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불행한 행복과 행복한 불행
2018.01.12.
‘제 스스로 가치를 포기해 버린 놈이니,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이곳에 해충처럼 달라붙어 너까지 시들어 버리게 만드는 꼴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구나.’
서 회장의 목소리가 귓가를 자꾸 맴돈다.
‘니가 직접 선우태준을 처리해.’
아무리 무시해 보려 해도 그가 내린 잔혹한 명령은 가슴속에서 고요히 요동친다.
더 이상 은신처에 숨어 있지 못하고 찾아온 자신의 집무실.
자신의 책상 앞을 간신히 지키고 있는 차준은 잔뜩 엉켜 버린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하지만 생각이라는 걸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더욱 더 굳어 가는 이성은 이 상황을 이해하는 것조차 거부하는 듯했다.
그토록 증오하던 태준을 몰아내면 간절히 원하는 나봄을 곁에 둘 수 있게 해 줄 거라는 서 회장의 제안은 기회나 다름없는데.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차준의 숨통은 질식할 듯 조여 들어, 이때까지 풀어질 줄을 모른다.
‘그냥 받아들이면 편해. 받아들이면…….’
차준은 평소 하던 대로 서 회장의 명령을 최대한 따라 보려 했다. 어차피 거절할 권리 따위 없는 선택지였으니 고민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했다.
아직 정리되지 못한 가슴속의 불안감을 억지로 우겨 넣은 차준은 태준의 존재를 지워 버릴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항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를 몰아내는 건 개미 한 마리 죽이듯 쉬운 일이라서, 별다른 계획은 필요치도 않았다.
이대로 적당한 하수인을 찾아, 아무도 찾지 못할 곳으로 그를 치워 버리라는 명령만 내리면 끝날 일이다.
그렇게만 하면…… 선우태준도, 무책임한 그 여자도 내 인생에서 끊어 낼 수 있겠지.
“하아…….”
차준은 무겁게 차오르는 숨을 나직이 토해 냈다. 그러고는 그 대가로 얻을 수 있는 얼굴을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언젠가부터 아무리 손을 뻗어 붙잡으려 해 봐도 자꾸 멀어지기만 하던 그녀.
하지만 이젠 그런 그녀를 내 곁에 묶어 둘 수 있다.
어차피 부서트려야 했을 존재만 내 손으로 부서트린다면, 그녀는 더 이상 나 혼자 남겨 두고 떠나려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억지로 동기를 부여하며, 절망 가득한 눈빛을 진정시키고 있던 그때.
똑똑똑―!
다소 거친 노크 소리와 함께.
“본부장님! 본부장님 계세요?!”
어디서 들어 보긴 했으나 딱히 친근하진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억을 되짚어 보건대, 이 목소리는 요 며칠간 계속 쓸데없는 연락을 취해 왔던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의 허유리 파트장이 분명했다.
그녀와는 얽히고 싶지 않았던 차준은 기척을 죽인 채 대꾸하지 않았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이사님은 오늘 안정을……!”
“정말 중요한 일이라구요! 한나봄 씨하고 연관되어 있다고 전해 주시면 무슨 얘긴지 아실 거예요!”
하지만 의미심장한 얘기로 소란을 피우는 그녀를 가만히 놔둘 수는 없었다.
나봄은 곧 내 사람이 될 여자인데, 그녀 때문에 허튼 소문이라도 돈다면 불쾌한 일이 생길 게 뻔하다.
“들여보내세요.”
결국 무기력함보다 짜증이 앞선 차준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유리를 불러들였다.
“들어오라잖아요!”
벌컥!
그러자마자 신경질적으로 열린 집무실의 문.
어찌나 급히 달려왔는지 씩씩거리는 숨을 미처 고르지도 못한 유리가 차준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본부장님. 오늘부터 복귀하신다는 소식 듣고 곧바로 찾아왔습니다.”
“…….”
“긴히 해야 할 얘기가 있는데 잠시 대화 가능하실까요?”
가능하고 말고는 애초부터 중요하지도 않았으면서.
회의적인 마음과 달리 차준은 형식적인 눈웃음을 띠었다.
“얼마든지요.”
그런 뒤 꺼내 놓는 대답은 부드럽고 나긋했다. 집무실 책상에서 일어나 커피 테이블로 향하는 그는 얼핏 보기에 유리를 반기는 것처럼 보인다.
드디어 가슴 속에 쌓인 울분을 헤아려 줄 상대를 만났다, 라는 생각에 유리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였다.
유리는 차준이 소파에 자리를 잡기가 무섭게 건너편 소파에 마주 앉았고.
“본부장님, 한나봄 씨가 요즘 어떤 상태인지 전혀 모르시고 계신 것 같아서 알려드리려고 찾아왔어요.”
“……상태?”
“네. 본부장님하고 단태오 팀장을 두고 어장 관리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본부장님 입장을 봐서라도 조치를 취하셔야 하지 않을까…….”
그녀는 비서가 나가기도 전에 자신의 본론을 꺼내 놓았다.
그 입을 미처 막지 못한 차준의 시선이 애꿎은 비서에게로 매섭게 향했다.
“성호 씨.”
“예, 예!”
“눈치껏 문 닫고 나가 주셨으면 하는데.”
“아…… 알겠습니다, 이사님.”
비서는 차준의 싸늘한 목소리에 황급히 집무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끼익― 쿵!
무거운 나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차준은 유리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 눈빛은 예전에 보았던 것보다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유리 씨, 앉아서 마저 얘기하시죠.”
유리는 아직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으니 마음을 놓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 미소가 적대감의 크기와 같다는 것도 모르고.
* * *
“보고서 챙겼고, 수정된 부분 확인했고, 제품 사진 자료도 제대로 가져왔고…… 좋아, 놔두고 온 건 없네.”
서울 중심부의 호텔 라운지.
우드레일 사업부와의 미팅을 앞둔 나봄은 가방 안을 확인하며 초조한 마음을 추스렸다.
차라리 태오라도 함께 있었다면 긴장이 덜 됐을 텐데, 혹시나 해서 이번 사업 미팅에 참석하냐고 물어봤더니 그는 생전 처음 듣는 소리처럼 반응했다.
‘사업 미팅? 그런 거 처음 듣는데.’
‘아아, 그래? 넌 안 오나 보네.’
‘그런데 협업 업체가 왜 사업 미팅을 나가?’
‘응?’
‘누가 불렀는데. 혹시 선우차준이 불러낸 거 아냐?’
선우차준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태오는 괜한 의심을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의 미팅 일정과 내용을 공식 메일로 상세히 전달받았던 나봄은 그 말에 헛웃음을 쳤다.
차준의 성격이라면 말도 없이 불쑥 찾아왔으면 찾아왔지, 이런 얄팍한 속임수까지 써서 자신을 불러낼 리가 없었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오늘 일이나 열심히 하세요. 나는 미팅 끝나고 전화할게.’
나봄은 태오의 의심을 진정시키기 위해 일부러 여유를 부리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나서 부지런히 찾아온 미팅 장소.
알림문에 써져 있는 그곳으로 잘 도착하긴 했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나봄의 얼굴엔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거대 기업 우드레일이라서 그런가.
번쩍이는 샹들리에와 유럽 귀족이나 쓸 법한 앤티크 테이블, 그리고 정중앙에 놓인 대리석 분수대까지. 사업 미팅이 잡힌 호텔 라운지 바는 무척이나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내가 잘 찾아온 게 맞나?’
그런 의문이 들 때쯤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웨이터가 나봄에게 다가왔다.
“한나봄 씨 되십니까?”
“네? 아, 네.”
가장 먼저 그녀의 이름부터 확인한 그는 정중한 묵례를 건넸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안내해드릴 테니 따라오시죠.”
이윽고 그녀를 라운지 안쪽으로 조심스레 안내하기 시작했다. 꼭 귀빈을 모시는 듯한 그의 태도에 나봄은 더욱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저…… 우드레일 업체분 만나러 가는 거 맞죠?”
나봄은 순순히 그를 따르면서도 혹시나 싶은 마음에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그는 형식적인 미소를 입가에 띤 채 곧바로 대답했다.
“네, 프라이빗 라운지에서 한나봄 씨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회사 미팅을 프라이빗 라운지에서도 하나요?”
“내용에 따라서는요.”
“아아…….”
웨이터의 설명을 들은 나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하는 걸 들어 보니 우드레일과의 미팅이 있는 건 확실한 것 같고. 아마 오늘 회의 내용이 엄청 비밀스럽고 중요한 안건인 모양이야.
그렇게라도 상황을 정리하고 난 나봄은 긴장한 표정을 정리했다.
준비하라고 한 자료들은 전부 가져왔고, 혹시나 있을지 모를 브리핑을 위해 소리 내어 읽어 보기까지 했으니 떨지만 않는다면 이런 부담스러운 미팅도 무탈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 터였다.
“한나봄 씨, 이쪽입니다.”
때마침 라운지 바 가장 안쪽에 위치한 은밀한 룸 앞에 멈춰선 웨이터가 원목으로 된 문을 열며 말했다.
“네, 네!”
마음을 가다듬은 나봄은 움츠렸던 어깨를 풀었고, 씩씩한 발걸음을 룸 안으로 내딛었다.
하지만 룸 안에 있는 단 한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겨우 풀어졌던 몸은 도로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이제 오니?”
냉철하고 정확한 비즈니스로 매스컴의 주목을 받고 있는 여성 기업인.
창립 기념회 파티에서 강렬한 첫 대면을 가졌던 우드레일의 대표이자…….
선우차준의 친어머니.
그녀를 알아본 나봄은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자 서 대표는 웃음기 하나 없는 건조한 표정으로 제 맞은편의 의자를 가리켰고.
“앉지그래?”
나봄을 가까이에 불러 앉혔다.
그리 권유하는 목소리는 잘 갈아진 칼날처럼 서늘해서, 나봄은 아직 듣지도 못한 그녀의 용건이 벌써부터 두려워지는 기분이었다.
* * *
“갑자기 이곳으로 찾아와서 놀랐어요. 오늘 별 스케줄이 없으셨나 봐요?”
커피 테이블 앞 소파에 앉은 차준이 유리에게 물었다.
그것이 단순한 질문이 아닌 불쾌함의 표현이라는 것쯤은 눈치껏 알아차린 유리는 서둘러 사과부터 건넸다.
“선약도 없이 무작정 올라온 건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계속 연락을 해도 받으시질 않아서 어쩔 수 없었어요.”
차준은 그녀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시종일관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래서, 한나봄 팀장님에 관해 할 이야기가 뭐죠?”
그러고는 특유의 나직한 음성으로 본론을 물었다.
이때만을 기다렸던 유리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곧바로 가벼운 입술을 움직였다.
“얘길 하기 전에 꼭 확인해야 할 게 있어요. 본부장님이랑 한나봄 씨는 대체 무슨 사이인가요? 창립 기념 파티 때 모습은 꼭 연인 같았는데.”
“꼭 취조 당하는 것 같네요.”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해서 그러니, 실례가 되더라도 대답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건 나봄의 입장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반드시 들어 둬야 할 진실들이었다.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사항이라 불쾌할 수도 있을 테지만, 의외로 차준은 조금의 지체도 없이 또렷하게 대답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순간 유리의 두 눈은 먹잇감을 찾은 악어처럼 살벌하게 번뜩였다.
예상대로 차준과 정리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태오를 갖고 논 게 맞았으면서.
감히 고결한 척을 했고, 나를 방해물 취급했다.
지난번 나봄과의 전쟁에서 큰 수모를 당했던 그녀는 그런 나봄을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확실히 말할 수 있겠네요. 한나봄 씨, 지금 단태오 팀장 상대로 어장을 치고 있어요.”
“…….”
“몇몇 사람들은 한나봄 씨가 본부장님 버리고 아예 태오한테 간 줄로만 알고요. 또 몇몇 사람들은 본부장님이랑 단태오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는 줄 알아요.”
“…….”
“이건 순진한 태오는 물론, 본부장님 얼굴에까지 먹칠하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그 울분을 가득 담아 꺼내 놓은 나봄을 향한 악감정.
점점 격양되어 가는 유리와 달리 차준은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입가에 머금은 부드러운 미소도, 유리를 향한 시선에서 느껴지는 온화함도 전혀 일그러지지 않았다.
유리는 그런 차준에게 보다 감정을 섞어 불만을 토로했다.
“얼마 전에 그러지 좀 말라고 지적했더니 물까지 끼얹으면서 상관하지 말라고 하더라구요. 그게 무슨 뜻이겠어요?”
“…….”
“본부장님이 걔 그러고 다니는 거 모른 척 눈감아 주고 있으니까, 그거 믿고 기만하는 거예요. 완전히 갑처럼 구는 거라구요.”
유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차준은 느리게 입술을 떼어 내 물었다.
“결론적으로, 저한테 원하는 게 뭐죠?”
그러자 유리는 제 욕심을 가득 담은 부탁을 당당하게 꺼내 놓았다.
“한나봄 문제를 본부장님 선에서 정리해 주세요.”
“…….”
“더 이상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사람 마음까지 갖고 놀지 못하게, 본부장님이 무슨 수를 써서든 한나봄 고삐 잡아 주셔야 해요.”
“…….”
“본부장님도 한나봄이 단태오 팀장이랑 연인처럼 구는 건 가만 두고 보기 힘들잖아요. 안 그래요?”
어느새 나봄의 직함까지 생략해 버린 채 열변을 토하는 유리는 어느새 차준의 편에서 그녀를 비난하고 있었다.
물론 그는 태오의 적수이자 나봄의 아군이었으나, 그래도 그녀에겐 이 답답한 상황을 함께 분노할 수 있는 같은 처지라는 생각에서였다.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차준은 그녀의 감정에 함께 공감해 주듯 부드러운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네, 보기 힘들어요.”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한 마디는 주변 공기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래도 그 사람의 선택이니까 기분 엿 같아도 겨우 참고 있는데, 주제도 모르고 도움 구걸하는 거지새끼 한 마리가 지 마음대로 쳐들어왔네.”
“……예, 예?”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던 유리는 제 귀에 들려온 차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당황한 눈동자만 치켜뜬 채 그를 마주 보고 있자, 차준은 습관처럼 어려 있던 미소를 서서히 지우더니 독기 서린 음성을 이어 나갔다.
“누구 이름을 함부로 불러.”
“보, 본부장님…….”
“나도 입에 담는 게 어려운 그 이름을 니가 뭔데 내 앞에서 깎아내려.”
“그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 귓구멍에 안 박혔어?”
그리 묻는 차준은 가슴 속에 휘몰아치는 분노를 오롯이 느끼고 있었다.
그건 그가 몰아세우고 있는 유리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소중한 사람을. 누구 곁에 있든지 간에 원망할 수도 없는 사람을.
잠시나마 빼앗으려 했고, 억지로 제 곁에 묶어 두려 했던 스스로를 향해 쏟아 내고 싶은 분노였다.
“죄, 죄송합니다…….”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유리는 빳빳이 들고 있던 고개를 푹 숙인 채 잘못을 빌었다.
그러나 정작 차준이 다그치고 있는 자신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래도 곁에 두고 싶어.’
‘내 옆에 머물러 있어 줬으면 좋겠어.’
거짓말.
사실은 그녀를 원하는 게 아니라 외로움을 벗어나고 싶은 것뿐이면서.
“……쓰레기 같은 새끼.”
차준은 낮은 욕설을 흘려보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것마저 저를 향한 비난인 줄 알았던 유리는 어깨를 바들바들 떨었다.
이렇게나 금세 겁먹을 거면서 대체 무슨 배짱을 부리고 있었던 건지. 고작 이 정도의 각오로 그 막대한 존재감을 몰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지.
차준은 맞은편에 앉은 제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건 스스로가 혐오스러워질 정도로 초라하고 볼품없는 꼴이었다.
하지만 그 역겨운 자괴감까지 느끼고 나서야 이성은 제자리로 돌아왔고, 혼란스럽던 마음에 대한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꺼져, 그 사람 눈앞에서.”
그래,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 인생까지 외롭게 만들지 말고.
“발악한다고 해서 손에 넣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모든 말을 마친 차준은 나른 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림자처럼 차준을 따라다니는 절망은 욕심을 내다 버린 순간부터 무섭게 불어나 있었으나, 아까처럼 불안하고 위태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꽉 막혀 있던 숨통이 이제야 비로소 느슨해졌으니.
이걸로 됐다고 여길 때쯤, 맞은편에선 황급히 그의 곁을 떠나는 기척이 들려왔다.
울음기 섞인 그 발소리는 집무실 문을 향해 빠르게 옮겨 갔고.
끼익― 쿵!
이내 거칠게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하아…….”
홀로 남은 차준은 입술을 벌려 흐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안엔 지칠 대로 지친 그의 절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지만 그래도 그 끝에 지친 미소라도 곁들일 수 있는 건.
강제로라도 행복해지기를 포기하고, 가만히 불행해지는 쪽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