차가운 손을 꼭 감싸 쥐었다.
드디어 맞닿은 그의 온기에 차준의 눈앞이 더욱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뚝― 떨어진 눈물과 함께 드디어 뚝― 그쳐 버린 차준의 절망.
이제야 밀려드는 서러움을 참지 못한 차준이 어깨를 떨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태준은 그런 차준을 달래려는 듯 맞잡고 있던 손을 토닥였고.
“울지 마. 괜찮아…….”
“…….”
“너한테는 형이 있으니까 아무 걱정도 하지 마.”
이젠 영원히 듣지 못할 줄 알았던 한 마디를 흘려보냈다.
한 번도 서로에게 상처 주거나 상처받은 적 없었던 그 시절의 나긋한 목소리로.
* * *
“아, 이제야 나오네.”
요양원 주차장을 서성이고 있던 태오의 눈이 반짝 빛났다.
들어간 지 한 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내는 선우차준.
열두 시 전까진 서울에 도착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건만 역시 저놈은 사람 말을 귓등으로 듣나 보다. 이제야 나타나 놓고서 뻔뻔하게 걸어오는 꼴이 참 짜증스러워 죽겠다.
“빨리 안 뛰어오냐!”
태오는 저 멀리 보이는 차준에게 버럭 소리를 쳤다.
뒤늦게 태오를 발견한 차준은 그가 있는 쪽으로 몸을 틀었고, 즐비하게 서 있는 승용차들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저거.”
그제야 태오의 눈에도 들어오는 휠체어 하나.
차준이 밀고 있는 그 휠체어에 앉아 있는 사람은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태준이 분명했다. 면회실에 들어가는 순간까지도 걱정을 하더니만 기어이 만나는 데는 성공한 모양이다.
“의절당한 것처럼 굴더니 사이좋게 같이 오네. 저럴 거 뭐하러 갈라서 가지고는…….”
아무리 싫은 상대여도 잘된 일은 잘된 일이었다. 그래서 살짝 뿌듯한 표정으로 다가오는 형제를 바라보고 있는데.
“……어?”
뭐 하나가 약간 마음에 걸렸다.
태준이 한 아름 안고 오는 저 커다란 짐 가방. 그리고 옷가지들. 마중 나오는 사람치고는 꽤나 바리바리 짐을 싸 왔는데 혹시…….
“도망……?”
그리 생각할 때쯤 어느덧 태오의 차 근처까지 다가온 태준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태오 씨. 여기까지 와 줘서 너무 고마워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온 게 아니고 끌려온 겁니다. 그런데…… 어디 가려고요?”
“아, 그게 서울 쪽 어딘가…….”
태오의 의심 가득한 질문에 태준은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그 모습이 이상했던 태오는 무표정한 얼굴로 뒷좌석 문을 여는 차준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 꺼림칙한 상황을 알아듣게 설명하는 대신 태준이 안고 있던 짐 가방부터 차에 실으며 말했다.
“형 타는 것 좀 도와줘.”
“아니, 어디 가는데.”
“차에 타서 설명할 테니까 일단 도와주라.”
“도움 청하는 주제에 말이 왜 그렇게 짧아?”
“도와주시죠, 단태오 씨.”
차준은 순순히 존댓말을 써 주었지만 태오는 왠지 그것도 약이 올랐다.
하지만 몸이 불편한 사람을 외면하기엔 마음이 모질지 못해서, 태오는 기꺼이 태준을 들어다가 뒷좌석 안에 태워 주었다.
그러고 나니 다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기 시작하는, 미처 걷히지 못한 의심 하나.
“너 혹시 지금 환자 빼돌리냐?”
더 이상 난처한 일에 얽히고 싶지 않았던 태오가 사납게 물었다.
막 휠체어를 접어 차에 실은 차준은 흙이 묻은 손을 탈탈 털었고, 다시 존댓말을 떼어 낸 까칠한 말투로 대답했다.
“퇴원 수속 밟았어. 나랑 같이 갈 거야.”
“어디를 같이 가.”
“타자, 춥다.”
차준은 같은 질문을 연달아 회피하며 태준을 태운 승용차 뒷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니 차냐? 허락받고 타.”
그 뻔뻔함이 꼴 보기 싫었던 태오는 오만상을 쓴 채 운전석에 탑승했다.
밀폐된 공간. 불편하기 그지없는 두 사람. 그리고 너무 짐을 많이 실어서 묵직해진 차.
모든 게 거슬리는 상황 속에서 태오는 짜증 가득한 손끝으로 휴대폰 내비게이션을 켰다. 옆에서 숨을 쉬는 것도 달갑지 않은 사람들은 한시라도 빨리 떨궈 주는 게 상책이었다.
“자, 탔으니까 얼른 말해. 목적지가 어디야.”
“…….”
“아, 너희 집 어디냐고.”
“…….”
태오는 재촉하듯 물었으나, 차준은 쉽사리 주소를 말해 주지 않았다.
아까부터 여기에 대해선 계속 묵묵부답이더니. 대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괜히 시간만 끄는 그에게 성질이 난 태오는 다그치듯 엄포를 놓았다.
“자꾸 입 닫고 있으면 길바닥 아무 데나 떨어트려 놓고 간다.”
그러자 시종일관 꼿꼿했던 고개를 살짝 떨어트린 채, 차준이 내뱉는 대답은.
“내 집은 안 돼. 한동안은 형을 숨겨 놔야 하는데 거긴 너무 쉽게 들켜.”
한동안 태준을 숨겨야 한다는 걸 보니 역시 무턱대고 빼 온 게 맞는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태오의 관자놀이는 다시 뻐근해져 왔지만 그는 이마를 부여잡고 다시 물었다.
“그럼 호텔로 가?”
“아니, 카드밖에 없어서 호텔은 못 가. 조회 당하잖아.”
“현금을 뽑아, 그러면.”
“갖고 있는 게 블랙카드뿐이라.”
그럼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지금.
태오는 별의별 제약이 많은 차준을 흘겨보았다.
분명 그건 대답을 독촉하기 위해 눈치를 주는 것이었으나, 흔들리는 차준의 눈빛은 원하는 바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어렴풋이 보이는 바람을 애써 외면하려는 도중 들려온 차준의 혼잣말.
“……이틀만 있으면 되는데.”
노골적으로 꺼내진 차준의 속내에, 태오의 미간이 순간 잔뜩 구겨졌다.
이게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누구 미치는 꼴을 보려고.
“귀찮게 할 거면 내려.”
“보상은 내가…….”
“보상이고 뭐고 당장 내리라고!”
태오가 잡아먹을 듯 소리를 버럭 질렀다.
여기 오는 동안 그의 호통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차준은 말없이 안전벨트부터 맸다.
그것도 단태오가 혹시나 정말 내쫓아 버릴까 싶어, 움직이기도 불편할 만큼 꽈악.
* * *
김포공항 안에 있는 만남의 광장엔 이른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많았다.
여행의 설렘과 프러포즈에 대한 긴장감을 무릅쓰고 지난밤 일찍 잠에 들었던 나봄은 반짝이는 눈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갑작스럽게 강릉으로 뭘 배달하러 갔다고 하더니 어제 집에 잘 도착했다고 전화도 주지 않았던 그녀의 남자 친구.
혹시 못 오는 거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 오늘 아침 그는 김포공항에서 보자고 전화를 해 왔었다.
어제 배달이 늦게 끝났는지, 언뜻 들어도 피곤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오늘 괜찮으려나. 무리하지 말아야 할 텐데.”
나봄은 숙소까지 가는 운전대라도 자기가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한 번 태오의 실루엣을 찾았다.
그때.
“한나봄.”
바로 뒤편에서부터 잔뜩 잠겨 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의 주인을 단번에 알아챈 나봄은 두 눈을 반짝 빛내며 고개를 돌렸다.
“아! 이제 왔네!”
하지만 드디어 그를 만났다는 기쁨도 잠시.
커다란 캐리어를 들고 그녀 앞에 나타난 태오는 마치 한숨도 자지 못한 사람처럼 얼굴이 퀭하다.
“태오야! 얼굴이 왜 그래! 어제 밤샜어?!”
나봄은 눈에 띄게 지쳐 보이는 그의 뺨을 붙잡고 물었다.
그러자 태오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고.
“자긴 잤는데, 날강도 같은 투숙객한테 침대를 내어 주는 바람에…….”
“날강도?”
“아니야, 신경 쓸 거 없어. 어차피 2박 3일 뒤에 내 인생에서 사라질 놈인데 뭐.”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길 했다.
날강도는 뭐고, 2박 3일 뒤에 사라지는 놈은 또 뭐야.
“그게 무슨…….”
나봄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눈빛으로 되물으려 했다.
하지만 복잡한 집안 얘긴 나봄에게 비밀로 묻어 두고 싶었던 태오는 두 손으로 그녀의 볼을 꼬옥 감싸 쥐었다.
“우리 나봄이는 잘 잤어?”
“어? 어.”
“우리 나봄이 아침은 먹었고?”
“안 먹었지.”
“그럼 오빠랑 아침 먹으러 가자. 우리 나봄이.”
갑자기 우리 나봄이는 또 뭐야.
오늘 컨디션이 좋은 거야? 안 좋은 거야?
아까까지만 해도 먹구름이 잔뜩 낀 듯 했다가, 곧바로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것처럼 밝아진 태오는 나봄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봄의 캐리어까지 챙겨 들고 먼저 앞서 가는 태오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마누라! 얼른 와! 서방 옆구리 시리다!”
사람들 사이에서 태오가 낯 뜨거운 호칭으로 나봄을 불렀다. 오늘따라 과하게 적극적인 모습에 나봄의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누, 누가 서방이야!”
그래서 괜히 한 번 튕겨 내자 태오는 언제 심란해했었냐는 듯 해맑은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오늘 밤부터 내가 니 서방이지.”
그건 오늘 나봄에게 프러포즈를 할 생각인 태오가 주는 작은 힌트였다.
하지만 내일 태오에게 프러포즈를 할 계획이라, 오늘 밤엔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있는 나봄은 마냥 어리둥절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