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남친이 내게 반했다-87화 (87/104)

87. 지금부터는 니가 단태오야.

2018.02.26.

“수건, 면도기, 칫솔은 집에 있는 거 가져가면 되고 꽃은 그쪽에서 준비해 준다고 했고…….”

우드레일 퍼니쳐 팩토리 팀장 사무실.

오늘도 업무를 배정받지 못한 태오는 웬일로 분주했다.

나봄과의 여행, 그리고 그녀 몰래 준비한 프러포즈 날이 벌써 내일로 다가온 지금.

태오는 완벽한 하루를 보내기 위해 꼼꼼하게 준비물들을 체크하는 중이었다.

“아, 반지. 집에 가자마자 반지부터 캐리어에 넣어야겠다.”

프러포즈 반지는 나봄과 어울리는 플라워 장식이 인상적인 로즈골드 링으로 준비했다.

이거 하나를 사는데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반지를 고르는 그가 하도 심각해 보여서 매장 직원 전부가 힘을 합쳐 한 시간 동안 도와줬었다. 그 덕분에 겨우 선택한 반지는 다행히 보면 볼수록 태오의 마음에 쏙 들었다.

이 정도의 준비라면 급하게 준비한 티가 전혀 나지 않을 것 같아.

“자, 이 정도면 챙길 건 어느 정도 챙겨 놨네.”

확인이 끝나자 태오는 후련한 표정으로 수첩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올려놓은 탁상시계를 바라보았다.

퇴근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시시때때로 확인하는 것. 이건 회사에서 도태되기 전까지는 절대 하지 않았던 행동이었다.

어차피 책임져야 할 업무가 너무 많아서 퇴근 시간이 되어도 집에 가지 못하는 게 다반사였으니까.

하지만 요즘엔 떨어지는 업무도 없고, 참석해야 할 회의도 없고,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칼같이 회사를 빠져나가도 말리는 사람 한 명이 없고.

강제적으로 한가하다 못해 무료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태오는 마음이 허하고 울적해질 때가 많다. 가끔씩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불쑥불쑥 치고 올라오는 울화도 슬슬 감당이 안 되려고 한다.

이 찰나에 떠나게 된 나봄과의 제주도 여행은 어쩌면 그에겐 구원과도 같았다.

제주도 옥빛 바다가 그렇게나 예쁘다던데.

태오는 사랑하는 나봄과 바닷가를 거닐면서 나쁜 감정들을 모두 파도에 실어 보내고 올 참이다.

“그래, 퇴근 시간까지 딱 세 시간 남았네. 조금만 버티면 된다, 조금만…….”

태오는 굳은 어깨를 스트레칭 하며 착잡한 심경을 달랬다.

그러고는 아무 것도 안 하고 있는 게 더 자존심 상해서, 지난 업무 보고서들이라도 훑어보기 위해 파일 하나를 집어 들었다.

똑똑―

그때, 오랜만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태오의 눈동자가 잔뜩 긴장한 채 사무실 문으로 향했다.

“들어오세요.”

단조로운 어조로 말은 하지만 태오의 심장은 불안하게 뛰기 시작한다.

혹시 팀장직에서 물러나라고 하는 게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사무실을 빼라고 하는 건 아닐까.

밖에선 사람들 분위기 때문이라도 멀쩡히 버티기 힘들 것 같은데,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나쁜 생각들은 태오의 심장을 불안하게 조여 왔다.

그래서 구겨진 미간도 제대로 못 펴고 있던 순간.

“……단태오 씨.”

철컥, 열린 문으로 뜻밖의 인물이 들어섰다.

차라리 나쁜 소식이 찾아오는 편이 나을 정도로 달갑지 않은 그 사람을 보자 태오의 눈이 단번에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선우차준…….”

태오가 직함조차 생략한 채 그의 이름을 부르자, 차준은 사무실에 마저 몸을 들여놓고는 문을 닫았다.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당장 꺼져.”

그의 숨소리도 듣기 싫었던 태오는 날 선 말로 그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차준은 잠시 잠깐도 멈칫하지 않고 태오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이게 뭐하자는 짓이냐?”

태오가 화를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차준은 그런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마른 입술을 열었다.

“당신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뭐?”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단태오 씨…….”

시비를 걸어올 거라 생각했던 차준의 부탁에 태오의 눈빛이 더욱 사납게 일그러졌다.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었다면 내게 와서 부탁을 하진 않았을 텐데. 사람을 이 꼴로 만들어 놓고선 뻔뻔하게 도와 달라니.

“꺼져.”

그의 부탁은 절대 받아 주고 싶지 않았던 태오는 단호히 말했다. 그러나 차준은 물러나지 않고 한 번 더 목소리를 이었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건 뭐든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 한 번만…….”

애절한 그의 음성은 태오를 설득시키기는커녕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미 비참해질 대로 비참해진 나의 처지는 그가 책임져 준다고 해서 되살아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니가 안 꺼지겠다면 내가 내쫓아 줄게.”

경고는 이쯤이면 되었다.

그래도 물러나지 않은 차준을 직접 끌어내야겠다고 생각한 태오는 책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사무실 문 앞으로 걸어가 거칠게 문을 열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애사심으로 직원들 앞에서 쪽팔리진 않게 해 줄게.”

“…….”

“그러니까 지금 당장, 니 발로 니가 나가세요.”

그리 말하는 태오의 목소리엔 마지막 인내심이 가로막고 있는 분노가 잔뜩 스며 있었다.

그걸 똑똑히 마주하고 있는 차준의 눈빛이 옅게 떨렸다.

“얼른.”

태오는 고개를 까딱하며 재촉했으나 차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꺼내 놓는 한 마디는 겨우.

“……부탁합니다.”

뭘 가지고 그리 절절하게 매달리는지, 쉽사리 얘기를 꺼내지 못하는 걸 보면 부탁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 분명했다.

사람을 또 난처하게 만들거나 곤경에 빠트리겠지. 너 하나만 편하자고.

그런 차준의 야비한 사고방식이 끔찍이도 싫었던 태오는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내가 개처럼 끌어낼까!”

태오가 내지른 고함에 다른 직원들의 시선이 사무실 쪽으로 쏠렸다. 그러나 태오는 아랑곳 않고 사나운 적대감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내가 널 왜 도와줘야 되는데! 그게 잔심부름이든, 일생일대의 위기든, 니가 나한테 뭘 부탁할 처지가 되기나 하냐?!”

“…….”

“뻔뻔하고 양심 없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여기가 어디라고 내 눈앞에 나타나!”

쏟아지는 태오의 분노에, 차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입술을 떼어 내려 했다.

하지만 벌써 몇 년 동안이나 타인에게 꺼내 놓은 적 없던 그 이름은 쉽사리 혀끝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요.”

결국 내뱉어지는 건 주어가 없는 애매모호한 말뿐.

참다못한 태오는 차준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런 뒤 사람들이 보든 말든 그를 문 밖으로 내동댕이쳐 버렸다.

“아, 본부장님!”

“본부장님! 괜찮으세요?!”

직원들 몇 명이 쓰러질 뻔한 차준에게로 달려왔다.

니들이 내가 넘어졌어도 그렇게 했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 태오의 감정은 더욱 격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차준은 내 처지를 우습게 만들기 위해 이곳에 찾아온 것 같다.

“부탁은 니 옆에 달라붙은 새끼들한테 해.”

“…….”

“나보다 잘 도와주겠네.”

더는 그와 엮이고 싶지 않았던 태오는 차디찬 욕설을 마지막으로 등을 돌렸다. 하지만 그 자리를 떠날 수는 없었다.

“너밖에 없어…….”

“…….”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너밖에 없다고!”

그가 사무실 문을 닫으려 하자마자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태오의 옷자락을 붙잡아 버린 차준 때문에.

“이 손 부러트려 버리기 전에 놔라.”

태오는 거친 협박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다시 바라본 차준은 어느새 태오의 앞에 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래서 당황한 채 굳어 버리자, 차준은 지금까지 본 적 없던 애절한 표정으로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은 채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겨우 형을 찾았는데 만날 수가 없어! 나를 피해 숨은 거라 아무리 찾아도 나타나 주질 않아!”

“…….”

“나도 너한테 이런 부탁하면 안 된다는 거 아는데! 정말 하고 싶지 않은데!”

“…….”

“내 힘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어…….”

“…….”

“붙잡는 것도…… 다시 되찾아 오는 것도…….”

차준이 간절하게 찾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태준이었다.

그가 제 욕망을 위해 형을 버렸다고 생각했던 태오는 뜻밖의 부탁에 혼란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잃어버렸다’, ‘붙잡지 못하고 되찾아 오지도 못 한다’라는 표현은 매정하게 내다 버린 사람이 할 소린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섣부른 반응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태오에게 차준은 울음기 섞인 음성을 흘려보냈다.

“마지막으로 하는 부탁이야. 오래 걸리지도 않을 거야.”

“…….”

“한 번만 도와주면 니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줄게. 꺼지라고 하면 죽을 때까지 숨어 살고, 너의 인생을 책임지라고 하면 내 자리도 너한테 넘겨줄게. 그러니까 제발…….”

“…….”

“제발 한 번만 도와줘.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형을 부를 사람은 너밖에 없어.”

차준이 다시 한 번 안타까운 부탁을 꺼내 놓는 동안 태오는 비참하게 숙여진 그의 고개를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요즘 들어 수척해 보인다 싶더니, 그의 뒷목엔 앙상한 목뼈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자신밖에 생각하지 못 하는 이기적인 새끼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본인조차도 행복해 보이지 않는 비상식적인 상황이었다.

이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매달려서 얻고자 하는 게 뭔지. 내가 뭘 해 줄 수 있다고 이러는 건지.

“하아…….”

혼란스러워진 태오는 머리를 흩트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차준에게 쏠린 사람들의 눈동자를 훑어보았다. 사람 꼴이 어찌되든 강 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순간적으로 화악 짜증이 났다.

“다들 구경났어? 니들 일 아니면 신경 꺼.”

침묵을 뚫고 흘러나온 사나운 그의 음성.

노골적으로 일그러진 그의 눈빛에 사람들의 관심이 강제로 흩어졌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 차준만은 떨구었던 고개를 힘겹게 들어 올리고 다시 태오를 마주했다.

태오는 그런 그를 여전히 가시 돋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일단 꼴 사납게 굴지 말고 일어나.”

“…….”

“일어나서 얘기해.”

그토록 모질었던 손길을 내밀었다.

드디어 떨어진 차가운 호의에, 차준의 눈가가 참을 수 없이 뜨거워져 버렸다.

* * *

명동의 한 백화점.

“이걸로 할게요.”

삼십 분가량 고민하던 나봄이 드디어 까만색 가죽 시계 하나를 골랐다.

그녀의 결정만을 기다리던 점원은 화색이 도는 얼굴로 박수를 쳤다.

“탁월한 선택이세요. 이런 디자인은 질리지도 않고 호불호도 없어요. 분명 남자친구도 좋아하실걸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나봄은 자신이 고른 시계를 한 번 더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태오에게 가장 잘 어울릴 것 같아 고른 까만색 가죽 시계는 다소 비싸긴 하지만 확실히 태가 달랐다.

“가격이 얼마라고 하셨죠?”

제 선택에 확신을 얻은 나봄은 지갑을 꺼내며 물었다. 점원은 새 제품을 꺼내며 친절히 대답했다.

“이백삼십사만 원입니다.”

“아아…… 맞다.”

이백삼십사만 원.

그건 나봄의 월급에서 딱 이십만 원 모자란 가격이었다. 그 숫자를 듣는 순간 나봄은 살짝 손이 떨려 오긴 했으나, 프러포즈 링 대신 주는 선물이니 과감하게 결제하기로 했다.

이걸 차고 환히 웃을 내 남자를 생각하니 이 정도 돈은 아깝지도 않다.

“여기 이 카드로 계산해 주세요.”

“네, 할부는 어떻게…….”

“십 개월로 부탁드립니다!”

나봄은 그리 대답하며 앞으로 십 개월 동안은 제 용돈을 줄여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 어떠하리. 막상 점원에게 카드를 넘기고 나니 부담감보다는 흐뭇함이 찾아온다.

어느덧 코앞으로 다가온 프러포즈.

나봄은 여행 준비물은 아직 안 챙겼어도 프러포즈 준비는 완벽하게 끝마쳤다.

크루즈에서 프러포즈 때 틀어 줄 음악도 직접 선곡하고, 그때 나올 메뉴도 세심히 골라 주문하고.

게다가 컴퓨터 좀 다루는 소라의 도움을 받아 엉성하게나마 프러포즈 영상도 제작했다.

사귄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아 같이 찍은 사진은 몇 장 되지 않았지만, 소라가 적절하게 효과를 섞어 준 덕분에 완성된 영상은 제법 그럴싸했다.

‘좋았어, 이제 시계만 챙기면 프러포즈 준비는 끝이네.’

신이 난 나봄은 입가에 싱그러운 미소를 퍼트렸다. 때마침 계산을 끝낸 점원은 그녀에게 카드를 돌려주며 말했다.

“프러포즈 선물이라고 하셨죠?”

“네.”

“여자분이 프러포즈 하는 건 처음 봐요. 남자 친구 정말 복 받았다.”

점원의 말에 나봄은 잠시 생각했다.

정말 그런가, 하고.

하지만 그동안 태오와의 시간을 되짚어 보면 되짚어 볼수록 그로 인해 행복했던 기억들이 가득 떠올라서.

나봄은 점원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기보단 미소를 머금은 채 대답했다.

“제가 복 받았어요. 그러니까 프러포즈도 먼저 하죠.”

남자 친구 자랑을 하는데 내 칭찬을 듣는 것보다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행복에 겨워하고 있자니 너의 얼굴이 몹시도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지금 당장 보러 갈 수는 없으니.

‘태오한테 전화라도 해 볼까.’

나봄은 시계가 포장되는 짧은 시간 동안이라도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휴대폰을 들었다.

뚜루루루― 뚜루루루―

전화를 걸자마자 들려오는 단조로운 통화연결음은 그 어떤 사랑 노래보다도 나봄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여보세요.

그토록 듣고 싶었던 낮은 목소리에 그녀의 심장이 두근두근 떨려오기 시작했다.

“태오야! 뭐하고 있어!”

잔뜩 신이 난 나봄은 밝은 목소리로 그의 안부를 물었다.

지금쯤이라면 분명 회사에 있거나 집에서 쉬고 있을 줄 알았는데, 곧이어 들려오는 대답은 뜻밖이었다.

―강릉 왔어.

“강릉? 강릉은 갑자기 왜?”

―아…… 출장이라서.

잠깐의 텀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나봄은 ‘출장’이라는 단어가 반가웠다.

요즘 회사에서 외톨이처럼 지낸다고 해서 많이 걱정했는데, 출장까지 간 걸 보니 분위기가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걸까.

―넌 어디야?

그때, 태오가 갑작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백화점 왔어!”

나봄은 별생각 없이 솔직하게 대답했지만, 막상 뱉어 내고 나니 프러포즈 선물을 사는 게 들킬 것 같아 걱정스러워졌다.

―백화점은 왜? 뭐 살 거 있어?

역시나 따라오는 질문은 사실대로 말하기 살짝 곤란했다.

시계점이라고 하면 은근히 눈치가 빠른 넌 나의 비밀스러운 계획을 눈치챌지도 몰라.

“아니, 뭐 그냥 구경…… 넌 강릉 어디야?”

나봄은 그의 질문을 대충 얼버무리기 위해 되물었다. 그러자 태오는 잠깐 헛기침을 하는가 싶더니, 이윽고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냥…… 주차장.

“아아, 지금 도착한 거야? 업체 미팅? 아니면 세미나?”

―……배달?

배달은 또 뭐야. 가구 현장팀은 그런 것도 도맡아 하나.

―나 이제 들어가 봐야 해서. 이따가 배달 끝내고 다시 전화할게. 내일 제주도도 가야 하니까 그만 돌아다니고 일찍 자.

나봄이 궁금증을 품을 때쯤, 태오는 다급한 말투로 통화를 마무리 지으려 했다.

평소 의심이 없는 나봄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아쉬움을 담아 대답했다.

“응, 너도 일찍 자! 강릉에서 오려면 힘들겠지만!”

―배달은 금방 끝나니까 열두 시 전엔 도착할걸. 자기 전에 전화할게.

“꼭 전화해! 기다릴게!”

―그래, 내가 도착하자마자 기절을 하더라도 꼭 너랑 통화는 하고 쓰러지마.

그리움이 묻어 나오는 약속을 마치고서야 두 사람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밤이 새도록 휴대폰을 붙들고 있어도 모자라겠지만, 두 사람은 현재 오래 대화할 상황이 아니었다. 미처 말하지 못한 각자의 은밀한 비밀 때문에.

나봄의 경우엔 프러포즈 시계가 그랬고, 태오의 경우엔 강릉까지 배달하다시피 데려온 사람이 그랬다.

지금 태오가 서 있는 이곳은 자그마치 세 시간 반을 달려 겨우 도착한 강릉의 낡은 요양원.

“야.”

태오의 삐딱한 목소리에, 문 앞에서 멈춰 있던 차준이 고개를 틀었다.

사실 차준은 태오보다 한 살이나 많았으나, 그런 걸 따지기엔 차준의 처지가 결코 우세하지 못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태오는 일부러 무례함을 보태 쏘아붙였다.

“내가 너 때문에 거짓말까지 쳐야겠냐?”

“…….”

“귓구멍이 제대로 달려 있다면 들었겠지만, 나 내일 내 여자 친구랑 2박3일로 제주도 간다. 여기 두고 가버리기 전에 용건은 짧게 끝내고 와라.”

이곳에 데려다주자마자 쌩하니 혼자 가버릴 줄 알았는데, 저리 말하는 걸 보니 잠깐은 기다려 줄 모양이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쓸데없이 책임감 있는 녀석, 이라고 생각하며 차준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대답을 내뱉었다.

“어차피 길게 끌 수도 없어. 아예 나와 주지 않을지도 모르고.”

“그런 거면 더 돌아 버리지. 여기까지 너랑 기분 더럽게 드라이브하러 온 꼴이니까.”

태오의 가시 돋친 대꾸를 들은 차준은 받아칠 기운도 없는지,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러고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고요한 숨을 내쉬며 문고리를 잡는 차준의 손은 옅게 떨리고 있었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당신이 있겠지.

내 얼굴을 보면 화를 낼까. 슬퍼할까. 아니면 더는 쳐다보지 못하고 등을 돌려 버릴까.

밀려오는 두려움은 차준의 꾹 깨문 입술에서 여실히 드러냈다.

하지만 더는 망설일 시간조차도 없어, 굳게 마음먹고 문을 열어젖히려던 순간.

“선우차준.”

태오의 사나운 음성이 꺼내졌다. 대답 대신 차준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이번엔 또 무슨 시비를 걸려나, 싶었는데 뒤에서 무심히 꺼내진 말은.

“지금부터는 니가 단태오야.”

“…….”

“니 형, 어떻게든 만나서 내 이름 빌린 값 제대로 갚아.”

태오의 비장한 목소리를 들은 차준은 떨리는 시선을 정리하려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문고리를 붙잡는 차준의 손에 조금 더 확신이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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