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마지막 작별 인사
2018.01.15.
라운지 바 프라이빗 라운지에서는 음악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더 오롯이 느껴지는 서 대표의 위압감은 연회장에서 마주했을 때보다 거대했다.
그녀와 눈도 맞추기 힘들었던 나봄은 괜히 테이블 위에 놓인 물잔만 매만졌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제 정수리에 닿는 그녀의 시선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무슨 일로 은밀하게 나를 불러낸 건지,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연회장 때 보고 두 번째로 보네. 맞나?”
역시나, 서 대표는 창립 기념회 파티 이야기로 말문을 열었다.
나봄은 고개를 끄덕거릴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바로는 그때 서 대표와의 만남이 그리 좋지 못했다.
‘이런 식의 감정싸움으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이럴수록 비참해지는 건 폐가 될까 봐 여기 오지도 못한 그 사람뿐이잖아요…….’
‘뭐……?’
‘그걸 조금이라도 알고 계시다면 사람들 앞에서만큼은 감정싸움을 자제해 주세요. 더 이상 엄한 사람 꼴만 우스워지지 않게…….’
‘니가 그 애를 어떻게…….’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아는 척, 맹랑한 소리를 했던 건 지금 생각해 봐도 참 무모한 일이었지. 이렇게 두려운 후사가 기다릴 줄 모르고.
“아…… 네, 그때는 여러모로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했습니다.”
나봄은 뒤늦게라도 상황을 수습해 보기 위해 사과부터 했다. 그러나 서 대표는 느리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됐어. 너도 들은 게 있으니 할 말이 많았겠지. 무례한 말이라고 치부하기엔 꽤 그럴싸했어.”
목소리는 시니컬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녀의 말이 진심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자신을 부른 이유가 의아해진 나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저는 무슨 일 때문에 불러내신 건지…….”
순간 그녀를 똑바로 향한 서 대표의 눈동자.
“어디까지 알고 있니?”
“네?”
“우리 집안에 대해.”
이윽고 꺼내지는 질문은 대답하기 난감했다.
나봄은 서 대표에게 민감한 부분까지 전부 선우태준으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봄은 입을 열기에 앞서 서 대표의 시선을 마주했다.
솔직하게 밝힐지, 아니면 되는 데까지 발뺌을 해 볼지. 그녀의 감정을 보고 정할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사막처럼 메마른 서 대표의 눈빛에선 그 어떤 것도 읽을 수 없었다.
나봄을 만나기 전에 이미 감정을 숨겨 놓은 사람처럼, 그녀는 그저 태연하기만 하다.
결국 나봄은 아무리 들여다보아 봤자 알 수 없는 서 대표에게 솔직해지기로 결심했다.
“창립 기념 파티 때 왜 그렇게 본부장님께 화를 내셨는지, 그 이유 정도는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알아요.”
“하, 그렇겠지.”
나봄의 대답에 서 대표는 헛웃음을 쳤다.
그건 결코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가 아니라서, 나봄은 다시 침묵을 택했다.
그 상태로 얼마나 정적이 흘렀을까.
“……이야기는 누구한테 들었는데?”
서 대표는 두 번째 질문을 꺼내 놓았다. 아까보단 조심스러운 걸 보니, 나봄의 입에서 어떤 이름이 나올지 이미 예상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에게 그 사람이 어떤 의미인지 익히 아는 나봄은 머뭇거림 끝에 대답을 흘려보냈다.
“선우…… 아니, 태준 씨를 만났어요.”
성은 저도 모르게 붙이려다 관두었다. 그녀는 그의 이름 앞에 ‘선우’라는 성이 붙는 걸 끔찍하게도 싫어한다고 했으니.
“정말 다 알고 있는 모양이네. 태준이 이름만 부르는 걸 보니까.”
서 대표는 한숨 섞인 목소리를 내보냈다. 그런 뒤 덧붙이는 말은 나봄이 듣기에 곤란한 그녀의 진심이었다.
“그게 거슬려서 불렀어. 난 태준이 주변에 있는 인간들은 경계하는 편이거든.”
“…….”
“예전에야 그 애 곁엔 항상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그게 당연하게 느껴졌었지만…… 지금 처지엔 옆에서 들러붙어 있는 게 이상하잖아,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봄이 태준의 곁에 들러붙어 있다고 할 순 없었다. 태준은 도움을 요청할 상대를 나봄으로 정했고, 그녀는 그를 뿌리치지 못해 만나 주었던 거니까.
나봄은 해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니 얘기 듣고는 조금 놀랐어. 태준이가 먼저 너를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지?”
“네? 아…….”
“사고 이후로 처음이야. 그 애가 누군가를 먼저 찾은 건.”
그리 말하는 서 대표는 이미 알고 있었다. 태준이 얼마나 절실한 마음으로 나봄을 찾았는지.
태준이 그녀에게 어떤 부탁을 했었는지도 이미 짐작하고 있는 듯하다.
나봄은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것 같아 마른침만 삼켜 넘겼다.
그러자 서 대표는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며 목을 축였고.
“아직까지도 선우차준을 마음속에서 못 놓아서 그래.”
뜻밖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이 순간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말투와 분위기는 태준에 대한 얘길 할 때와 달리 몹시도 회의적이었다.
나봄은 서 대표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태준이 해 주었던 이야기들을 생각했다.
‘차준이는 새아버지하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에요. 처음 그 애가 생긴 걸 아셨을 때, 어머니는 한동안 식음까지 전폐하셨어요.’
‘심지어는 뱃속의 아이를 유산시키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계단에서 굴러떨어지신 적도 있어요.’
‘어머니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방긋 웃는 그 아이를 내내 증오했어요.’
그녀의 상처에서 배어 나온 차준을 향한 나쁜 감정들.
그것은 여자로서 어느 정도 이해되는 내용이었으나 공감해 줄 수는 없었다.
그녀가 겪어야 했던 아픈 과거들은 차준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었기에.
하지만 그 사실을 신경조차 쓰지 않는 서 대표는 부정적인 뒷말을 이어 나갔다.
“예전부터 그랬어. 태준이는 제멋대로 굴고 싶어서 가족이랑 혼자 연 끊고 나가 버린 동생한테 계속 마음을 주더라고.”
“…….”
“아마도 안쓰러워했던 것 같아. 그땐 태준이가 모든 걸 다 가졌었으니까.”
서 대표가 말하는 안쓰러움의 다른 표현은 죄책감이었다.
그건 태준에게서 이미 익히 발견했었던 나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서 대표가 뒷말을 마저 잇자, 그녀의 고개는 부자연스럽게 멈칫해 버렸다.
“그래서 너한테 도움을 요청한 모양이야. 내 앞에서는 선우차준의 이름도 꺼내기 힘드니까, 너한테 과거사까지 밝혀 가면서 그 애 얘기를 했던 거겠지.”
지금 그녀가 짐작해서 꺼내 놓는 이야기는 진실과 미묘하게 다르다.
하지만 그 미묘한 차이는 확연히 다른 의미를 갖고 있어서, 나봄은 그녀의 말을 당장이라도 가로막고 싶었다.
그 마음을 전혀 모르는 서 대표는 단호한 목소리로 본론을 내뱉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관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애가 다시 찾아와 어떤 부탁을 하더라도.”
“아…….”
“불쌍한 사연 듣고 동정심에 이끌리지 말고 신경 끄라는 소리야.”
그러고는 자리에서 먼저 일어섰다. 나봄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녀를 따라 위로 들어 올려졌다.
“이건 경고가 아니라 조언이니까, 잘 생각하고 행동하길 바란다.”
서 대표가 마지막으로 꺼내 둔 말은 그들과 더 이상 얽히지 말라는 뜻과 같았다.
그녀의 말대로 이것은 경고가 아닌 조언이니 잘 새겨들어야 했으나.
“대표님.”
나봄은 왠지 여기서 대화를 끝내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도망치고 싶을 만큼 부담스러운 자리라 해도, 그녀는 이곳에서 한 가지 사실 하나는 바로잡고 싶었다.
“말씀하신 내용 중에 한 가지 오해가 있어요. 저 태준 씨한테 차준 오빠에 관한 얘기를 들은 거 아니에요.”
갑작스러운 나봄의 말에 서 대표는 움직이려던 두 발을 멈추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나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제법 오래된 것이었다.
“10년 전에…… 차준 오빠가 먼저 태준 씨에 대해 이야기해 줬어요. 형이 있다고. 언젠가 꼭 보여 주고 싶을 만큼 자랑스러운 사람이라고.”
차준이가……?
순간 드는 의문은 그 당시 차준을 향한 서 대표의 무관심을 절절하게 실감시켜 주고 있었다.
모든 것이 서 대표의 뜻대로 흘러갔던 그때. 아니, 태준이 그녀의 뜻대로 완벽하게 빛나 주던 그때.
태준만을 위해 온 인생을 바치고 있었던 그녀는 차준의 존재 자체를 철저히 외면했었다. 그의 탄생과 관련된 모든 일을 부정이라도 하듯이.
가끔 태준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곤 했지만, 노골적으로 듣기를 거부한 탓에 소식 몇 가지 정도만 겨우 접했었다.
때문에 선우차준이라는 사람에 대해선 제 배로 낳아 놓고서도 조금도 아는 바가 없었다.
그냥 본가와 인연을 끊고 나가더니 제멋대로 생각 없이 사는구나, 하고 그 애는 역시 매정하다 혀를 찰 뿐.
“가족 얘긴 한 번도 꺼내지 않던 사람인데 태준 씨 얘길 할 때는 정말 행복해 보였어요.”
그런데 그 애가 제 형에 대해 행복한 표정으로 얘기했다니.
“미국에 간 형의 연락을 혼자서 애타게 기다렸어요.”
그 시절의 그 애가 멀리 떠난 제 형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었다니.
“제가 형제 없이 외동으로 태어난 게 아쉬울 만큼 그 사람은 형을 정말 좋아했어요. 그건 다시 떠올려 봐도 그래요.”
나봄이 꺼내 놓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서 대표는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서 대표가 알고 있는 선우차준은 그저 태준의 다리가 망가진 이후에 임시방편으로 앉혀 놨더니, 태준이 재기할 틈도 주지 않고 그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씩 빼앗아 버린.
유일하게 저를 돌봐 주던 사람 하나 못 알아보는, 피도 눈물도 없는 비정한 놈에 불과했다.
“그래서 태준 씨를 도와준 거예요. 그 사람이 그렇게나 믿고 의지하던 사람이었으니까.”
“…….”
“그 사람이 저한테 태준 씨가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 얼마나 좋은 형인지 말해 주지 않았었더라면 어떤 사연을 듣더라도 외면했을 거예요.”
그러나 나봄은 그런 그 때문에 태준에게 스스럼없이 손을 뻗어 주었노라 말한다.
그건 정말 상상치도 못했던 일이라 서 대표는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그녀를 똑똑히 마주한 채 잠시 심호흡을 하던 나봄은 정말 중요한 뒷말을 덧붙였다.
“태준 씨는 불쌍하지 않아요.”
“…….”
“어떤 모습이든 태준 씨를 가장 자랑스러워해 줄 동생이 있잖아요.”
그래, 이 말을 꼭 해 주고 싶었다.
그는 절대 불쌍한 사람이 아니라고.
나봄이 기억하는 차준은 태준을 언제 어디서든 빛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긴장한 와중에도 제 할 말은 모두 마친 나봄은 다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니까…… 차준 오빠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 주세요.”
그 뒤에 주눅 든 목소리로 흘려보낸 말은 유치하리만큼 직관적이었으나, 그 부탁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서 대표는 그런 나봄에게서 시선을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고, 이내 프라이빗 라운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끝까지 그러겠다는 대답은 해 주지 않았지만 나봄은 그녀가 부정하지 않은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어쩌면 시간을 두고 조금이나마 고려해 볼 수도 있으니.
“하아…….”
서 대표 없이 홀로 남은 공간에서 나봄은 흐린 한숨을 내쉬었다.
적막한 공간은 여전히 싸늘한 한기를 띠고 있었으나 그게 전처럼 두렵지는 않았다.
그냥 많이 서글퍼졌던 것 같다. 감춘다고 다 감췄을 텐데도 미처 지우지 못했던 그녀의 상처가 머릿속을 떠나질 않아서.
* * *
[지금 통화 가능해?]
퇴근하고 돌아온 집.
나봄에게 짧은 메시지 한 통을 보내 놓은 태오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오늘 오후, 우드레일과 갑작스러운 사업 미팅을 하러 간 나봄 때문이었다.
사업 미팅이라면 현장팀장인 나를 빼 놓고 할 리가 없을 텐데.
찜찜한 마음을 쉽사리 추스르지 못했던 태오는 결국 본사 사업팀에 직접 확인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의 귀에 들려온 대답은 예상대로 ‘그런 스케줄 없다’라는 매정한 한 마디.
그때부터 속수무책 불어나기 시작한 태오의 걱정은 아직까지도 머릿속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선우차준일 텐데…….”
태오는 그녀를 이런 식으로 불러낼 사람이 차준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하려고 불렀는지는 몰라도 떳떳하게 얼굴 맞대고 만나서 할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 사실이 무엇보다 기분 더러웠던 태오는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오늘 사업팀에 미팅 스케줄이 없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아무것도 모른 채 끌려 나간 나봄에게까지 나쁜 감정을 드러내고 싶진 않아서 성질을 억누르고 한 번 더 보낸 메시지.
이번엔 전송 버튼을 누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로부터 답장이 왔다.
[서미란 대표님을 만났어. 자세한 건 내가 나중에 얘기해 줄게. 지금은 버스 안이라서 미안.]
그 안에 담긴 이름은 예상과 달랐으나 예상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라, 태오의 심장은 그만 철렁 내려앉아 버렸다.
“뭐? 그 여자가 한나봄을 왜 만나.”
서 대표가 차준의 친모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태오는 한순간에 혼란스러워졌다.
그녀가 나봄을 부를 일이라면 차준이나 태준에 관한 용건밖에 없을 텐데. 그건 태오로서 참아 주기 힘들 만큼 예민한 문제였다.
분노가 극에 다다른 태오는 곧바로 나봄에게 전화를 걸려 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붙잡은 이성은 그런 그의 손가락을 멈춰 두게 했다.
지금 통화가 곤란한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봤자 태오의 불안감만 일방적으로 터트리고 통화를 끝낼 게 분명했다.
“자세한 얘기 들어 보고 말하자. 들어 보고…….”
날뛰는 감정들을 애써 다잡은 태오는 휴대폰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느리게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불안에 휩쓸려 나봄을 걱정스럽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쉽게 물러가지 않는 의문점들은 태오를 더 큰 혼란 속으로 빠트렸다.
대체 그 여자가 나봄이를 왜 찾았지. 그 여자가 나봄이한테 무슨 용건이 있다고.
선우차준 때문인가. 하지만 선우차준은 이제 나봄이랑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잖아.
그럼 어제 나봄을 찾았던 선우태준 때문인가. 선우태준이 그 여자가 나서야 할 만큼 무리한 부탁을 했던 건가.
딱 거기까지 되짚었을 무렵. 태오의 머릿속에 태준의 한 마디가 생생히 떠올랐다.
‘오래 전에 차준이한테 전해 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도와주세요. 나는 그냥 그 애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조용히 사라지기만 할 테니까…….’
‘차준이한테 이거 하나만 전해 주세요.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봄 씨밖에 없어요.’
그리도 절절한 표정으로 차준에게 전해 달라 부탁했던 물건.
찝찝해서 열어 보진 않았으나 문제가 생긴다면 그것이 화근일 게 뻔했다.
이렇게 된 이상, 그 상자 안에 있는 게 대체 무엇인지부터 파악해야만 했다.
“이 새끼가 진짜…….”
이젠 차준이 아닌 태준에게로 분노가 옮겨 간 태오는 성급한 걸음을 제 방 쪽으로 옮겼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고이 올려놨던 상자를 거침없이 뜯어 버렸다.
그 안에 있는 것이 혹시 나봄에게 해가 될 만큼 위험한 물건이라면, 그는 당장 태준에게 찾아가 상자째 면상에 집어 던져 주고 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힘을 줬던 탓에 거의 찢어지다시피 열린 상자에서 맥없이 떨어진 건.
“……이게 뭐야.”
가죽이 바랠 대로 바랬으나 한 번도 신지는 않은 듯한. 함께 들어 있는 편지 한 통에서 오랜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까만 가죽 구두였다.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에 스무 살이 되는 동생에게 꼭 전해 주고 싶었으나.
‘형, 그거 알아? 신발을 선물하면 이별이 찾아온다는 거.’
‘그러니까 이거 안 받을래. 이 구두는 형이 다신 안 볼 사람한테나 줘.’
그 아이의 장난스러운 한 마디 때문에 훗날을 기약하다가 끝내 전해 주지는 못했던.
‘내 걱정은 하지 마. 앞으로도 계속 나한테는 형이 있어 줄 거잖아.’
먼 길을 떠나야만 하는 형의 마지막 작별 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