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악연이 맞닿는 순간
2018.02.02.
벌컥―!
어느 누구도 쉽게 발을 들이지 못할 서 회장의 집무실 문이 열렸다.
분노 서린 걸음으로 성급히 들어오는 그녀는 다름 아닌, 태준의 실종 소식을 뒤늦게야 알게 된 서미란 대표였다.
“내 아들 어디 있습니까!”
서 대표는 집무실 책상에 앉아 있는 서 회장을 보자마자 서슬 퍼런 고함을 내질렀다.
“대표님! 고정하십시오!”
“회장님의 몸이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무작정 들이닥친 그녀를 말리기 위해 밖에서부터 따라온 경호원들이 아연실색이 된 얼굴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다.
“…….”
하지만 그 소란 속에서도 서재균 회장만은 태연했다.
마치 그녀의 분노와 자신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검토하고 있던 서류에서 시선을 떼어 내질 않는다.
그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오른 서 대표는 보다 언성을 높여 소리쳤다.
“내 인생을 대체 어디까지 망칠 작정이야! 그 애만 건드리지 말아 달라는 게 비굴한 부탁처럼 들렸어?!”
“…….”
“착각하지 마! 그건 내가 하는 마지막 경고였어! 태준이를 되찾아 오기만 하면 당신 앉아 있는 그 자리부터 없애 버리겠어!”
서 대표의 엄포는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대외적으로 중대한 업무를 전부 자신이 책임지고 있는 한, 기업의 주도권은 아직 그녀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그러니 가장 소중한 것을 건드린 그들의 죗값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태준을 매정히 도태시켜 버린 아버지도, 그의 밑에서 한순간에 등을 돌려 버린 선우차준도.
모두 태준의 발아래서 무릎 꿇도록 처참하게 부숴 버릴 것이다.
나는 내 아들을 위해 기꺼이 그리할 수 있다.
독기를 채워 넣은 서 대표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런 뒤 내뱉는 목소리에는 보다 날이 서 있었다.
“이런 식으로 빼돌려 봤자 내 명령 한 번이면 며칠 안에 찾아.”
“…….”
“당신네들은 그때부터 죽는 게 나을 만큼 비참해질 테니까…….”
“…….”
“차라리 도망쳐. 내 손에 잡히기 전에.”
등골이 오싹해지는 경고를 마지막으로 떨리는 입술을 닫았다.
이윽고 매정하게 돌아서는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어두운 빛을 띠고 있었다.
서 회장은 그제야 서류에서 시선을 떼어 내고 제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예전부터 허황된 감정에 휩쓸려 가치 없는 존재들에게만 집착해 왔던 그녀는 여전히 미련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니 아무리 커다란 힘을 거머쥐고 있어도 제 손엔 잡히는 게 없지.
서재균 회장은 가소로운 그녀를 향해 낮은 비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에 모욕감을 느낀 서 대표가 살벌한 눈빛을 띤 채 다시 그를 향해 돌아서자.
“아니, 찾을 수 없을 게다. 그 앤 내가 빼돌린 게 아니라, 스스로 사라져 버린 거니까.”
서 회장은 확신 어린 소리로 그녀를 자극했다.
“원한다면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가르쳐 줄 수 있어.”
“…….”
“다만, 그편이 더욱 고통스러울걸. 손이 닿을 거리까지 다가가도 끝끝내 만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서 회장의 그 말은 자식을 잃은 어미에게 독화살처럼 치명적인 고통을 선사했다.
그에 대한 원망을 이겨 내지 못한 서미란 대표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하지만 서 회장은 거세지는 그녀의 적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태연하게 뒷말을 이었다.
“죽었다고 생각해라.”
“…….”
“내가 널 그렇게 생각하듯이.”
죽었다고…….
그 아이가 죽었다고…….
그렇게 믿느니 내가 죽어 버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애초부터 그 아이는 캄캄한 지옥과도 같은 내 삶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고 있던 등불이었으니.
* * *
한봄 도어락 근처 카페.
“한나봄! 여기!”
근처로 외근을 온 김에 나봄을 만나러 온 소라가 구석 자리에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가 반가웠던 나봄은 밝은 미소를 띤 채 곧장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회의가 생각보다 길어졌어!”
나봄은 푹신한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사과부터 건넸다. 그러자 소라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고, 화통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괜찮아, 오늘은 몇 시간도 기다릴 수 있어.”
“왜? 무슨 좋은 일 있어?”
나봄이 두 눈을 반짝이며 묻자, 소라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카드 한 장을 들었다.
‘프러포즈 in 제주 응모권’이라고 적힌 그 카드는 밑부분이 찢어져 있는 상태였다.
“이게 뭐야? 당첨됐어?”
나봄의 질문에 소라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첨은 아니고 응모 기회를 얻었어. 아무나 주는 응모권이 아니라 오늘 매시 정각에 오는 사람한테만 주는 응모권이라고. 난 무려 정각 열두 시 오십오 초에 결제 찍어서 받았지!”
“우와, 딱 오 초 남기고 결제했었네? 이거 타면 제주도 여행 가는 거야?”
“그렇단다, 친구여! 업무에 찌든 나한테 찾아온 단비 같은 행운이지!”
단순히 응모했을 뿐이었지만 소라는 당첨 소식이라도 들은 양 진심으로 기뻐했다.
나봄은 그런 그녀를 보는 게 좋아서, 덩달아 신이 난 얼굴로 말했다.
“나도 볼래. 응모권 줘 봐.”
“응, 여기. 거기 밑에 써 있는 호텔, 그거 5성급이다.”
“진짜? 되면 정말 좋겠다! 여기 하루 묵는 데 오십만 원 돈이라고 들었는데.”
나봄은 곱게 휘어진 눈으로 응모권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항공권은 물론, 5성급 호텔까지 무료로 지원해 주는 5박 6일 일정의 제주 여행은 그야말로 엄청난 기회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 응모권의 세부적인 설명은 살짝 당황스러웠다.
“본 이벤트는 제주 H크루즈에서 주최하는 초호화 여객선 프러포즈 행사입니다……?”
“그래그래! 비싼 배도 탈 수 있다!”
“아니, 배가 문제가 아니라 이거 프러포즈 행사라는데? 커플들 대상이래.”
어쩐지 하트가 가득하다 했던 그 응모권은 연인이 있어야 참여 가능함을 명시하고 있었다.
그 말은 즉, 아직 만나는 사람이 없는 소라는 참여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소라는 여전히 반짝이는 두 눈으로 천진난만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뭐?”
“그래서 뭐라니…… 너 남자 친구 없잖아.”
“괜찮아, 괜찮아. 있다고 뻥쳐 놨어.”
“이게 그렇게 눈 가리고 아웅 한다고 해서 될 문제일까?”
“정 뭐라고 하면 나는 나 자신과 연애한다고 하면 되지!”
예전부터 대책 없기로 유명했던 소라는 이번에도 얼렁뚱땅 상황을 넘길 모양이었다.
나봄은 그런 그녀의 훗날이 심히 걱정되었지만 딱히 들뜬 친구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애써 동조해 주기로 했다.
“하긴, 이미 된 걸 설마 취소하겠어? 일단 되기나 했으면 좋겠다.”
“그러게. 이거 당첨되면 너랑 같이 가 줄게! 동반 1인이니까!”
“하하, 그래. 말이라도 고마워.”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나봄은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는 채소라는 예전부터 당첨 운이 지지리도 없기로 유명했으니까.
“나 그럼 커피 좀 시키고 올게.”
나봄은 소라에게 응모권을 돌려주며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소라는 그런 나봄의 팔을 붙잡았고 옆 사람은 듣지 못하게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말고 20분 뒤에 시켜.”
“왜?”
“그때가 정각이니까. 이거 오늘 단 하루만 응모할 수 있는 거야. 혹시 알아? 니가 당첨돼서 단태오한테 성대한 프러포즈를 선물해 주게 될지.”
“뭐, 뭐?”
소라의 입에서 툭 튀어나온 ‘프러포즈’라는 단어에 나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론 태오는 그녀의 사랑하는 연인이긴 했지만, 연애 기간이 너무 짧아서 프러포즈까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봄은 붉어지려는 얼굴을 애써 수습하며 대답했다.
“돼, 됐어! 아직 그럴 때 아니야.”
“왜?”
“아직 사귄 지 얼마 안 됐어. 태오한테 결혼 생각이 있는지도 안 물어봤고…….”
“흐음.”
수줍음 가득한 나봄의 대답을 들은 소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 눈초리가 왠지 찜찜해진 나봄은 뾰족해진 목소리로 추궁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넌 단태오랑 결혼할 생각이 있구나?”
“뭐?”
“걔가 결혼하자 그러면 할 건가 봐. 태오 입장만 걱정하는 걸 보니까.”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결혼은 나봄 역시 생각도 안 해 봤는데.
하지만 어쩐지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어졌다.
커피포트처럼 금세 달아올라 버리는 얼굴은 부끄러운 그녀의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고 있었다.
소라는 그런 나봄을 보며 박수를 짝짝 쳤다.
“와아, 단태오 인간 승리다. 진짜.”
“태, 태오는 갑자기 왜?”
“몇 년을 끙끙 앓았던 첫사랑이 결혼까지 고려해 주고 있잖아! 내가 걔랑 조금만 더 친했어도 이 소식을 바로 전해 줬을 텐데!”
몇 년을 끙끙 앓았던 첫사랑.
태오의 마음을 너무 있는 그대로 표현해 주는 그 단어는 나봄을 괜히 찔리게 만들었다.
그가 몇 년을 끙끙 앓는 동안 나봄은 그를 마음에서 온전히 지워 버렸었고, 그건 오롯이 지금의 죄책감으로 자리 잡았다.
그 부분이 항상 마음에 걸렸던 나봄은 결심이 선 말투로 얘기했다.
“그래서 혹시 나중에라도 프러포즈를 하게 된다면 내가 먼저 할 의향이 있어!”
“응?”
“그런 건 더 오래 기다려 준 사람이 받아야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태오가 받아야 하는 게 맞아!”
의욕적인 나봄의 모습은 소라에겐 살짝 낯설게 비쳤다.
비록 나봄이 만났던 남자는 선우차준 한 사람밖에 없긴 했지만, 그를 만날 때의 나봄은 소극적이고 소심하고 수동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연인을 만난 뒤로는 사랑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드러내 주려 하고, 상대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보단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을 먼저 찾아서 해 주려 한다.
마치 예쁘게 피어 있기만 했던 한 떨기 꽃이 힘차게 뻗어 나가는 나무가 된 듯한 이 느낌.
‘아무래도 제 짝을 만난다는 게 이런 건가 봐.’
나봄의 변화가 하염없이 흐뭇했던 소라는 휴대폰을 켰다. 그러고는 정각 1분 전에 울리도록 알람을 맞춰 놓았다.
태오와 친하진 않아도 그의 마음 정도는 절절하게 느낀 바 있는 소라는 지금 나봄에게 추진기를 달아 주려는 참이다.
“정각에 커피 사서 너도 응모권 받아.”
“아까도 말했지만 프러포즈는 아직…….”
“프러포즈가 결혼 프러포즈만 있어? 그냥 사랑한다는 고백만 해도 되는 거잖아.”
“그래도 좀 민망한데…….”
“그리고 어디까지나 이 이벤트는 내가 당첨될 거야. 그러니까 넌 기분 내기용으로 가서 내고 와.”
기분 내기용이라…….
소라의 말에 부담감이 좀 줄어든 나봄은 잠깐의 망설임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나봄도 이런 이벤트에 당첨된 역사가 별로 없었다.
“알았어. 응모하는 데 돈 드는 거 아니니깐.”
나봄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지갑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건 얼핏 소라의 부탁에 못 이겨 마지못해 들어주는 것 같았으나, 흘끔 시간을 확인하는 그녀의 모습은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모습은 좀처럼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태오와 겹쳐 보였다.
그래서 웃음이 빵 터진 소라는 호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네들 결혼하면 우리 집에서 살아라! 우리 집에 가둬 놓고 얼마나 귀엽게 사나 구경하게!”
“너도 참!”
결혼이라는 단어에 나봄의 두 눈이 또 다시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래서 사랑하면 더 예뻐진다고들 하나 보다.
그의 얘기가 나올 때마다 반짝이는 나봄의 두 눈은 참 예쁘고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 * *
“여긴가…….”
커다란 한옥으로 되어 있는 고급 한정식 레스토랑.
돌담길을 걸어가는 태오의 얼굴은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우드레일 회장과 갑작스러운 만남이 잡힌 날이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행사 때 먼발치에서 얼굴만 몇 번 봤을 뿐, 시선조차 마주칠 일이 없었던 서 회장은 태오에겐 까마득히 높은 사람이었다.
그의 밑에서 일을 하고는 있지만 그에게 관심을 받은 적은 없었고, 우드레일 본사에서도 기뻐할 만한 성과를 몇 번 내긴 했지만 그의 귀에 단태오의 이름이 들어간 일은 없었다.
그런 와중에 들려온 승진 소식은 반갑기보다는 불안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을 사는 동안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는 걸 뼈저리게 배워 왔으니.
“예약은 하셨습니까?”
레스토랑 가장 안쪽에 위치한 VIP 전용 별채에 다다르자, 한복을 차려 입은 점장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순간 저도 모르게 움츠러든 태오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드레일 현장팀장 단태오입니다. 서재균 회장님과 미팅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점장은 보다 친절한 미소를 띠었고, 그를 운치 있는 버드나무 옆 화려한 별채 쪽으로 안내했다.
“아, 회장님께서는 이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태오는 어색한 걸음으로 그녀의 뒤를 따르며 생각했다.
서 회장이 무슨 소리를 할지 몰라서 아무런 대답도 준비해 오지 못한 지금, 그는 정신줄이라도 똑바로 붙잡고 있어 볼 참이다.
그래서 남몰래 심호흡을 고르고 있는 사이.
“들어가시죠.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점장이 미닫이문을 열며 말했다. 그제야 똑똑히 시선 끝에 담기는 서 회장의 모습은 먼발치에서 봤던 모습보다 위압적이었다.
태오는 숨통이 조여 드는 걸 느끼며 그가 기다리고 있는 별채 안으로 들어섰다.
“아, 자네가 단태오 대리인가.”
서 회장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느껴지는 한기와 달리 그의 표정은 부드러웠다.
하지만 입가에 어린 인자한 미소엔 탐욕이 가득하다는 걸, 태오는 단번에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아, 본부장님. 도착하셨군요! 오랜만입니다!”
“네. 오랜만입니다, 점장님.”
“회장님은 별채에 계십니다. 회사 다른 직원분도 도착하셨어요.”
“그렇습니까?”
“그럼 안내를……”
“아니요, 담배 한 대만 하고 가겠습니다.”
표정이 좀처럼 정리되지 않아 쉽사리 주차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차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두 남자가 원치 않았던 인연의 실이 손쓸 수도 없을 만큼 헝클어져 버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