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나에겐 당신이 절실하다
2018.02.09.
회사를 빼먹었다. 입사 이후 처음이었다.
아무리 아파도 다 죽어 가는 몸을 이끌고 출근하던 현장이었는데, 한순간에 그 모든 노력이 부질없음을 깨닫고 말았다.
회사에선 그를 찾는 전화가 많이 걸려 왔으나 일부러 거절을 누르다 이내 휴대폰 자체를 꺼 버렸다.
장담컨대, 내가 버티고 있던 나의 자리는 며칠 내에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내가 없으면 안 될 거라 믿고 있던 나의 자리는 본사에서 보낸 누군가가 메우겠지.
모두가 나를 잊어버릴 만큼 완벽하게.
‘나는 그렇게나 좁은 세상을 전부라고 믿고 살았구나.’
차오르는 감정은 후회와 비슷했으나 후회는 아니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허무함이랄까.
태오는 지금 아무리 추스르려 해도 추슬러지지 않는 허무함과 고군분투하고 있다. 어쩐지 항상 뭐 하나씩은 안 풀리던 인생이 거리낄 것 없이 수월하게 잘나간다 했다.
이런 기분으로 텅 빈 집에 들어가고 싶진 않았던 태오는 짧은 고민 끝에 목적지를 정했다.
굳이 고민을 털어놓지 않아도 함께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는 사람.
그녀에게로 가야겠다고 정하는 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문제가 있다면 일터에 있을 그녀의 퇴근 시간이 아직 한참 남았다는 것이지만,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나오겠지.
혹시나 그녀가 일하는 데 방해될까 싶었던 한봄 도어락 건물 건너편에 몰래 차를 세워 두었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서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을 나봄을 생각하며 물끄러미 한봄 도어락을 바라보고 있는데.
똑똑똑똑―
누군가 태오의 차창을 두드렸다. 갑작스러운 기척에 놀란 태오가 시선을 돌리자, 난데없는 나봄의 얼굴이 그를 반겼다.
“한나봄……?”
도착한 지는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정문에선 아무도 나오지 않았는데.
‘쟨 내가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고 온 거지?’
그렇게 생각할 때쯤 나봄은 조수석 문을 열었고, 그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역시 너 맞구나. 익숙한 차라서 와 봤는데.”
“회사 안에서 내가 보여?”
“그럴 리가 있어? 난 소라랑 커피 마시고 돌아오는 길이야. 소라 외근이 이쪽이라서 잠깐 만났거든.”
“아아…….”
스스럼없이 태오의 차에 오른 나봄에게선 햇볕 냄새가 났다. 그녀의 입가에 예쁘게 어려 있는 미소도 그를 하염없이 기분 좋게 만들었다.
나의 우울한 순간마다 기적처럼 찾아와 주는 너.
너는 아무래도 나의 수호천사인가 봐. 널 원하는 건 난데, 먼저 다가오는 사람은 항상 너잖아.
태오는 나봄을 보고나서야 벅차는 가슴에 잠시 마른침만 삼켜 넘겼다. 그런 그의 속을 알 리 없는 나봄은 토끼 같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오에게 물었다.
“너도 외근이야?”
“아니.”
“그럼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야?”
“니가 보고 싶어서 왔어.”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태오의 한 마디는 나봄의 뺨을 붉어지게 만들었다.
하여간 예고 없이 튀어나오는 애정 표현이 항상 문제다. 심장에 너무 안 좋아.
“뭐야, 그게. 이렇게 농땡이 피우다가 야근하게 되면 또 내 탓 하려고!”
나봄은 부끄러운 마음에 괜히 태오를 구박했다. 하지만 이미 활짝 피어난 그녀의 웃음은 오늘따라 더욱 싱그러웠다.
태오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좋은 일 있었어?”
“왜?”
“유독 신나 보여서.”
눈치 빠른 태오의 질문에 나봄은 아까 신청하고 온 프러포즈 이벤트를 떠올렸다.
아무리 될 확률이 낮다고 해도 응모한 것 자체로 기대되고 가슴이 뛰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러나 아직까진 ‘프러포즈’라는 말을 꺼내기가 민망했던 나봄은 솔직하게 털어놓는 대신 그럴싸하게 둘러대기로 했다.
“남자 친구가 나 보고 싶다고 회사 앞까지 왔는데 당연히 신나지.”
거짓말은 아니었다. 나봄은 사실 요즘 들어 잠에서 깨어나 다시 잠에 드는 순간까지 태오가 너무 보고 싶었다.
태오는 그녀의 대답에 실웃음을 흘렸고,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매만졌다.
“바보야, 내가 그렇게 좋냐.”
그의 음성은 다정했으나 피부에 닿은 손끝은 어쩐지 차가웠다. 눈가에 어린 미소도 어쩐지 평소보다 생기가 없다.
오늘따라 낮은 태오의 온도에, 나봄은 깊이 눈을 맞추며 물었다.
“그러는 넌 힘이 없어 보이네. 오늘 속상한 일 있었어?”
응, 속상한 일 있었어.
내가 오랜 시간 힘겹게 사랑해 온 너를 빼앗아 가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내가 온 열정을 쏟아부어 온 일이 누군가에 의해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생겨서.
나 정말 미칠 뻔했어. 도저히 못 참을 정도로 화가 났어.
그래도…….
“아니.”
불쑥 찾아온 나를 반겨 주고, 나를 향해 웃어 주고, 나로 인해 기뻐하는 너를 보니까.
“하나도 안 속상해. 지금 너랑 같이 신나 하는 중이다.”
태오는 걱정 많은 나봄의 마음도 안심시켜 줄 만큼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토록 허무하던 마음의 빈자리는 어느새 그녀가 전해 주는 온기로 가득 채워진 상태였다.
역시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 평생 하나뿐인 내 사랑.
태오는 오늘의 선택에 다시 한 번 확신을 하며 나봄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동그란 나봄의 눈동자는 그가 무엇을 하려는지 예감한 듯, 이내 천천히 내리감았다.
태오는 은근한 힘으로 그녀를 끌어당겼고, 그녀의 달콤한 입술을 조심스레 머금었다.
벌써 몇 번이나 느껴 본 감촉이었으나 그녀와의 키스는 언제나 처음처럼 가슴이 떨렸다.
태오는 수줍게 스며드는 그녀의 호흡을 오롯이 느끼며 나쁜 하루를 차츰 지워 나가기 시작했다.
나를 향한 기만 어린 시선도, 무례하게 오르내리던 너의 이름도, 목청껏 내지른 악에 받친 고함도.
그렇게 전부 깨끗이 잊어버리고 나니 남아 있는 건 너 하나뿐이었다.
불안하게 일그러지던 내 세계는 이제야 평온을 되찾는다.
짧지만 깊은 입맞춤을 끝낸 태오는 코끝이 닿을 듯 밀착된 거리에서 그녀의 눈을 마주했다.
“내가 진짜 많이 사랑해.”
이윽고 흘려보내는 고백은 그녀를 애틋이 여기는 그의 마음이 온전히 담겨 있었다.
나봄은 나도 그렇다고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어쩐지 마음이 뭉클해져 버려서.
말로 표현하는 대신 한 번 더 입을 맞추기로 했다.
다시금 다가가는 그녀의 온기를 맞이하는 태오의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 * *
흐트러진 넥타이, 붉어진 눈가, 그리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걸음.
우드레일 상부층에 들어서는 차준의 모습은 그야말로 다 무너진 폐허 같았다.
평소의 완벽한 모습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다 구겨진 박스를 품에 안은 그는 두고 보기 위태로울 만큼 초췌한 꼴이었다.
“이사님…….”
복도를 지키고 서 있는 경호원들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차준에게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하지만 그의 일렁이는 눈동자가 향하는 곳은 단 한 군데였다.
미쳤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저 문을 열자마자 후회할지 모르지만.
차준은 지금 태준을 찾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에게 발걸음을 재촉하는 중이다.
비록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갈 수 있는 관계가 아니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밖에 없다. 선우태준에 관해서라면 서 회장의 방해에도 아랑곳 않고 두 발 벗고 나서 줄 사람이.
“이사님, 갑자기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아니나 다를까.
집무실 앞을 지키고 있던 비서실장이 차준을 가로막았다. 차준은 전에 없이 흔들리는 목소리를 겨우 흘려보냈다.
“대표님을 만나야 합니다.”
“용건이 무엇인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만나야 합니다…….”
“…….”
“지금 당장…….”
비서실장의 질문에 같은 대답만 반복하는 차준은 대화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불안정한 서 대표와 차준의 관계를 알고 있는 비서실장은 이런 차준을 도저히 집무실 안으로 들여보낼 수가 없었다.
“지금 대표님은 미팅 중이시라…….”
비서실장은 일단 거짓말로 차준을 막아서기로 했다.
“비켜, 들어가야 해…….”
“이사님! 고정하십쇼!”
“비키라고……!”
하지만 이미 이성을 반쯤 잃은 차준은 막무가내로 문고리를 잡았고, 있는 힘을 다해 열어젖혀 버렸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필사적으로 붙잡지 못한 비서실장은 그대로 차준을 대표실 안으로 들여보내고 말았다.
결국 그렇게 적막뿐인 집무실에서 제대로 마주해 버린 두 사람.
“……니가 무슨 낯짝이 있어서 내 앞에 나타나.”
서 대표의 눈동자에 곧바로 적대감이 어렸다.
그녀는 모든 절망의 화근이 된 차준을, 아들의 추락을 무심히 방관하고 있었던 그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차준은 그녀의 원망을 똑똑히 보고 있으면서도 몇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갔고, 이어 푹 젖은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대표님…….”
평소와 달리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그의 모습은 서 대표를 혼란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보다 날을 세운 채 차준을 가만히 지켜보고 앉아 있으니.
“형을…… 형을 만나고 싶습니다…….”
차준은 기어이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 놓는다. 다 끝나 버린 지금에서야 보여 주는 뒤늦은 관심은 그녀의 분노를 자극할 뿐이다.
“왜, 비참하게 짓밟을 게 필요해졌니?”
“…….”
“막상 없어지고 나니까 천벌이라도 받을까 봐 걱정돼?”
“…….”
“대체 니가 그 앨 왜 찾아! 다 니가 원하던 대로 됐는데 왜!”
몰아치는 서 대표의 분노는 차준을 향하고 있었다.
이 모든 건 차준의 계략이 아니었으나, 그동안 자신에게 아픔만 주던 태준이 사라져 버리길 바랐던 시간들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해명 한 마디 없이 그녀의 원망을 받아들이기로 한 차준은 흐린 숨소리 끝에 먹먹한 음성을 이어 붙였다.
“돌려줄 게 있어서…….”
“…….”
“꼭…… 돌려줘야 하는 게 있어서…….”
자꾸만 메는 목 때문에 말을 끝내지 못한 차준은 품 안의 상자를 보다 꽉 끌어안았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리 없는 서 대표는 그런 차준을 더욱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렇게 차준은 한참 동안 서러운 호흡만 흘려보냈고, 이내 한 번 더 간절히 매달렸다.
“둘 중에 사라져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제가 되겠습니다. 태어난 것 자체가 죄가 되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제가 하겠습니다.”
“…….”
“그러니까 한 번만…… 한 번만 도와주세요.”
“…….”
“우리 형을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주세요…….”
태준을 ‘우리 형’이라 부르며 그리워하는 차준은 서 대표로서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건, 얼마 전 나봄에게서 들었었던 뜻밖의 말이었다.
‘10년 전에…… 차준 오빠가 먼저 태준 씨에 대해 이야기해 줬어요. 형이 있다고.’
‘제가 형제 없이 외동으로 태어난 게 아쉬울 만큼 그 사람은 형을 정말 좋아했어요.’
‘태준 씨는 불쌍하지 않아요. 어떤 모습이든 태준 씨를 가장 자랑스러워해 줄 동생이 있잖아요.’
그땐 나봄이 차준을 감싸 주느라 괜한 소릴 한다고 생각했다.
그 아이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준 장본인인 선우차준이 그럴 리가 없다고.
만약 정말 자랑스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그건 그저 태준의 여린 마음을 이용하는 중이었을 거라고 그녀는 맹신했었다.
하지만 오늘 그녀의 눈앞에서 산산이 무너져 내리는 차준은 그 아이의 존재가 비참하리만큼 절실해 보인다.
어쩌면 그 애를 찾느라 혈안이 된 그녀보다도 더.
“넌 도대체…….”
머릿속이 복잡해진 서 대표는 차준을 향해 무슨 말을 내뱉으려다 관두었다.
그 순간 또 한 번 귓가를 스치는 나봄의 한 마디는 서 대표 스스로 되묻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차준 오빠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그러게, 나는 왜 이 아일 죽도록 미워했었지?
배 속에서부터 외면했었던 이 아이는 원한을 쌓지도 못할 만큼 멀던 존재였는데…….
갑작스럽게 파고든 의문은 서 대표의 가슴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그건 태준에서만 느껴 왔던 고통이라, 그녀는 몹시도 혼란스러워졌다.
지금 당장 생각을 정리하기엔 심신이 너무나도 지쳐 있었던 서 대표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 버렸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이윽고 터져 나오는 말은 평소처럼 매정한 작별 인사지만 차준에게만큼은 특별했다.
“형 문제는…… 다음에 얘기해.”
언제나 나를 홀로 내버려 두었던 어머니는 처음으로 그 사람을 내 형이라고 불러 주었으니까.
* * *
깔끔한 인테리어가 무색할 정도로 쓸쓸한 공간.
침대 하나와 작은 창문이 전부인 태준의 방은 강릉 바다 근처에 위치한 외딴 요양 병동이었다.
드나드는 사람은 매일 같은 시간에 식사를 배달해 주는 간호사와 형식적인 진료를 하러 오는 의사뿐.
그에게 말을 걸러 와 주는 이도, 안부를 살피러 와 주는 가족도 없었다. 잠기지 않는 문 밖으로 나가지도 않는 그는 꼭 독방에 갇힌 죄수 같았다.
그를 찾고 있을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본다면 한없이 가슴 아파했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본인의 선택이었다.
누군가를 지키고 싶은데 그럴 힘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발악이라도 해 보고 싶은데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
그가 즐겨 읽는 소설 속 주인공들은 주로 자기희생을 한다.
그제야 남은 이들의 삶이 원 상태로 돌아가는 걸 보면, 힘없는 주인공은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퍼즐 조각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태준의 처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하지만 가끔 일말의 미련을 불러일으키는 건 존재했다.
바로 바깥세상에서 홀로 버티고 있을 가여운 그 아이.
비록 마주치는 일이 서로에게 상처가 되긴 했어도 태준은 그 애를 만나는 걸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를 밀어내는 손길과 가슴을 사납게 할퀴는 폭언까지도 그 애가 주는 감정이라서 그저 고마웠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붙잡고 싶었던 인연은 전부 끝났고, 소중한 그 애마저도 잊어야 할 사람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차준이는 내가 사라져서 정말 행복해졌을까.’
하루 종일 품고 있는 그 질문에 내심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진심이 담겨 있는 건 내가 못된 탓이다.
그 애는 이런 날 알고 그렇게나 싫어했던 것이었지만.
“이젠…… 날 싫어할 수도 없으니까.”
조금만 더.
그 애의 존재가 흐려질 때까지 조금만 더, 나쁘게 굴 생각이다.
그래야 이곳에서 빠져나가고 싶다는 마음도 가질 수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