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다시 빛나게 해 줘
2018.02.16.
“후우…….”
목화 꽃다발을 든 나봄의 입술 새로 초조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폭풍같이 몰아치던 업무를 퇴근 시간 전까지 기적적으로 끝낸 나봄은 태오에게 중요한 말을 하기 위해 회사까지 직접 찾아온 참이었다.
오늘 낮, 소라와 함께 응모했던 프러포즈 이벤트의 당첨 소식을 접한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기가 아까워 무턱대고 하겠노라 대답해 버렸다.
물론 결혼을 논하기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고, 연애 기간도 터무니없이 짧지만.
‘9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니까 괜찮을 거야. 어렵게 이어진 인연인데 일부러 미적거릴 필요 있나.’
태오를 향한 저돌적인 마음은 그녀 스스로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원래는 이렇게 적극적으로 리드하는 성격이 아닌데, 태오의 옆에 있으면 부끄러움이고 뭐고 내가 먼저 달려 나가게 된다. 혹시나 머뭇거리는 사이 그를 놓칠까 싶어, 내가 그의 손을 먼저 붙잡게 된다.
이건 소심한 그녀로서는 상상도 못 할 변화였으나, 나봄은 지금의 모습이 싫진 않았다.
그는 사랑 받을 때 가장 예쁘게 피어나는 꽃 같은 남자니까, 나봄은 언제까지고 마음이 다할 때까지 그에게 사랑만 건네줄 작정이다.
“태오는 언제쯤 나오려나.”
나봄은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의 정문 쪽을 기웃거리며 휴대폰을 들었다.
바쁜 그는 항상 야근이 당연했건만 다행히도 오늘은 스케줄이 여유로운지 언제든 퇴근할 수 있다고 했다.
제주도 여행 스케줄을 정하려면 시간이 제법 필요할 텐데, 하늘도 그녀의 프러포즈를 돕고 있는 모양이다.
[태오야! 나 회사 정문에 도착했어! 혹시 지금 나올 수 있나?]
나봄은 그에게 신난 기색이 역력한 메시지를 보냈다.
지잉―
그의 기다릴 새도 없이 곧바로 도착했다. 그녀는 곧바로 반가운 태오의 답장을 눈에 담았다.
바로 그때.
“……한나봄?”
익숙하긴 하지만 그다지 달갑진 않은 여자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유리 씨……?”
곧바로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나봄의 눈동자가 딱딱하게 굳었다.
“안 그래도 만나러 가려고 했는데 마침 잘됐네.”
조금도 기뻐하지 않는 얼굴로 그리 말한 유리는 나봄의 곁으로 무심히 다가왔다.
그런 뒤 꺼내 놓는 목소리는 몹시도 차디찼다.
“단태오 나오기 전에 잠깐 나 좀 봐요.”
상대하고 싶지 않은데도 저절로 두 발이 움직이는 건, 불쾌함보다 불안감이 먼저 느껴지기 때문일까.
나봄은 태오가 나올 정문 쪽을 초조하게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유리를 따라나섰다.
그녀와 함께 구석진 곳으로 향하면 향할수록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 * *
정문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흡연 부스.
구석 자리에 자리를 잡자마자 담배에 불부터 붙인 유리가 매캐한 숨을 내뱉었다.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탁한 공기에 질식할 듯했던 나봄은 살짝 미간을 구기며 숨을 참았다.
그 모습을 본 유리는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내 앞에선 참 싫은 티도 잘 내.”
그녀에게 돋아난 가시는 나봄의 심기를 불편하게 찔러 댔다.
나봄은 노골적인 그녀의 적대감을 맞받아치려 했지만 야무진 첫 마디를 꺼내기도 전에 유리는 본론을 이어 나갔다.
“본부장님 앞에서 지금 이거 반만큼만 했더라도 태오한테 그 사달이 나진 않았을 텐데.”
그 사달……?
뜻 모를 유리의 한 마디는 나봄의 불안감을 제대로 건드렸다.
차준이 거론되는 것도, 태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처럼 말하는 것도 어쩐지 심상치가 않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아무것도 모르는 나봄은 눈빛을 일렁이며 물었다.
그러자 유리는 한 번 더 담배 연기를 내뱉었고, 다소 날이 선 목소리를 내뱉었다.
“역시 나봄 씨 혼자 모르고 있구나? 지금 나봄 씨 때문에 태오가 어떤 꼴이 됐는지.”
“…….”
“태오, 회사에서 쫓겨나기 일보 직전이에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부려 먹던 사람을 중요한 자리에서 다 제외시켜 버리고, 잡일조차도 배정 안 해 주고.”
“…….”
“퇴사할 수밖에 없게끔 눈치 주고 있다고. 이 회사 전체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태오가 회사에서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건 유리에게서 처음 접하는 얘기였다.
얼마 전에도 태오를 만났긴 했지만 이런 상황에 대해선 전해 듣지도 못했었는데…….
“그게…… 본부장님이랑 무슨 관련이 있나요?”
나봄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유리에게 물었다. 그러자 유리는 보다 노골적으로 가시가 돋친 목소리로 나봄을 다그쳤다.
“나봄 씨랑 단태오 연애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이 꼴이 난 거잖아. 그럼 누가 주도했겠어.”
“…….”
“창립 기념 파티에선 본부장님 약혼녀 행세 다 하고, 며칠 지나지도 않아서 태오로 갈아탈 땐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유리의 지적은 단편적인 부분만을 보고 섣불리 판단 내린 명백한 오해였다. 차준은 이미 창립 기념 파티 전부터 그에게서 떠나 버린 그녀의 마음을 확실히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끝난 인연을 놓지 못하고 매달린 건 차준이었다.
바란 적 없던 도움을 건넨 것도, 곁에 붙잡아 놓으려 했던 것도 모두 그의 일방적인 미련일 뿐이었다.
차준 역시 그 사실을 정확히 인지했고, 최근 들어서는 나봄에게 그 어떤 사적인 연락도 하지 않았었다.
그러니 태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 유리가 생각하는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게다가 그 사람은 우드레일 윗선을 움직이게 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혹시 태오가 본의 아니게 얽혀 버린 다른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건 아닐까?’
딱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도와주세요.’
얼마 전, 다급히 나봄을 찾았던 태준의 모습이 떠올랐다.
‘차준이한테 이거 하나만 전해 주세요.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봄 씨밖에 없어요.’
‘전부 나 때문에 생겨난 문제들이에요.’
‘어떻게 해야 할지는 내가 가장 잘 알아요.’
그날 나봄과 태오에게 영문 모를 부탁을 하던 그는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고 했었다.
그때도 이미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였었던 그는 아무래도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하진 못한 것 같다. 그래서 태오도 위험에 빠져 버린 거라는 확신이 든다.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한 나봄은 유리의 입부터 막아 보기로 했다.
헛소문을 사실인 양 퍼트리고 다니는 유리는 나봄이 경계해야 할 상대였다.
“태오가 위험해진 건 유리 씨가 생각하는 그런 일들 때문이 아니에요.”
“뭐?”
“그건 제가 확신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태오 문제를 본부장님이랑 섣불리 연관 짓지는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차준은 이 문제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조심스럽게 얘기하니, 유리의 눈동자에 별안간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쳤다.
아무것도 모르는 유리의 눈엔 그저 나봄이 뻔뻔한 모습으로 비쳤던 탓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본부장님 싸고도는 거야?”
“싸고도는 게 아니라…….”
“나봄 씨 하는 말이 태오가 잘못해서 내쫓긴다는 뜻이랑 뭐가 달라? 나봄 씨는 그 애에 대해 잘 몰라서 그딴 식으로 쉽게 말하나 본데, 내가 아는 태오는 일에 관해선 책잡힐 사람이 아니야!”
한 번 어긋난 오해는 걷잡을 수 없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연을 낱낱이 고할 수는 없었기에, 나봄은 침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유리는 이런 나봄이 정말 싫었다. 정확히 말하면 답답하게 구는 그녀 때문에 제 꼴만 우스워지는 태오가 너무나도 싫었다.
그래서 독기가 바짝 오른 유리는 보다 언성을 높였다.
“그래! 모든 건 내 어림짐작이니까 본부장님이 해코지하는 게 아닐 수도 있어! 단순한 남녀 문제보다 복잡한 사연이 얽혔을지도 모르고, 정말 태오가 사고를 쳐서 불이익을 받고 있는 건지도 모르지!”
“…….”
“하지만 누가 봐도 불합리한 상황에서 걔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건 다 너 때문이야!”
“…….”
“따지고 싶은 게 있어도 못 따지고, 화가 나도 참고만 있고, 열심히 기어오른 자리에서 쫓겨날 처지인데도 바보처럼 가만히 있는 건! 전부 다 그 등신 새끼가 한나봄 너한테 피해 갈까 봐 걱정해서라고!”
몰아치는 유리의 다그침은 반박할 거리 하나 없는 정답이었다.
아무리 화근이 다른 곳에 있다고 해도, 태오의 시련을 나봄이 자초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태오가 무조건 참기만 하는 건 분명 나봄 때문일 거다. 그건 그에게 보호받고 있어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던 나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이제야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깨달은 나봄은 일렁이는 눈빛으로 유리를 바라보았다.
유리는 그런 나봄을 사납게 노려보다가 이내 시선을 제 손끝으로 툭 떨궈 버리더니.
“꼭…… 따돌림 당하는 외톨이 같아. 요즘 들어 겨우 사람들이랑 가까워지나 싶었는데.”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를 한탄처럼 내뱉었다. 나봄은 전혀 알 길이 없었던 위태로운 그의 모습에 관해서였다.
“유리 씨…….”
“자기 일을 누구보다 좋아하던 놈이 자꾸만 다른 사람한테 빼앗기고, 밀려나고…… 차라리 성질대로 확 뒤엎어 준다면 내 속이라도 시원할 텐데, 그러지도 못하고 등신처럼 참기만 해.”
“…….”
“그러니까…….”
나도 인정하긴 싫지만. 내가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아픈 현실이지만.
“그러니까…… 한나봄 너라도 그 새끼 힘든 것 좀 알아주라.”
“…….”
“대체 뭐 때문에 계속 당하고만 있는 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누구 하나는 알아줬으면 좋겠어.”
원망처럼 보였던 유리의 감정은 이제 보니 절절한 부탁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두 눈에 어려 있던 독기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외사랑에 지친 마음만 찌꺼기처럼 남겨져 있었다.
그건 나봄이 미처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그녀의 쓸쓸한 이면이었다.
“유리 씨…….”
나봄은 주제넘는 위로를 건네는 대신 작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유리는 마주한 나봄의 두 눈을 피하며 조금밖에 태우지 않은 담배를 지져 껐고, 애달픈 고백을 흘려보냈다.
“다 인정할게. 나는 그 애를 정말 좋아했어…….”
“…….”
“원체 그런 쪽으론 자신감이 없어서 친구 이상으로는 꿈도 꾸지 못했지만…… 굳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빛이 나는 태오한테 얼마나 가슴 설렜는지 몰라.”
“…….”
“그래, 나는 그 애의 빛을 따라다니는 것만으로도 정말 좋았어.”
굳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빛이 나는 사람.
그건 나봄도 공감하는 표현이었다.
대학 시절, 나봄이 먼발치서 보아 왔던 태오는 누구보다 강렬한 자신만의 빛을 지니고 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빛이 사그라든 건 언제부터였더라.
“한때는 너 때문에 미쳐 돌아서 욕심도 많이 냈었지만 지금은 딱 한 가지 말고는 바라는 것도 없어.”
“…….”
“다시 빛나게 해 줘.”
“…….”
“너 때문에 그 애가 작아지고 불쌍해지는 모습, 솔직히 두고 보기 힘들어.”
그녀 말대로 그건 정말 나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난 그 애를 9년 동안 불안하게 하고, 불쌍하게 만들었던 장본인이니까.
지금 이 순간도 태오는 나 때문에 비참해지는 쪽을 감당하고 있잖아.
서글픈 깨달음은 나봄의 가슴을 시리게 만들었다.
그간 마음고생 시킨 만큼 사랑해 주면 될 줄 알았는데, 마음의 빚은 진만큼 갚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다고 믿었었던 우리 관계에 흐린 안개가 드리운 기분.
순간, 지금 나올 수 있냐고 물었던 나봄의 메시지에 곧바로 돌아왔던 태오의 답장이 불현듯 떠올랐다.
[응, 오늘은 할 일이 별로 없어서 아까부터 너만 기다리고 있었어.]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기쁘게 받아들였을 그 말은 어쩐지 미안하고 서글펐다.
이대로 너를 만나러 간다면 나는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까.
죄책감의 무게만큼 너를 맞이할 나의 마음도 무거워져만 간다.
* * *
오늘 하루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너무 분주해서 1분 1초가 아까웠던 모양이었지만, 태오는 며칠 전 처리하다 말았던 잡무를 끝내는 게 고작이었다.
8시간의 업무 시간 중에서 일을 한 건 30분, 혼자 멍하니 고립되어 있었던 건 7시간 30분.
모두에게 잊혀 버린 무덤의 주인이 이런 기분일까.
외부와 단절된 태오의 사무실은 그에게 유일한 안식처였으나, 이젠 그마저도 불편해지고 삭막해졌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외로움은 태오의 숨통을 비트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 나약한 감정에 짓눌리는 것도 이제 그만해야 했다. 마음 여린 나봄에게만큼은 초라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그는 필사적으로 괜찮은 척 해 볼 생각이다.
자꾸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다 보면 정말 괜찮아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봄이 회사 앞에 도착했다는 얘길 듣고 곧바로 달려 나온 태오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얘는 어디로 간 거야.”
정문 근처에서 있을 곳은 뻔한데 그녀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좀 더 먼 곳까지 살펴보니.
“아, 저기 있네.”
머지않아 흡연 부스 쪽에서부터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나봄이 눈에 들어왔다. 하루 종일 딱딱하게 굳어 있던 태오는 그제야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웠다.
“한나……!”
태오는 반가운 음성으로 그녀의 이름을 외쳐 부르려 했다.
그러나 뒤늦게 발견한 나봄 곁의 불안한 인물은 하던 인사를 멈추게 만들었다.
“허유리 쟤가 왜…….”
최근 태오에게 벌어지고 있는 나쁜 일들이 전부 나봄 탓이라 믿고 있는 그녀.
‘내가 너 같은 거한테 정도 못 뗄 만큼 멍청하다고 해도, 누구 때문에 이 사달이 났는지 정도는 알 수 있어!’
‘전부 다 한나봄 때문이잖아! 선우차준 본부장이 그년이랑 너 떼어 놓으려고 이딴 식으로 해코지하는 거잖아!’
‘……니가 묻지 못하는 책임은 내가 물을 거야.’
오늘 아침 유리가 내뱉었던 원망 섞인 말들은 태오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제 감정을 못 이기던 그녀는 나봄에게 괜한 말을 전하고도 남았다.
“설마…….”
심상찮은 낌새를 느낀 태오는 앞으로 향하려던 걸음을 멈추고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하지만 하필 딱 그 타이밍에 태오를 발견한 나봄은 손까지 흔들며 그를 불렀다.
“태오야!”
“…….”
그녀의 부름에 유리의 눈동자도 잠시 태오 쪽을 향했다.
그러나 막상 그와 시선이 맞닿자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버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그녀는 벌써 일을 저질러 버린 모양이다.
제발 신경 꺼 달라고 사정사정했건만 기어이.
“아…….”
태오는 입술 새로 흐린 탄식을 터트리며 살짝 미간을 구겼다.
애써 감춰 두었던 나쁜 감정들은 다시 눈빛으로 드러났으나, 그는 의식적으로 가려 보려 했다.
괜찮은 척해야 해. 니 앞에선 어떻게든 괜찮은 척해야 해.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은 다행히 효과가 있는지, 어느덧 손이 닿을 거리까지 가까워진 나봄에게 미소 정도는 건넬 수 있게 되었다.
“왔어?”
태오는 이미 다른 곳으로 멀어져 버린 유리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다정하게 나봄을 맞이했다.
“응, 정문에 없어서 놀랐지?”
“한참 찾았다.”
“많이 기다렸어?”
“별로.”
“미안.”
“별로 안 기다렸다니까 뭐가 미안해.”
그의 앞에 선 나봄은 확실히 평소보단 움츠러들어 있었다.
태오는 그런 나봄의 뺨을 쓱 매만져 주고는 구석 자리에 주차되어 있는 제 차로 이끌었다.
“가자. 할 얘기가 있다고 했으니까 조용한 레스토랑을 찾아봐야겠네.”
나봄은 태오를 따라 순순히 걸음을 옮기면서도 자꾸만 그의 안색을 살폈다.
유리는 태오가 보고 있기 가슴 아플 만큼 힘들어 보인다고 했지만, 막상 마주한 그의 모습은 평소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아니, 다르지 않아 보이도록 노력하는 중인 걸까.
마음속에서 자꾸만 커져 가는 걱정을 감출 길이 없었던 나봄은 잠깐의 망설임 끝에 겨우 입을 열었다.
“나는 유리 씨랑 잠깐 얘기 좀 하고 왔어.”
그건 평소의 태오라면 분명 펄쩍 뛰며 경계했을 말이었다. 하지만 태오는 조금의 놀란 기색도 없이 담담한 반응만 내비쳤다.
“아아, 그러냐.”
원래의 너였다면 무슨 말을 했냐고, 거길 왜 따라갔냐고 다그쳤을 텐데.
아마 지금 넌 내가 알아 버린 너의 아픔을 숨기기에 급급한가 보다. 내가 그런 널 드러내려 하기에 급급하듯이.
그렇다면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너에게 힘이 될 수 있을까. 어떤 말을 해야 니가 내게 조금이라도 기대 보려 해 줄까.
나봄이 걸음을 늦추며 깊이 고민하는 사이, 먼저 차에 다다른 태오는 조수석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쌀쌀하다. 얼른 타.”
드디어 똑바로 눈을 마주치고 있는 지금, 힘들었을 너의 하루에 대해 묻는다면.
너는 솔직하게 힘들다고 대답해 줄까. 나 때문에 참고 있는 감정을 쏟아 내 줄까.
“타라니까 뭘 그렇게 보고 서 있어.”
조금만 눈빛이 가라앉아도 불안한 듯 웃어 보이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렇게 스치듯이 그의 마음을 건드려선 안 될 것 같다.
“응…….”
나봄은 결국 다른 기회를 찾기 위해 순순히 그의 차에 몸을 실었다.
조수석 문을 닫은 태오는 보닛를 빙 돌아 운전석에 올랐고, 안전벨트를 매자마자 휴대폰부터 꺼내 들었다.
“자, 어딜 가야 할까.”
“…….”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한식이든 양식이든 말해 봐.”
“…….”
“나는 느끼한 것만 아니면 괜찮을 것 같긴 한데…… 니가 먹고 싶은 게 혹시 느끼한 거면 같이 먹어 줄 마음은 있어.”
휴대폰 내비게이션을 매만지며 끊임없이 말을 거는 그는 나봄이 머금고 있는 말을 막아 보려는 듯했다.
그런 그에게 웃으며 장단을 맞춰 준다면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이 무탈하게 지나갈 게 뻔했다.
하지만 나봄은 늦은 밤,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혼자 남게 될 그가 몹시도 걱정스럽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굴어야 하는 그녀는 그의 서러운 밤을 알면서도 외면해야 할 텐데, 그렇게 각자 아플 바엔 고통을 같이 나누며 함께 힘들어하는 게 백 배 천 배는 나았다.
그래, 니가 아픈 내색도 하지 못하는 게 나 때문이라면 내가 먼저 알아봐 줄 거야. 너의 어깨를 짓누르는 불안이든 아픔이든, 전부 다 내가 다 떠안아 줄 거야.
드디어 결심이 선 나봄은 태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태오야.”
그러고는 나직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에게 와 닿은 시선은 살짝 겁을 먹은 듯 미세하게 떨려 왔다.
나봄은 그런 태오를 한동안 마주하다가 조심스레 손을 붙잡았다.
언제나 따듯했던 그의 손은 하루 종일 초조함에 얼마나 시달렸던 건지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나봄은 눈시울이 먹먹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