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남친이 내게 반했다-77화 (77/104)

77. 뜻밖의 생일 파티

2018.01.22.

구두.

분명 나봄에게 위험할 거라 생각했던 태준의 물건은 오래된 구두 한 짝이었다.

그리고 편지.

태오는 함께 들어 있던 편지도 혹시나 싶어 읽어 보았으나, 12년 전쯤 쓰인 듯한 그 편지 안엔 단순히 형으로서의 걱정만 담겨 있을 뿐 해가 될 만한 내용은 없었다.

그렇게 태준에 대한 오해를 풀고 나니 어렴풋이 파악되는 선물의 의미는 떠나야 하는 자의 무거운 미련이었다.

그걸 전달해야 하는 역할을 맡게 된 태오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차준의 집안사는 옆에서 대충 훑어만 봐도 손쓸 수 없이 엉켜 있는데, 태준의 부탁을 받아 버린 태오는 본의 아니게 얽혀 들어가야 한다.

선우차준과는 사이도 안 좋은데. 이걸 대체 어떻게 전하냐.

고민스러운 와중에도 다행이라도 생각되는 건, 이 찜찜한 일을 나봄이 맡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마 마음 약한 그 녀석은 제 일보다 더 끙끙거리며 걱정하다가, 쓸데없는 참견까지 다 했을 게 뻔했다.

“그냥 자리에 던져두고 올까…….”

지끈거리는 두통을 참지 못하고 사무실 책상에 고개를 떨어트린 태오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하지만 선우차준 성격이라면 CCTV를 뒤져서라도 그걸 두고 간 사람을 찾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다 발견한 사람이 나라면 선우차준은 내가 분명 뭔가를 알고 있어서 수상쩍게 전달한 거라고 생각하겠지.

“……차라리 택배 기사처럼 무미건조하게 배달해?”

굳이 따지자면 이편이 덜 의심스러워 보였으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었다.

애초에 다리가 불편한 태준이 일면식조차 없던 태오를 찾아와 중요한 물건을 맡길 리가 없으니.

어떻게 고민을 해 봐도 구두를 전해 줄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전달할 기회가 생길까 싶어 차 트렁크에 넣어 두긴 했지만, 그 기회는 쉽사리 찾아오지 않을 것 같다.

결국 걱정만 깊어진 태오는 차가운 사무실 책상에 애꿎은 이마만 쿵쿵 찧어 댔다.

그래서 그의 이마 정중앙이 빨개질 무렵.

지이이잉― 지이이잉―

휴대폰이 길게 몸을 떨며 전화 수신을 알렸다. 태오는 계속 책상에 머리를 박아 둔 채, 휴대폰만 제 귓가로 가져와 전화를 받았다.

“네, 우드레일 퍼니처팩토리 현장팀장 단태오입니다.”

―어쩐 일이냐? 니가 전화를 빨리 받고.

“……엄마?”

예상치 못한 박 여사의 연락에 태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평소 안부조차 묻는 일이 없는 무뚝뚝한 박 여사는 항상 뭔 일이 터졌을 때만 전화를 걸곤 했다.

그 일이 분명 얼마 전 운전면허를 딴 아버지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 태오는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 또 주차하다가 남의 차 긁었어요?”

―아니, 요즘 니 아버지 주차는 잘해. 멀쩡한 전봇대에 차 옆구리 긁어 먹었으면 긁어 먹었지.

“그럼 왜 어쩐 일로 전화를 다 하셨어요.”

―어어, 오늘 언제 퇴근하나 하고.

“퇴근은 왜.”

―오늘 너 생일이잖아. 지금 니 생일상 차려 주러 서울 가려고 하는데.

아…… 오늘이 내 생일이었나.

평소 제 생일을 잘 챙기지 않던 태오는 눈을 가늘게 떴다.

신경 쓸게 너무 많아 오늘 할 일을 반도 끝내지 못한 태오는 빼도 막도 못하게 야근을 해야 할 처지였다.

“오늘은 시간 못 내요.”

태오는 박 여사에게 아쉬움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비보를 전했다.

그러자 박 여사는 태오에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왜? 혹시 여자 친구랑 생일 같이 보내기로 했어? 그런 거라면 내가 굳이 찾아갈 필요 없이 한우는 택배로……

“아뇨, 그냥 야근인데요.”

―……뭐? 그냥 야근?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태오의 대답에 박 여사의 말투가 돌연 날카로워졌다.

이어지는 그녀의 목소리는 도대체 어디서 욱한 건지 사자처럼 쩌렁쩌렁했다.

―뭐어?! 너 오늘 여자 만나는 것도 아닌데 지금 내 생일상을 마다하는 거냐!

“아, 깜짝이야.”

―니가 언제까지 내가 차려 주는 생일상 얻어먹을 수 있을 것 같아?! 당장 내년에 장가가고 나면 이 호사도 끝이야! 나는 남의 집 식구는 안 챙기니까!

“아니, 장가는 무슨 장가요.”

―시끄럽고! 아직 우리 집 식구일 때 잔말 말고 생일상 받아! 안 그러면 너희 회사 찾아가서 아주 쪽팔릴 만큼 성대하게 열어 버릴 라니까.

태오는 자신이 한 말은 무슨 수가 있어도 지키는 박 여사의 쓸데없이 올곧은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제 생일 파티를 회사에서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던 태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이내 진심이라고는 하나도 담겨 있지 않은 대답을 했다.

“알았어요. 일찍 가도록 노력해 보면 되잖아요.”

아무리 노력해도 오늘 칼 퇴근은 무리일 것 같지만 말이라도 예쁘게 하면 그녀는 보통 진정하니까.

“아, 혹시 일곱 시 넘게 되면 연락드릴게요. 그땐 먼저 식사하세요. 정말 눈물 나게 아쉽지만.”

태오는 박 여사가 자신을 기다리느라 쫄쫄 굶지 않도록 미리 언지를 두었다.

박 여사는 그런 태오의 영혼 없는 연기력에 혀를 차면서도, 한결 흥분을 가라앉힌 목소리로 대답했다.

―출발하면서 전화해라. 고기 굽고 있어야 하니까.

“네네.”

그렇게 무뚝뚝하면서도 친근한 통화를 마친 태오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책상 위에 쌓아 두었던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다행히 그를 괴롭히던 구두의 존재는 업무에 집중할 수 있을 정도로 흐려져 있었다.

그걸 어떻게 전해 줄지, 무슨 얘길 하면서 건네야 할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지만 굳이 서둘러서 결정하진 않아도 되겠지.

그가 반드시 오늘 전해 달라 말해 두었던 것도 아니었으니.

* * *

“……으응?”

우연찮게 태오의 메신저 프로필을 확인한 나봄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동그란 프로필 사진 칸 위에 쓰여 있는 알록달록한 고깔모자.

이것은 오늘이 그의 생일이라는 뜻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나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다.

생각해 보니까 나는 내 남자 태어난 날도 모르고 있었구나. 너무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라 당연히 알고 있는 줄 알았어.

나봄은 읽고 있던 자료를 덮어 두고 황급히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벌써 퇴근이 더 가까운 오후 네 시. 지금까지 생일축하를 해 주지 않은 게 충분히 섭섭해질 시간이었다.

선물이야 백화점을 열심히 돌아다니면 하나 장만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만 덜렁 전해 주는 건 굉장히 성의 없어 보일 텐데.

대체 어떻게 하면 생일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고,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서프라이즈 파티처럼 생일을 축하해 줄 수 있을까.

“서프라이즈 파티라…… 그래, 서프라이즈 파티!”

고민하던 나봄의 머릿속에 반짝 해결책이 떠올랐다.

준비된 서프라이즈 파티처럼 그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생일상을 준비해서 그를 위한 서프라이즈 파티를 열어 주면 되는 문제였다.

그렇다면 오후 늦도록 생일 축하 메시지 한 통 보내지 않은 게 납득되겠지.

결심이 선 나봄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오가 퇴근해서 집에 도착하는 건 오후 일곱 시쯤일 테니, 지금 출발해서 준비하기 시작하면 얼추 시간은 맞출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막 가방을 챙기려던 그때.

“오오, 한 팀장! 벌써 다 끝낸 거야?”

그녀의 수정 자료를 기다리고 있던 한 사장은 화색이 감도는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

순간 당황한 나봄은 외부 업체 미팅을 나간다는 말로 둘러댈까 했지만, 예전부터 그녀의 거짓말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잡아내던 한 사장인지라 솔직하게 대답하는 편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아니요! 저 오늘 이만 퇴근해 보려고 합니다!”

“뭐?! 왜!”

“태오 생일이거든요!”

“아니, 그렇다고 이렇게 갑자기…….”

당당한 나봄의 대답에 기가 찬 한 사장은 헛웃음을 치며 그녀를 붙잡으려 했다.

“대신 자료 수정은 오늘 밤을 새서라도 완성해 둘게요!”

그러나 두 눈을 반짝이며 호언장담하는 그녀는 벌써 마음을 콩밭에 두고 온 상태였다. 억지로 붙잡아 둔다고 해서 업무 효율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어휴, 내가 못 말려. 너 약속 꼭 지켜야 한다.”

결국 나봄에게 지고만 딸 바보 한 사장은 오늘도 한 수 물러나고 말았다.

“네! 감사합니다! 돌아와서 정말 열심히 할게요!”

이제야 본격적으로 출발할 수 있게 된 나봄은 한 사장의 목덜미를 꽈악 끌어안았다.

잔뜩 신이 난 그녀의 밝은 얼굴은 확실히 그가 기다리던 수정 자료보다도 반가운 것이었다.

“아, 그리고 나가면서 직원들한테는 외부 미팅이 있다고 해.”

“저 거짓말은 영…….”

“그럼 내가 그렇게 둘러댈 테니까 넌 말없이 나가라.”

한 사장은 조언 아닌 조언과 함께 나봄을 떼어 냈다. 나봄은 그 말에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고.

“알겠어요! 그럼 다녀올게요!”

손까지 흔들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오늘 그녀가 준비한 파티 때문에 태오가 아닌 엄한 사람을 까무러치게 놀라게 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 * *

서재균 회장이 상주하고 있는 우드레일 로얄층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서 건조한 표정으로 내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차준이었다.

스리피스 양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그는 빠른 듯한 발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본부장님.”

복도 양 옆에 대기하고 있던 경호팀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하지만 서 회장의 직속 비서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말꼬리를 흐리며 물었다.

“본부장님, 갑자기 회장님껜 어쩐 일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회장님 안에 계십니까?”

“네, 계시긴 하십니다만…….”

“그럼 따라 들어오지 마시고 여기서 대기하시죠.”

그리 말하는 차준은 평소보다 싸늘한 한기를 띠고 있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제자리에 멈춰 버린 직속 비서는 불안한 시선으로 멀어지는 차준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바로 그때.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차준이 향하고 있던 무거운 문이 열리고 위압적인 실루엣이 등장했다.

천천히 들어 올린 차준의 시선이 정면에 머물렀다.

언제 마주쳐도 소름이 끼쳐 오는 검은 기운.

차준은 그에 억눌려 제대로 호흡하기조차 버거웠으나, 간신히 정신을 붙잡았다.

오늘 그에게 중대한 용건을 전해야 하는 차준은 마음속에 잠자고 있는 나약함조차 숨겨야 할 처지였다.

떨리는 숨소리를 정리하기 위해 마른침을 삼켜 넘긴 차준은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회장님, 저는…….”

하지만 제대로 된 첫 마디를 꺼내 놓기도 전에.

“아, 차준아. 안 그래도 널 부르려 했다.”

평소보다도 부드러운 서 회장의 목소리가 말문을 가로막았다. 그와의 갈등만을 예상하고 있던 차준은 쉽사리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그러자 서 회장은 그런 차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는 조용한 음성을 말을 이어 나갔다.

“예상보다 일의 진척이 빠르더구나. 어떤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성과를 냈어. 그 점 하나는 높이 사마.”

만족감이 넘치는 그의 말은 이해할 수 없어서 차준은 더욱 불안해졌다.

최근 들어 그가 나에게 기대한 것은 단 하나, 태준을 집 안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것.

하지만 그건 차준으로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태준을 향한 감정이 증오뿐이라고 해도, 함께라서 행복했던 지난 시간들이 전부 빛바랬다고 해도.

한때나마 소중했던 사람을 벼랑 밑으로 떨어트리고, 그 대가로 또 다른 소중한 사람을 불행한 제 곁에 묶어 놓는 짓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서 회장의 명령에 제대로 된 거부 의사를 표하기 위해 이렇게 그를 찾아왔건만.

“우선 지금은 오찬 약속이 있어서 오래 얘기할 수가 없겠구나.”

“…….”

“나중에 본가로 찾아오면 그때 내가 들어주기로 한 부분부터 우드레일 사장직 얘기까지 천천히 나눠 보도록 하자.”

오히려 그는 원하던 바가 이뤄진 다음의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원치 않는 걸 없애 주었으니, 나는 니가 원하는 걸 주는 것이 당연하지.”

그의 뜻에 반하려는 날 완전한 아군으로 대하고 있다.

마치 내가 돌이키고 싶었던 모든 상황이 이미 손쓸 수 없을 만큼 망가져 버린 것처럼.

“회장님, 잠시만…….”

차준은 더 늦기 전에 서 회장의 걸음을 붙잡아 보려 했다.

“회장님, 차를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그래, 늦기 전에 출발하지.”

하지만 더 이상 차준과 할 말이 남아 있지 않은 서 회장은 그럴 새도 없이 차준의 곁을 떠나 버렸다. 이성을 잃어버린 차준은 그 뒤를 따를 수도 없었다.

그저 혼란에 물든 눈빛으로 허공만 바라보며 멈춰 있을 뿐.

“하아, 하아…….”

질식시킬 듯 차오르는 불안감이 그의 숨통을 꽉 조여 왔다.

똑바로 뜨고 있는 두 눈이 무색할 정도로 시야가 좁아지고, 끝없는 어둠에 갇혀 버린 듯 앞이 깜깜해졌다.

이대로 의식을 놓아 버리기 직전의 순간.

“형…….”

그의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건 오랜만에 불러 보는 그 사람이었다.

내뱉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이 목소리처럼 그 사람도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을까 봐.

정말 죽을 만큼 겁이 난다. 그것이 내가 바란 현실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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