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너라도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야
2018.01.08.
청담동에 위치한 고급스러운 카페.
끼익―
앤티크한 나무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긴장한 표정의 나봄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앉아 있는 손님들의 얼굴부터 훑어보는 그녀는 이미 도착해 있다는 태준을 만나러 온 참이었다.
“나봄 씨, 여기에요.”
그런 그녀를 먼저 발견한 태준은 손을 들어 그녀를 불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태준의 눈동자엔 반가운 기색이 담겨 있었으나.
“아! 태준 씨! 좀 늦어서 죄송해요!”
“…….”
나봄이 가까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그의 미소엔 점차 당황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나봄의 뒤에 서서 저승사자처럼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단태오 때문이었다.
혹시 저 남자가 지금 나봄 씨가 만나고 있다는 그 사람인가.
“아…… 처음 뵙겠습니다. 선우태준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노려보는 눈빛만으로도 그의 정체를 대충 파악한 태준은 먼저 제 소개를 하며 악수를 청했다.
그러자 태오는 내밀어진 태준의 손끝을 싸늘히 무시하고는 딱딱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 소속 단태오입니다.”
“현장팀 소속이시군요. 반갑습니다.”
“글쎄요, 우리가 반가울 사이는 아니지 않나.”
그리 말하는 태오의 태도는 결코 호의적이지 못했다. 아무래도 나봄을 차준 문제로 불러냈다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태준은 하는 수 없이 제 손을 거두어 갔고, 미안한 기색이 가득 담긴 사과부터 꺼냈다.
“제가 너무 갑작스럽게 불러냈죠? 주말이라 쉬고 계셨을 텐데 죄송해요.”
“알면 됐습니다.”
“태오야, 그러지 마.”
나봄은 태준에게 매정하기 그지없는 태오를 조용히 진정시켰다.
태오는 그런 그녀를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으나, 그녀가 태준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아 버리자 마지못해 합석했다.
그렇게 불편한 분위기 안에서 모인 세 사람.
“……나와 줘서 고마워요.”
먼저 입을 연 건 태준이었다. 나봄은 진심이 담긴 그의 시선을 마주한 채 담담히 대답했다.
“그렇게 절박한 목소리로 저를 찾는데 어떻게 외면해요.”
“…….”
“태준 씨한테…… 무슨 일 있는 거 맞죠?”
휴대폰 너머로 옅게 떨리던 태준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는 나봄은 확신에 찬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태준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아무 일도 없어요.”
그의 눈빛은 무언가를 숨기는 눈빛이 아니었으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불안감은 여전했다.
나봄은 그런 그를 재촉하기보단 조용히 이어질 말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자 태준은 마른침을 삼켜 넘기며 마음을 다잡았고, 이미 불편한 공기를 더 불편하게 만들 이름 하나를 꺼내 놓았다.
“차준이랑은 연인 관계가 아니라고 들었어요. 만나는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구요.”
“아아…….”
“그런 것도 모르고 무리한 부탁을 해서 미안해요. 다시 한 번 사과하고 싶어요.”
“괜찮아요. 차준 오빠랑 워낙 대화가 없으셨잖아요.”
그 부분에 대해선 충분히 이해한 나봄은 죄책감이 가득한 그를 달랬다.
하지만 태오는 ‘무리한 부탁을 했다’라는 그 말을 쉽사리 넘기지 못했다.
그게 정확히 어떤 부탁인지는 몰라도, 차준과 나봄 사이의 관계를 연인으로 오해하고 한 것이라면 자신의 기분을 더럽게 만들 게 뻔했다.
“대체 뭔…….”
태오는 아무 말도 않는 나봄을 대신해 그에게 따져 물으려 했다.
그러나 나봄은 태오가 첫 마디를 꺼내기도 전에 테이블 아래 놓인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어차피 나봄은 애초부터 태준의 사과를 들으러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남겨 둘 게 있다고 하셨죠. 그게 무슨 뜻인지 여쭤 봐도 될까요?”
그래서 태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도직입적으로 꺼낸 본론.
잠시 머뭇거리던 태준은 이윽고 천천히 입술을 떼어 냈다.
“말 그대로예요. 제가…… 더는 차준이 곁에 있을 수 없을 것 같아서…….”
“…….”
“그 애한테 전해 주고 싶은 걸 나봄 씨한테 잠시만 맡겨 두려구요.”
태준은 그 말끝에 전동 휠체어 옆에 놓여 있던 종이봉투 하나를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손바닥 두 개만 한 크기의 상자였다.
“이게…… 뭐예요?”
나봄은 의아한 눈빛을 띤 채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태준은 상자를 그녀 쪽으로 밀어 두며 간절함 묻은 음성으로 말했다.
“오래 전에 차준이한테 전해 줬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
“무리한 부탁을 한 걸 사과하고 나서 또 다른 부탁을 하는 게 염치없고 미안하지만, 나봄 씨가 대신 그 애한테 전달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는 애원과 다름없었다.
그건 곧 사라질 사람처럼 불안해서, 그녀는 한층 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어딜 가는 건데 그래요. 정말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태준 씨가 전해 주면 되잖아요. 왜 태준 씨는 그럴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꺼내 놓은 다급한 물음.
순간 급격히 일렁이기 시작한 태준의 눈빛이 제 손끝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한참을 굳어 있다가 겨우 다시 떼어 낸 입술은 아까보다 메말라 있었다.
“더 이상은 그 애 앞에 나타나고 싶지 않아요.”
“태준 씨…….”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이유는 그게 전부예요.”
차준의 앞에 나타다고 싶지 않다는 그 말은 그를 떠나겠다는 의미와 같았다. 하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서러움이 너무나도 짙었다.
지금 그는 스스로 꺼내 놓는 얘기와 달리 원치 않은 발걸음을 떼어 내야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 그가 더욱 불안해진 나봄은 더 이상 그를 추궁하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복잡한 머릿속이 정리될 때까지 캐묻고 싶지만, 그러기엔 늘어진 태준의 어깨가 너무 지쳐 보여서 선택한 침묵이었다.
하지만 그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던 태오는 그녀의 배려에 동참해 주지 않았다.
그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 태오가 봐도, 태준은 지금 모든 것을 포기하기 직전의 모습으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혹시 죽으려는 겁니까.”
태오는 훤히 드러난 위험한 기운을 외면하지 않고 똑바로 물었다.
같은 질문을 품고 있었으나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하고 있던 나봄은 옅게 떨리는 눈동자로 태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태오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욱 거침없는 목소리를 이어 나갔다.
“그럴 생각이라면 이런 부탁하지 마십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 불러내지도 마시고요.”
“…….”
“곧 죽을 사람하고 얽히는 거, 괜히 죄책감 들고 재수 없어서 싫습니다.”
거절만큼은 돌려 말하는 법이 없는 태오는 태준의 부탁을 단칼에 끊어 냈다.
“한나봄, 가자.”
“어, 어?”
그러고는 태준이 무슨 대답을 하기도 전에, 나봄의 손을 붙잡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 버렸다.
태오처럼 단호하지 못한 나봄은 얼떨결에 끌어당겨지면서도 좀처럼 태준에게서 눈을 떼어 내지 못했다.
이렇게 가면 안 될 것 같은데. 혼자 남겨진 그는 더 큰 절망으로 가라앉아 버릴 것 같은데.
“태, 태오야…….”
결국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생각에 태오를 붙잡아 보려던 그때.
“잠깐만…… 잠깐만요.”
태준의 낮은 음성이 먼저 태오의 발길을 멈춰 세웠다. 다시 그를 되돌아보는 태준의 눈빛에 날카로운 날이 섰다.
하지만 태준은 노골적인 적대감에도 굴하지 않고, 애절한 음성을 이어 나갔다.
“이런 몸으로는 내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어요. 죽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한 번 실패해 봐서 잘 알아요.”
“…….”
“그러니까 도와주세요. 나는 그냥 그 애가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조용히 사라지기만 할 테니까…….”
“…….”
“차준이한테 이거 하나만 전해 주세요.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봄 씨밖에 없어요.”
눈앞에 내어진 태준의 손끝은 안쓰러울 만큼 떨리고 있었다.
나봄은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태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준과 관련된 일이라면 경기 일으키듯 기피하는 그의 반응이 걱정스러워서였다.
“하아…….”
태오는 여전히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태준을 내려다보다 깊은 한숨을 내쉬었고.
“그 새끼랑 한나봄이 엮이는 건 내가 싫어.”
이내 거친 욕설이 섞인 거절 의사를 밝혔다.
태준은 그의 완강한 태도에 절망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으나, 머지않아 이어진 태오의 한 마디는 뜻밖이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줘. 그 새끼 안 받겠다고 하면 입에라도 쑤셔 넣어 줄 테니까.”
“태오…… 씨가요?”
“더 이상 말 섞기 싫으니까 얼른.”
태오는 예상치 못한 도움에 놀란 태준에게서 상자를 낚아챘다.
그런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은 아무리 봐도 절대 호의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불안한 시선을 좀처럼 거두지 못하는 태준에게, 나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네?”
“태오 말이에요.”
“아…….”
태준의 눈동자가 그제야 다시 테이블 위로 되돌아갔다.
나봄은 차준과 꼭 빼닮은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태오가 없는 틈을 타 걱정 가득한 물음을 던졌다.
“정말 차준 오빠 곁에 있어 줄 수는 없는 거예요?”
“…….”
“두 사람의 마음을 전부 알지는 못하지만, 태준 씨가 무슨 생각으로 사라지려는 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렇게 끝을 내 버리면 안 될 것 같아서요.”
나봄은 그리 말하며 가슴 속에 가득 찬 말들을 꺼내 놓으려 했다.
당신을 밀어내는 차준의 속마음은 증오가 아닐 거다. 지금 누구보다도 당신을 필요로 하고 있을 거다.
그런 당신이 그의 곁에서 사라져 버린다면 그는 여기서 더 무너져 버리고 말 거다.
그건 형 이야기를 꺼내던 과거의 차준과 형 이야기를 필사적으로 피하려 하는 지금의 차준의 모습이 조금도 달라 보이지 않기에 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얘기를 풀어 놓기도 전에 태준은 메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전부 나 때문에 생겨난 문제들이에요.”
“…….”
“어떻게 해야 할지는 내가 가장 잘 알아요.”
그의 쓰디쓴 목소리는 자신의 결심을 흔들지 말아 달라는 애원처럼 들렸다. 그래서 더 이상 태준을 말리지도 못하게 된 나봄은 하는 수 없이 입술을 닫았다.
“제발 행복해졌으면 좋겠는데…….”
짧은 침묵 끝에 새어 나온 그의 마지막 한 마디는 차준을 향한 것이 분명했다.
그의 눈앞에서 영영 사라지겠다는 사람의 안쓰러운 소망.
나봄은 그 마음을 차준에게 고스란히 전해 줄 수 없다는 것이 가슴 아플 뿐이었다.
물론 상처로 뒤덮인 차준은 그의 이런 마음도 고통으로 느낄 뿐이겠지만.
.
.
.
제 성질을 못 이기고 먼저 나와 버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뒤늦게 열린 카페 문으로 나봄이 빠져나왔다.
태준에게서 빼앗다시피 받아 낸 상자를 들고 서 있던 태오는 제 앞에 선 나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힘없이 처진 어깨. 잔뜩 가라앉은 눈빛. 가까이 다가오면서도 다른 생각만 하고 있는 듯한 표정.
태오는 그녀의 머릿속에 누가 들어 있는지 알고 있다.
그건 끔찍이도 싫은 존재라서, 태오는 한시라도 빨리 나봄의 정신을 되가져 오고 싶었다.
“한나봄.”
“……응?”
“선우차준 생각하지 마.”
돌려 말하는 게 익숙지 않은 태오는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제야 제대로 담기는 너의 눈동자 속의 내 모습.
다행히 넌 내 한 마디에 오롯이 나를 담아 주었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까지 신경 쓰인다. 너의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을 동정심이.
예전에 그 새끼가 그랬잖아. 넌 동정심이 많은 애라고.
아무리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손길을 내어 주고 만다고.
“아, 미안…….”
태오의 가시 돋친 마음을 눈치챈 나봄은 곧바로 사과를 꺼내 놓았다.
여기까지 그를 데리고 온 것도 미안한데, 괜한 숙제까지 떠맡게 해 버리다니. 태오에게는 정말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면목이 없었다.
“하아…….”
그런 나봄을 보며 태오는 긴 한숨을 내쉬었고, 이내 시선까지도 애먼 곳으로 돌려 버렸다.
그건 얼핏 화를 내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런 얼굴로 사과하면 좀 더 서운해하지도 못하잖냐…….”
이어지는 태오의 목소리는 오히려 누그러져 있었다. 제 잘못에 겁을 먹은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태오야…….”
그래도 무거운 마음을 거두지 못한 나봄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태오의 입술 새로 마저 쏟아져 나오는 건 너무나도 솔직한 그의 속마음이었다.
“사실 난 니가 선우차준 일에 엮이는 거 싫어.”
“…….”
“니 귀에 선우차준 이름 넉 자 들어가는 것도 싫고, 그 새끼가 죽든 살든 니가 신경 쓰지도 않았으면 좋겠어.”
“…….”
“나는 너의 첫사랑까지 품어 줄 만큼 속 넓은 남자가 못 돼.”
나봄은 태오가 한 마디 한 마디 꺼내 놓을 때마다 고개를 숙였다. 그가 싫다고 읊은 건 전부 방금 전 태준을 만나며 했었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염치가 없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거듭하지도 못하고 있던 그때.
부드러운 태오의 손길이 나봄의 굳은 등을 감싸 안았다. 빈틈없이 밀착된 몸에서는 단태오 특유의 포근한 향기가 났다.
이윽고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피부에 닿는 품의 온도만큼이나 따듯했다.
“그래도 넌 나랑 다르게 마음이 착해서, 그 새끼 잘못되면 혼자 걱정하고 있을 게 뻔하니까…….”
“…….”
“조금은 도와줘도 돼. 오늘처럼 나랑 같이 간다는 조건으로.”
어리광 섞인 태오의 허락은 그러니 더는 우울해하지 말라는 위로와 같았다.
그 마음이 어찌나 예쁜지, 미처 지워 내지 못한 안쓰러움도 차차 녹아드는 듯하다.
어느새 내쉬는 숨결마저 편안해진 나봄은 태오의 허리를 꽈악 끌어안아 주었다.
그러고는 벅차는 진심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는 한 마디를 나직이 속삭였다.
“내가…… 정말 많이 사랑해, 태오야.”
그녀의 고백을 들은 태오의 숨소리에 달콤한 미소가 배어들었다.
“충분히 알고 있어.”
그리 화답하는 그에게선 다행히 예전과 같은 불안이 느껴지지 않아서.
나봄은 남몰래 안도했다.
모두가 각자의 상처로 가슴 아파 하고 있는 지금, 한 사람이라도 나아가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 한 사람이 바로 나에게서 상처 입었던 너라는 게 다른 무엇보다도 정말 잘 된 일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