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나도 한다, 프러포즈
2018.02.19.
“한나봄…… 왜 그래?”
그녀의 붉어진 눈가를 알아챈 태오가 물었다.
나봄은 금방이라도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울음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두 눈을 꾹 내리감았지만, 덕분에 뜨거운 눈물방울만 또르르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무슨 일 있어?”
그 모습에 당황한 태오는 조금 더 걱정 어린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이렇게 불안하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나는 또 이미 지쳐 있는 그의 어깨에 짐 하나를 더 얹어 주고 있다.
나봄은 그가 걱정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 울먹임이 가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입술을 떼어 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좁은 차 안, 고요히 흘러나온 사과에 태오의 숨소리가 일순 멈추었다.
그건 태오가 이 순간을 피하고 싶어 한다는 뜻이었으나, 나봄은 어렵사리 뒷말을 이어 나갔다.
“요즘 니가 많이 힘들었다는 거 뒤늦게 듣게 됐어. 넌 누구보다 일을 좋아했던 사람이었으니까, 얼마나 속이 상했을지 가늠도 안 돼.”
“…….”
“털어놓을 사람이 필요했을 텐데…… 그게 내가 되지 못해서 미안해.”
그녀의 진심 어린 사과를 들은 태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외면이 아닌 회피처럼 보였다. 그는 지금 그녀도 알아채고만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어떻게든 숨기고 싶어 한다.
“……아무 일도 없어.”
그런 그가 겨우 꺼내 놓은 대답은 순 거짓말이었다. 일렁이는 나봄의 눈동자가 태오의 시선과 맞닿을 때까지 들어 올려졌다.
“태오야…….”
“나 정말 괜찮아. 회사가 힘들게 했던 거야 늘 있었던 일이고, 요즘 일이 갑자기 줄어든 건 무슨 문제가 생겨서가 아니야. 그냥 일이 적게 들어오는 기간이라 그런 거야.”
“…….”
“다른 사람 눈엔 어떻게 비칠지 모르지만 나 정말 아무 일도 없어.”
다급히 이어지는 그의 말들은 비참한 제 처지를 변명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더욱 안쓰러웠던 나봄은 움츠러든 그를 달래 주려 잡은 손에 힘을 더했다.
하지만.
“그러니까……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
뒤늦게 그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이 꺼내지자, 나봄은 태오가 하려는 말이 변명이 아니라 위로임을 깨닫는다.
그는 지금까지 항상 그래 왔듯이, 자신의 상황이 만신창이가 된 와중에도 나봄의 마음부터 신경 써 주려나 보다.
그러느라 지금껏 제 감정은 제대로 위로받지도, 추스르지도 못했으면서.
“그런 말 말고.”
나봄은 태오의 다정한 말을 거둬 냈다.
그러고는 지친 그에게 제대로 품을 내어 주기로 했다.
“차라리 너무 힘들다고, 그래서 화가 난다고 마음껏 불평했으면 좋겠어.”
“…….”
“완벽하지 않아도 되고, 강한 모습만 보이지 않아도 되니까 나 때문에 버티고 있지 말고…….”
“…….”
“나한테 조금이라도 기대 줘. 나는 너한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
나봄의 솔직한 고백에 태오는 잠시 마른침을 삼켜 넘겼다.
그러고선 잠시 고개를 떨구었다. 그 모습은 얼핏 거부하는 것처럼 보여서 나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린 그는 여느 때처럼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고.
“너 때문이 아니라 너 덕분에 버티는 거야.”
생각지 못한 한 마디를 꺼내 놓았다.
“태오야…….”
진심 어린 그의 말에 나봄의 눈빛에 옅게 흔들렸다.
태오는 그녀를 웃음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절대 못 참았을 화도 너 덕분에 참는 거고, 눈에 보이는 건 전부 다 들이받아 버리고 싶은 마음도 너 덕분에 누르는 거야.”
“…….”
“내가 이만큼이나 버틸 수 있는 건 전부 다 니가 있어 주는 덕분인데, 내가 무슨 불평을 할 수 있겠냐.”
“…….”
“하루 종일 고마워하기에도 모자라잖아.”
천천히 들어 올려진 태오의 손이 하얀 그녀의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차갑기만 했던 그의 손은 어느새 따듯한 온기로 물들어 있었다.
그 따스함을 느끼고 나서야 겨우 잠잠해지는 마음속의 불안.
하지만 숨이 트이기보단 다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따듯하다 못해 뜨거운 그의 온기는 자꾸만 눈가를 붉힌다.
이번에도 위로받는 건 본인인 것 같다는 생각에, 나봄은 울먹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괜찮아?”
“어, 괜찮아.”
“안 괜찮으면 말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 줄게.”
“그냥 평생 내 옆에 있어 줘. 그거 하나면 돼.”
옆에 있어 달라는 그 말은 태오에게 가장 절실한 바람이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간절하게 원했던 그녀만 계속 곁에 있어 준다면 어떤 풍파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나봄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마음속으로 굳은 다짐을 했다.
그의 부탁대로 나는 언제까지고 그의 곁에 있어 주겠다고. 혹시 나중에 그의 마음이 바뀌어서 멀리 떠나 달라고 말한대도, 오늘을 기억하며 절대 나 혼자 멀어지지 않겠다고.
바로 그 순간.
나봄의 머릿속에 태오를 찾아온 용건이 스쳐 지나갔다.
이런 얘기는 저녁 식사 자리로 이동한 뒤에 꺼내 놓아도 늦진 않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가장 진심에서 우러나올 때. 그녀가 하려는 말에 가장 확신이 설 때.
진심을 담아 꺼내 놓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결심이 선 나봄은 서둘러 젖은 눈가를 닦았고, 태오와 다시 한 번 시선을 맞추었다.
“평생 곁에 있어 주는 사이가 되려면, 아무래도 이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
“지금 여기서 말해도 될까?”
그런 뒤 태오에게 꺼내 물은 질문은 매우 의미심장했다.
평생 곁에 있어 주는 사이가 되자는 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결혼하자는 말밖에 없는데.
내가 김칫국을 마시고 있는 건가. 아니면 나한테 프러포즈라도 하려고 하는 건가.
한순간에 머릿속이 복잡해진 태오는 잔뜩 동요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봄은 그런 태오에서 눈을 떼지 않더니, 이내 태오를 당황시킬 만한 서론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우리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알고 지낸 시간이 길잖아.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래서?”
“그래서 말인데…… 난 언제까지나 너한테 힘이 되어 주고 싶고, 항상 곁에 있어 주고 싶으니까…….”
딱 거기까지 말했을 때.
태오의 두근대다 못해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김칫국을 마시지 않으려 노력은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이런 분위기에서 꺼내질 고백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설마 한나봄이 먼저……?’
태오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마른침을 삼켰다. 눈앞의 나봄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돼 보여서, 태오의 기대엔 점점 더 확신이 깃들었다.
프러포즈라면 내가 먼저 성대하게 해 주고 싶었는데. 그래도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렸으니까 우선은 받아야 하나?
그래, 내 인생의 마지막 여자는 너로 정한 지 오래이니.
“그러니까…….”
얼마든지 프러포즈해. 난 망설임 없이 받아 줄게.
“나랑 제주도 가지 않을래?”
“좋아!”
태오는 나봄의 질문이 꺼내지기가 무섭게 곧바로 대답했다.
하지만 일단 말부터 내뱉고 나서 곰곰이 되짚어 보니, 그녀가 꺼낸 말은 태오의 기대와 살짝 어긋나 있음을 깨달았다.
제주도…….
프러포즈인 줄 알았는데 제주도…….
나봄에겐 제주도에 함께 가자는 말이 프러포즈와 같았지만, 태오는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그래서 김이 새어 버린 그에게 나봄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여행이 그렇게 가고 싶었어?”
“아…….”
“다행이다. 혹시 시간 없거나 갈 기분 아니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아니, 뭐…….”
“되는 시간 말해 주면 내가 무조건 너한테 맞출게! 오늘 안에 꼭 알려 줘!”
성대한 크루즈선 프러포즈가 달린 만큼 그리 말하는 나봄의 눈빛은 비장했으나, 태오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만 덧없이 끄덕였다.
아, 한동안 좋은 일만 생겨서 잊고 있었는데 난 원래 기대하면 안 되는 놈이었지.
괜히 헛물켰다가 귀만 빨개졌네. 에라이.
* * *
“다 안 비켜?! 나 강태준 친엄마 되는 사람이야!”
강릉 요양원 로비.
한적한 그곳에 날카로운 여자의 고함이 울렸다. 머리가 헝클어진 줄도 모르고 소란을 피우는 사람은 다름 아닌, 태준을 찾아온 서미란 대표였다.
“환자들 안정을 위해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환자분께서 면회를 거부하셨어요! 저희도 그런 분을 억지로 끌고 나올 수는 없잖아요!”
간호사들은 발악하는 그녀의 두 팔을 붙잡고 필사적으로 막아섰다.
하지만 서 대표는 좀처럼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아들을 가둬 놓은 이 공간이 요양원인지 수용소인지 분간도 안 될 만큼 허름해서, 태준을 일 분 일 초라도 더 이곳에 놔둘 수 없었다.
“내 아들 멀쩡한 건 맞아?! 왜 못 보게 하는 건데!”
“면회를 거부하신 건 환자분 의사라고 몇 번을 말씀드려요!”
“그럼 내가 보러 갈 거야! 내 눈으로 우리 태준이 멀쩡하게 있는지 봐야겠어!”
점점 더 커지는 소란에 환자들은 물론, 모든 임직원이 로비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막을수록 격분하는 그녀는 주변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더 몸부림을 쳤다.
“놔! 놓으라고! 내 아들한테 가겠어!”
바로 그때.
“아무리 친모라고 해도 서미란 씨는 선우태준 씨를 절대 만날 수 없습니다.”
서 대표의 뒤편에서부터 굵직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그러진 서 대표의 시선이 매섭게 등 뒤를 향했다.
“……뭐?”
그러자 중년 여성은 그녀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제 소개부터 건넸다.
“저는 이 병원의 원장입니다. 선우태준 씨의 진료를 도맡고 있죠.”
“우리 태준이 이름 앞에…… 그딴 더러운 성 갖다 붙이지 마.”
서 대표는 경고성 짙은 음성으로 엄포를 놓았다. 하지만 원장은 아랑곳 않고 여유 섞인 표정으로 제 할 말을 이어 나갔다.
“태준 씨의 문제는 상담을 통해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입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많이 지친 상태더군요. 그런데 서미란 씨.”
“…….”
“태준 씨의 정서적인 불안감과 강박증이 모두 서미란 씨, 당신에게서 비롯된다는 걸 아십니까?”
“닥쳐…….”
“태준 씨는 당신으로부터 격리되는 것만으로도 빠르게 안정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면회라니요. 환자의 차도를 위해서라도 허가할 수 없지요.”
“뭣도 모르면서 그 입 닥치라고!”
서 대표는 소리를 내지르며 자신을 붙잡고 있는 간호사들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서슬 퍼런 눈빛을 띤 채 원장에게 다가갔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으나 서 대표의 분위기는 감히 막아설 수 없을 정도로 위압적이었다.
어느 새 원장의 바로 앞까지 다가간 서 대표는 그녀를 똑바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서재균 회장의 개 노릇하면 콩고물이라도 떨어질 줄 알지?”
“…….”
“틀렸어. 실세는 나야. 이깟 감옥 같은 정신병동쯤이야 한순간에 허물어 버릴 수도 있어.”
그녀의 협박엔 적의가 가득했다. 초조해진 간호사들은 파르르 눈빛을 떨며 원장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겁에 질리기는커녕, 오히려 두 눈에 또렷이 힘을 준 원장은 단호한 음성을 내뱉었다.
“서미란 씨, 저는 누구의 개가 아니라 의사입니다. 환자에게 위험한 존재를 격리시키는 것 역시 의사로서의 적절한 조치이구요.”
“하…… 위험한 존재?”
“태준 씨는 도피처가 필요해서 제 발로 이곳에 입소했습니다. 그런 사람을 억지로 끌어내겠다는 건 그 사람을 다시 당신의 품 안에 가둬 두고 싶다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아요.”
원장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 가시처럼 서 대표의 가슴에 박혀 왔다.
서 대표는 당장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더 이상 짖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으나, 부들거리는 두 손은 오히려 움직이질 않았다.
그 틈을 타, 원장은 서 대표가 알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던 사실들을 적나라하게 짚어 냈다.
“태준 씨와 상담을 해 보니 당신은 그동안 태준 씨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감당하려 했던 희생적인 어머니셨더군요.”
“…….”
“하지만 그런 행동 자체가 태준 씨를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도태시키고 있다는 거, 인지는 하고 계십니까?”
“…….”
“그동안 태준 씨를 어느 누구도 접근할 수 없게끔 철저하게 격리시켜 놓았으면서, 지금 이곳에서 홀로 지내는 건 그렇게나 불쌍하던가요?”
아니야. 나는 그 애를 격리시키지 않았어.
내뱉고 싶은 말은 분명히 있었으나 입술은 미처 떨어지지 않았다. 괴로워했던 아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일말의 양심이 그녀의 변명을 막아 놓은 탓이었다.
원장은 그런 서 대표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다소 누그러진 말투로 말을 이었다.
“무엇이 그토록 걱정스럽고 힘들어서 고군분투하셨는지, 일개 담당의인 저로서는 알지 못합니다.”
“…….”
“하지만 태준 씨는 지금 자신을 지켜 주는 사람보단 믿어 주고 의지해 주는 사람이 필요해요. 어떤 모습이든, 어떤 삶을 살든 응원해 줄 수 있는 사람 말이에요.”
그 얘길 듣는 순간 어째서 눈엣가시 같았던 얼굴이 떠오르는 건지.
“제가 감정적으로 말씀드렸지만, 서미란 씨가 나쁜 어머니라는 뜻은 아니었어요. 저는 다만…….”
“…….”
“누구보다 선우태준 씨를 위하는 만큼, 그 사람만을 위한 올바른 판단과 행동을 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원장이 마지막 한 마디를 건넬 때쯤 서 대표의 머릿속은 이미 새하얘져 버렸다.
그래서 아무런 대답도 하진 못했으나, 적어도 지금까지 그를 위해서랍시고 했던 일들이 태준만을 위해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작아지지 않았으면 좋겠고, 무너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를 향한 숱한 걱정과 바람들은 어쩌면, 혜성처럼 빛나던 너를 잃고 싶지 않았던 내 욕심인지도 모르겠다.
난 너의 미래를 보지 못하고 오로지 빛만 쫒아 다니던 하루살이에 불과했구나. 다 늦어 버린 지금 와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 * *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자정에 가까운 늦은 밤.
나봄을 데려다주고 집 근처 카페에 들린 태오가 차가운 커피를 주문했다.
나봄과의 저녁 식사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끝났지만. 그를 둘러싼 문제들도 거의 잊혔지만.
마음속에 콕 박힌 채 좀처럼 빠져나가질 않는 사건 때문이었다.
‘우리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알고 지낸 시간이 길잖아.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래서 말인데…… 난 언제까지나 너한테 힘이 되어 주고 싶고, 항상 곁에 있어 주고 싶으니까…….’
태오의 불안을 위로해 주려 했던 그녀가 갑작스럽게 내뱉은 말들.
그건 다시 되짚어 봐도 프러포즈의 전조였다.
알고 지낸 시간이 길고 항상 곁에 있어 주고 싶으니까 결혼하자. 봐 봐, 뒤에 결혼 얘기가 따라 나와도 전혀 위화감이 없잖아.
‘나랑 제주도 가지 않을래?’
그런데 갑자기 제주도 타령이라니.
알고 지낸 지 오래됐고, 계속 힘이 되어 주고 싶고, 평생 곁에 있고 싶으면 보통 제주도를 가나?
‘그, 그래. 이번 주 금요일 휴가 내고 금토일 이렇게 갔다 오자. 제주도.’
괜찮은 날짜를 바로 말하라 해서 대답을 하긴 했지만, 기대했던 만큼 부풀어 오른 그의 마음은 이미 바람 빠진 풍선처럼 풀이 죽어 버린 후였다.
그녀와 단둘이 가는 제주도 여행.
이쪽도 정말 꿈만 같고 좋긴 하다만, 더 기쁠 수 있었던 걸 김칫국이 다 망쳐 버렸다.
그 덕에 나봄과 즐거운 저녁 식사를 하면서도. 아쉬운 데이트 끝에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도.
프러포즈에 대한 아쉬움을 좀처럼 떨쳐 내지 못하던 태오는 결국 그녀 없이 홀로 돌아가는 귀갓길을 참지 못하고.
‘결혼하고 싶다!’
이렇게 재촉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는데 한 번 자라난 욕심은 끝도 없이 싹을 틔운다. 얼핏 우리 2세 얼굴까지도 보이는 것 같아.
“미치겠구만, 진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나왔습니다.”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래지 못하고 있던 그때,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태오는 냉수 마시고 속 차리는 심정으로 커피를 원샷하기 위해 잔을 들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컵 홀더의 광고는 마음을 다잡기는커녕 더욱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프러포즈 in 제주! 초호화 여객선에서 아름다운 바다를 보며 사랑의 결실을!’
이미 응모 날짜가 지난 이 광고 문구는 마치 신이 직접 내려와 귓가에 속삭여 주는 듯하다.
‘프러포즈를 원하면 니가 하거라, 중생아’라고.
“초호화 여객선…… 그래. 그깟 거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해 주면 되잖아.”
기대감을 정리하러 왔다가 추진력만 얻어 버린 태오는 컵 홀더가 젖지 않도록 곧바로 빼서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물론 우리가 만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지만, 그녀를 짝사랑한 시간은 어디다 내놔도 뒤처지지 않을 만큼 길었으니.
아마 그녀는 기꺼이 받아 줄 것만 같다.
9년 묵은 사랑이 고스란히 담긴 나의 호화로운 프러포즈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