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내가 너의 곁에 서 있을게.
2018.01.29.
“예? 지금 승진이라고 하셨습니까?”
태오가 살고 있는 목동의 한 아파트 안.
엘리베이터에서 막 몸을 내린 태오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그러자 휴대폰 너머 인사팀장은 건조한 목소리로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네, 그렇습니다. 그동안 현장팀에서 특출 난 업무 성과를 보여 준 것을 높이 사, 회장님께서 직접 지시하셨습니다.”
“’Lily’라인 공식 판매는 아직 한 달 남았잖습니까. 소비자들 반응도 나오기 전인데 뭔 놈의 승진을 벌써…….”
“예약 구매율만 확인해 봐도 어느 정도의 반응은 예상할 수 있습니다. 분명 이번 프로젝트는 대성공을 거둘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 편히 보상 받으셔도 됩니다.”
인사팀장은 마음 편히 받아들이라 했지만 태오는 어쩐지 찜찜한 구석을 지워 내지 못했다.
아무리 예약 구매율이 높다고 해도 그건 프로젝트 결과의 포문을 여는 정도에 해당될 뿐, 완전한 성공이라고 평가하긴 어려운데.
깐깐하고 냉정하기로 소문난 우드레일 치고는 일을 안일하게 처리하고 있다. 성급한 호평을 하며 그를 추켜세워 주는 게 의심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제 현관문 앞에 멈춰선 태오는 생각할 시간을 갖기 위해 통화를 일단락 짓기로 했다.
“아…… 일단 제가 집에 손님이 있으니까 내일 본사에서 얘기합시다. 어차피 총 회의 때문에 그쪽으로 출근해야 합니다.”
그러자 곧바로 흘러나온 인사팀장의 말은 더욱 의미심장했다.
“아니요, 내일 단태오 씨는 총 회의 말고 회장님과의 오찬을 가지게 될 예정입니다.”
“오찬이요?”
“어차피 승진을 하게 되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일들을 맡게 되실 겁니다. 사사로운 업무들은 앞으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갑자기 뭔…….”
그 일방적인 통보는 도저히 상식선에서 이해가 불가능했다.
승진 못 시켜 줘서 죽은 귀신이라도 달라붙었는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급히 돌아가는 상황은 태오의 혼을 쏙 빼놓기에 충분했다.
“그럼 오찬이 열릴 장소는 메일로 보내 두겠습니다. 시간은 총 회의 시간과 동일하니 늦지 말고 참석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쏟아지는 의문들을 꺼내 놓기도 전에 인사팀장은 일방적인 당부를 끝으로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허망하게 끊어져 버린 휴대폰을 든 태오의 미간이 사납게 구겨졌다.
“이게 뭐하자는 거야, 대체.”
어디선가 구린내는 스멀스멀 풍겨져 나오는데 그게 어딘지는 모르겠고. 못 들은 척 무시해 버리기엔 회장까지 개입된 상황이고.
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순식간에 머릿속이 복잡해진 태오는 신경질적인 손끝으로 도어록 비밀번호를 눌렀다.
집에 태오의 생일상을 차려 주러 온 박 여사가 있는 만큼 최대한 기분 좋게 들어가고 싶었는데, 망할 놈의 전화 한 통 때문에 심기는 불편해질 대로 불편해져 버렸다.
“왔습니다.”
그래서 하염없이 딱딱한 인사를 건네며 집 안으로 들어서자.
“아, 태오 일곱 살 때 이런 일도 있었다!”
“무슨 일이요?”
“태오한테는 형제가 없잖아. 그래서 항상 외로웠나 봐. 그 와중에 다섯 살짜리 동네 꼬맹이가 태오를 형아 형아 하면서 잘 따랐었는데…….”
“네.”
“어느 날은 진지한 얼굴로 나한테 와서는 이제부터 자긴 그 꼬맹이 집으로 가서 걔 형아로 살겠다고 하는 거 있지! 그 집 아줌마가 받아 주겠다고 했다고!”
“하하하, 정말요?”
“그래! 그때부터 무심한 구석이 있긴 했어. 나봄이 너한테는 안 그러나 몰라.”
방금 전 인사팀장의 전화보다 더 뜬금없고 이해 안 되는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내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부엌 식탁에 앉아서 하하 호호 웃고 있는 저 두 여자는 나봄과 박 여사가 틀림없었다.
한 번도 소개시켜 준 적이 없는데 대체 둘이 왜…….
“뭐야, 둘이.”
깜짝 놀란 태오는 신발도 미처 벗지 못한 채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어, 아들 왔냐?”
“태오야, 어서 와!”
그러자 그제야 태오에게 관심을 보인 두 사람은 신이 난 표정으로 말했다.
“얼른 와서 밥 먹어라. 우린 배고파서 먼저 들었어.”
“그래, 얼른 앉아! 어머님이 가져온 반찬 다 맛있더라.”
“아니, 밥이 문제가 아니라 둘이 어떻게 같이 있냐고.”
“너희 집 왔더니 참한 처자가 짠! 하고 저 방에서 나타나더라.”
“뭐요?”
“아아, 그게! 너 생일인 거 알고 깜짝 파티 해 주러 여기 왔었는데 어머님이 먼저 들어오셨어!”
태오는 두 사람의 설명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으나 분위기가 나빠 보이지는 않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들이대는 박 여사의 성격은 나봄에게 부담이 되었을 수도 있을 테니.
태오는 가방을 대충 내려놓고, 나봄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으며 물었다.
“괜찮아? 갑자기 엄마가 들어와서 놀라진 않았어?”
박 여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나봄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재밌게 얘기하고 있었어!”
“무슨 얘기?”
“아, 그게…….”
“단태오의 과거사 한 트럭 쏟아 냈지, 내가.”
불쑥 끼어든 박 여사의 대답에 태오의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
명절 때마다 그랬듯, 이번에도 태오의 유년 시절 이야기를 놀림감 삼아 풀어놓았나 보다.
어쩐지 집에 들어오자마자 내 흉 보는 소리가 들리더라니.
“저 말 믿지 마. 다 거짓말이야.”
태오는 나봄의 두 뺨을 부드럽게 부여잡고 말했다. 그러자 박 여사는 동조하는 척 하면서 태오를 더욱 약 올렸다.
“그래, 나봄아. 몇 개는 잊어 줘. 태오 학예회 때 독창 사건이라든지.”
“아, 그것까지 말했어요? 미치겠네!”
“뭐 어때! 연인 사이면 나봄이도 너 노래 최악인 거 알 거 아니야!”
“이게 누구한테 물려받은 유전자인데!”
두 사람은 얼핏 틈만 나면 싸우는 톰과 제리처럼 비쳤다.
하지만 그 모습은 친구처럼 친밀하고 편안해 보였기에, 나봄은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해졌다.
아무래도 이 세상에는 핏줄이 무색할 만큼 잔인한 가족사도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요즘 들어 그런 이들 때문에 가슴 아파했던 나봄은 태오의 가족만큼은 안락하고 따듯해 보여서,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 * *
“커피라도 한잔하시고 가시지 그러세요.”
태오까지도 식사를 마친 직후.
나봄은 그러기가 무섭게 곧바로 떠날 채비를 하는 박 여사에게 말했다. 하지만 박 여사는 손을 휘저으며 서둘러 신발을 신었다.
“아니야, 저놈 장가보내려면 데이트할 시간 마련해 줘야지.”
“그래도 아쉬운데…….”
나봄은 그녀와의 이별을 진심으로 서운해했으나, 태오는 미련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가세요.”
그리 말하는 그의 단호한 목소리엔, 기억도 하기 싫은 학예회 독창 사건을 시작으로 각종 흑역사를 까발려 버린 박 여사에 대한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맛에 태오를 놀리는 박 여사는 조금도 아랑곳 않고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괜찮아. 나봄이는 너 귀엽다고 생각할 거야.”
“아, 쫌.”
마지막까지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아쉬워하고 있는 중이라고, 나봄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하여간 이들은 만날 때마다 심심하진 않겠다.
“그럼 엄마는 진짜 갈게. 알아서 잘 가니까 따라 나올 필요 없어.”
두 사람의 배웅을 받으며 현관을 나선 박 여사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나봄은 고개를 꾸벅 숙여 공손히 인사했고, 곁에 서 있던 태오는 언제 심술을 부렸냐는 듯 걱정스레 물었다.
“밤인데 혼자 택시 잡을 수 있겠어요?”
“내가 애니? 진짜 따라 나오지 마. 나도 혼자 밤거리 걸어가면서 사색 좀 해 보자.”
박 여사는 시니컬하게 태오의 걱정을 받아쳤다. 신경 써 주는 거 좋아하면서 항상 괜히 그랬다.
머지않아 태오가 사는 층까지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박 여사는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나봄에게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오늘 반가웠어. 우리 태오 잘 부탁해.”
“네, 저도 반가웠어요! 어머님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나봄의 입에서 나오는 어머님 소리는 언제 들어도 마냥 좋았다.
그래서 신이 난 박 여사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함박웃음을 거두질 못했다.
나봄은 사랑하는 사람과 참 많이 닮은 그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그녀가 엘리베이터 문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아쉬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커피까지 드시고 가셨으면 더 좋았을 텐데…….”
“부담스럽지도 않냐.”
태오는 다시 집 안으로 들어서며 물었다. 그러자 나봄은 그의 뒤를 따르며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어머님께서 편하게 해 주셔서 전혀 그렇지 않았어.”
“하긴, 얼핏 보기에 나보다 더 친해 보이더라.”
“아…… 그래?”
“어, 누가 보면 니가 딸인 줄 알겠어.”
그리 말하는 태오에게는 별 뜻이 없었다.
그저 나봄이 그만큼 잘해 주었다는 칭찬이었는데, 나봄의 눈빛은 순간 살짝 움츠러들고 만다.
“왜 그래?”
태오는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이질감을 놓치지 않고 캐물었다.
그러자 나봄은 애써 입꼬리를 들어 올린 채.
“다행이다 싶어서…….”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듯한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뜻 모를 대답을 들은 태오의 시선이 더욱 의아한 빛으로 물들었다.
나봄은 그런 태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애써 담담한 목소리로 감춰 온 비밀 하나를 털어놓았다.
“사실 부모님이 아주 어릴 때 이혼하셔서 나한테는 엄마라는 존재가 낯설거든.”
“…….”
“한 번도 엄마를 가져 본 적이 없어서, 오늘 그런 티가 날까 봐 걱정 많이 했어. 아무리 아빠가 열심히 키워 주셨다고 해도 엄마랑은 느낌이 좀 다를 수도 있으니까…….”
그 고백은 태오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동안 나봄이 소개를 시켜 준 사람도, 얘기를 꺼냈던 사람도 언제나 아버지인 한 사장뿐이었다.
“아아…….”
그래서 저도 모르게 눈빛이 먹먹해진 태오에게, 나봄은 무리해서 밝은 목소리를 냈다.
“어쨌든 딸처럼 잘했다니까 다행이다! 이제 걱정할 거 없겠어!”
이런 식으로 엄마에 대한 이야기를 성급히 마무리 짓는 건 그녀의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떻게든 감추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을 때. 들켜서든, 들킬 것 같아서든 어차피 그녀의 부재를 털어놓아야 할 때.
나봄은 항상 별거 아니라는 말투로 그 사실만 간결하게 전하고는 재빨리 화제를 돌리곤 했었다.
그래야 상대방은 어떤 것도 묻지 않고, 섣불리 궁금해하지도 못하고 깔끔하게 대화를 끝내 주었으니.
“우리 케이크 먹자! 내가 얼마나 맛있는 걸로 골라 왔는지 알아? 한 입만 먹어 봐도 깜짝 놀랄걸!”
태오도 그래 주길 원했던 나봄은 저녁상 때문에 잠시 넣어 두었던 케이크를 다시 꺼내며 말했다.
그러고선 커피도 타기 위해 정수기 쪽으로 몸을 틀었는데.
“어디 가. 잠깐 이리 와.”
태오의 손이 떠나려는 그녀를 붙잡아 당겼다. 그대로 끌려간 나봄이 정착한 곳은 다름 아닌 그의 품 안이었다.
“태, 태오야…….”
갑작스러운 온기에 당황한 나봄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아픈 고백을 한 그녀를 달래 주려는 것이겠지만, 그녀는 동정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상처가 더 드러나기 전에, 여기서 제발 그가 모른 척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지, 태오는 나봄을 끌어안은 두 팔에 힘을 더했다.
“……혼자서 무슨 걱정을 그렇게 많이 했냐.”
이윽고 흘러나오는 말엔 아니나 다를까 안쓰러움이 잔뜩 묻어 있었다.
나봄은 이럴 때마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
그래서 한 번 더 괜찮은 척을 해 보려던 그때.
“앞으로는 내가 있어 줄게.”
“……응?”
태오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뒤따라 이어지는 그의 말은 한 번쯤은 누군가 해 주길 원했던 다정한 위로였다.
“니가 불안해지고, 작아질 때마다 내가 니 곁에 서 있을게. 지금처럼 이렇게.”
“…….”
“그러니까 앞으로는 혼자 걱정하지 말고 나한테 기대.”
혼자 걱정하지 말고 기대라는 말.
그건 나봄이 감히 바라지 못했던 말 한 마디였다.
그동안의 나봄은 홀로 딸을 키우느라 고군분투해 온 아버지께 미안해서라도 공허한 티를 감추기 급급했었다.
어릴 땐 그게 무척이나 힘겨웠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괜찮아지길래, 이젠 얼굴도 모르는 존재의 빈자리 따위 잊고 잘 사는 줄 알았는데.
태오의 위안은 그녀가 외면하고 있던 중요한 부분들을 일깨워 주고 있다.
넌 잘 살고 있던 게 아니라, 용케 잘 버티고 있던 거라고. 그러니 이제는 누군가에게 기댄 채 잠시 쉬어 가도 괜찮다고.
나봄은 자신을 꼭 끌어안은 태오의 몸을 마주 안아 주었다. 그러고는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포옥 파묻었다.
그제야 더욱 선명해지는 그의 온기는 모든 아픔과 걱정들을 다 녹여 버릴 수 있을 만큼 따듯했다.
“태오야.”
나봄은 입술을 움직여 그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응.”
곧바로 대답하는 태오는 예쁜 미소를 짓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건 목소리에 맺힌 행복감만으로도 알아차릴 수 있다.
이 순간, 내가 너로 인해 기뻐할 때 너도 나로 인해 기뻐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내가 정말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나봄은 소중한 마음을 오롯이 전할 수 있는 한 마디를 꺼내 놓았다.
태오는 그 고백에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숨결 같은 웃음을 흘려보냈고.
“모르겠는데.”
능청스러운 대답과 함께 잠시 그녀를 품에서 떼어 냈다. 그런 뒤 다가오는 입술은 오늘도 어김없이 장미처럼 검붉었다.
“행동으로 보여 주는 게 더 좋아.”
그의 혀끝이 집요하게 밀고 들어온다. 달아오를 때마다 힘이 들어가는 손끝은 그녀를 영원히 놓지 않을 것만 같다.
나봄은 오늘처럼 정신없는 하루도 사랑스럽게 만들어 주는 이 남자가 너무 좋아서.
자꾸만 욕심이 난다.
영원히 함께하는 사이가 되고 싶다는,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었던 행복한 욕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