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잔혹한 총구는 누구를 향하는가
2018.01.05.
“한나봄.”
지난밤의 여파로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토요일 아침.
부드러운 태오의 목소리가 나봄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그때까지는 대답할 정신도 없었으나.
“나봄아, 계속 잘 거야?”
이불에 채 덮이지 못한 쇄골에 촉촉한 감촉이 닿자, 나봄은 두 눈을 번쩍 뜰 수밖에 없었다.
밤새도록 그렇게나 물어 댔으면서 이 짐승 같은 남자는 아직 지치지도 않았나 보다.
“하하, 간지러워.”
나봄은 푹 잠긴 목소리로 말하며 태오를 밀어냈다. 그러자 태오는 고개를 들어 장난기 어린 시선으로 나봄을 마주 보았고, 야릇한 질문을 꺼내 놓았다.
“간지럽기만 해?”
“응?”
“어젠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부끄럽게!”
나봄은 아침부터 짓궂게 구는 태오의 이마에 살짝 꿀밤을 먹였다.
그건 거의 톡 치는 것과 다름없었으나, 태오는 눈썹을 찡그리며 엄살을 부리기 시작했다.
“아아, 아프다.”
“그렇게 세게 때리지도 않았거든?”
“나 혹 났나 좀 봐 주라.”
“참나,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러지 말고 한 번만.”
태오의 보챔에 못 이긴 나봄은 하는 수 없이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얼마나 약하게 건드렸는지, 그의 이마는 빨간 손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기만 했지만 봐 주는 척이라도 해야 엄살을 멈출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이 가까워지자마자 훽 고개를 들어 올린 태오는 그대로 나봄의 입술을 덥석 집어삼켰다.
“웁!”
놀란 나봄은 토끼눈이 된 채 얼어붙었으나 태오는 입맞춤에서 그치지 않고 붉은 혀끝을 밀어 넣었다.
이젠 어느덧 익숙해진 그의 감촉.
능숙하게 리드하는 그의 키스는 갑작스러운 와중에도 그녀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깊숙이 파고드는 그의 숨결은 또 어찌나 달콤한지. 그를 받아들이는 나봄의 혀끝도 아릿해질 지경이다.
한참을 그에게 자극당한 나봄은 턱끝까지 벅찬 숨을 몰아쉬기 위해 잠시 입술을 떼어 냈다.
“하아…….”
그 달아오른 숨소리를 들은 태오의 입꼬리가 예쁘게 휘어 올라갔다.
“한나봄 그거 알아?”
“…….”
“넌 숨소리까지도 예뻐.”
예쁘다는 칭찬이 이렇게 야릇하게 들리는 건 그의 검붉은 입술 때문일까.
아니면 날 보는 뜨거운 눈빛 때문일까.
확실한 건 그 때문에 내 심장이 남아나지 않게 생겼다는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섹시한 내 남자는 아마 스스로 철벽만 치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 모든 여심을 휘어잡고도 남았다.
나봄은 어느새 새빨개진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태오는 그런 그녀를 따라 눈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 번 입술을 가져가 보려 했다.
바로 그때.
♩♪♬♩♪♬―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던 나봄의 휴대폰이 전화 수신을 알렸다.
혹시나 또 한 번의 외박에 분노한 한 사장일까 싶었던 나봄과 태오는 동시에 깜짝 놀란 표정으로 하려던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아버님이셔?”
“그, 그렇겠지?”
나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휴대폰을 들었고, 긴장한 눈빛으로 발신자를 확인했다. 덩달아 굳어 버린 태오는 초조하게 그녀를 지켜보았다.
하지만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나봄의 표정은 이내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당연히 한 사장일 거라고 생각했건만 막상 휴대폰 액정에 떠오른 건 저장조차 되지 않은 낯선 번호였다.
이건 굳이 받지 않아도 될 연락일지도 모르나, 어쩐지 익숙한 마지막 네 자리 숫자는 왠지 다른 의미로 불안하게 만들었다.
망설이던 나봄은 결심한 듯 힘주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그리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흘려보내니.
―아…… 나봄 씨?
누군가와 닮았지만 그보다 더 성숙한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주말인데 갑작스럽게 연락해서 죄송해요. 나봄 씨 회사에서 멋대로 휴대폰 번호 물어본 것도…….
“태준…… 씨?”
전혀 예상치 못했던 연락에 놀란 나봄이 그의 이름을 입에 담자, 그녀를 마주 보고 있던 태오의 눈빛이 파르르 떨려 왔다.
“선우태준? 본부장 형? 그 사람이 왜 너한테…….”
“잠깐만, 태오야.”
나봄은 순식간에 사나워진 태오를 진정시키고 휴대폰을 바로 잡았다.
“안녕하세요, 태준 씨. 저에겐 어쩐 일로…….”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용건부터 꺼내 물으니.
―지난번에 나봄 씨한테 이기적인 부탁을 했던 일, 사과하고 싶어서요.
죄책감 가득한 태준의 대답이 이어졌다. 그 말을 들은 나봄은 단번에 태준과의 만남을 떠올렸다.
‘제발 우리 차준이 곁에 있어 주세요.’
‘그 사람들이 그 애를 더 비참하게 무너트리지 못하도록…… 나봄 씨가 지켜 주세요.’
나봄의 첫사랑은 사라졌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을 때쯤 그가 꺼내 놓았던 애절한 부탁.
태준은 그녀에게 차준 곁에 있어 주기를 당부했으나, 나봄은 그래 주지 못했다.
그에게 더 이상 남아 있는 마음이 없음을 매정하게 고했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그에게서 온전히 등을 돌렸으니까.
결국 그의 뜻대로 따라 준 건 하나도 없는 나봄은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태준 씨한테 사과 받을 게 없어요. 태준 씨가 원하는 대로 차준 오빠 곁에 남아 있어 주지 못했으니까.”
―…….
“앞으로도 그렇게는 못 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혹시 제게 비슷한 걸 기대하신다면 죄송…….”
―아니요, 그런 일로 연락드린 거 아니에요.
하지만 그 말에 곧바로 부인을 한 태준은.
―나봄 씨를 만나고 싶어요.
“네?”
―꼭…… 남겨 두고 싶은 게 있어요.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꺼내 놓았다.
전해 주고 싶은 것도 아니고 대신 전달해 달라는 것도 아닌, 떠나는 사람처럼 무언가를 남겨 놓고 싶다는 말.
“태준 씨…… 어디로 떠나려구요?”
나봄은 태준에게 나직이 물었다.
―……네.
찰나의 틈을 두고 흘러나온 그의 대답은 매우 짧았으나, 그 안에 어린 불안감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를 외면해선 안 된다는 걸 느낀 나봄은 눈앞의 태오를 마주했다.
“나오기 편하신 장소를 말씀해 주세요. 그럼 저희가 찾아갈게요.”
그러고는 태오의 손을 꼭 잡으며 대답했다.
불안한 표정으로 나봄을 바라보고 있던 태오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맺혔다.
* * *
오랜만에 찾아온 우드레일 본가.
“오셨습니까, 이사님.”
거대한 대문 안으로 들어선 차준에게 경호원들이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들을 차가운 시선으로 훑어본 차준은 인사를 받아 주는 대신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회장님은.”
“화원에서 이사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화원이라…….”
거대한 우드레일 본가 가장 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유리 화원은 오로지 서 회장만이 출입 가능한 장소였다.
하필 그곳으로 차준을 부른다는 것은 확실히 불길하고 위험한 징조였다.
하지만 일방적인 잠적에 대한 뒷감당이 녹록지 않을 것이라는 건 이미 예견하고 있던 사실이니.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혼자 찾아가죠.”
차준은 최대한 담담하게 그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발버둥 쳐 봤자 나아질 건 없었다.
공허한 시선을 유리 화원 쪽으로 고정시킨 차준은 침착한 걸음을 움직였다.
그리고 지난 며칠간의 흔적을 필사적으로 지워 나갔다.
가슴에서 썩어 문드러진 상처도. 손 쓸 수 없을 만큼 새까맣게 물든 절망도. 서재균 회장 앞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아야 했다.
그렇게 지니고 있는 모든 감정을 닦아 내고 여느 때처럼 빈껍데기밖에 남지 않게 되었을 무렵.
드디어 화원의 유리문이 눈앞에 드러났다.
오늘따라 더욱 섬뜩하게 느껴지는 이곳의 어두운 기운은 서 회장을 꼭 닮아 있었다.
내가 지금 화원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인지, 그에게 집어삼켜지고 있는 중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차준이냐.”
“……네, 회장님.”
“그래,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오거라.”
몸을 들이자마자 화원 안쪽에서부터 서 회장의 음성이 들려왔다.
순간 차준을 둘러싼 공기는 버티기 힘들 정도로 탁해지는 듯했으나, 그는 더욱 깊숙한 곳으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머지않아 시야에 들어온 서 회장은 아끼는 난을 닦아 내고 있던 중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이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구나.”
서 회장은 인사를 하는 차준에게 시선도 두지 않은 채 뼈 있는 한 마디를 건넸다.
그 말에 차준은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큰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됐다. 너도 휴식이 필요했겠지.”
“…….”
“본가 사람이 된 뒤로 하루도 쉬지 못했잖아.”
본가 사람이 된 뒤.
그것은 다시 말해 선우태준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해 버려지고 난 후를 의미했다.
이런 얘기에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지 못했던 차준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을 유지했다.
그건 서 회장이 평소 거슬려 하는 태도였으나 그는 어찌된 이유에서인지 오늘만큼은 차준을 책망하지 않았다.
“이 난, 너의 눈엔 어떻게 보이니.”
대신 꺼내 놓은 질문은 난데없었다. 평소 잡담을 즐기지 않는 서 회장의 성격을 알고 있는 차준은 살짝 경직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보기 좋습니다. 회장님께서 늘 신경 써서 관리해 주시고 계시니까요.”
“그래, 신경 쓰고 있지. 덕분에 꽃봉오리도 맺혔고 말이야.”
서 회장은 그리 말하며 길게 올라온 난촉을 가리켰다. 차준은 그걸 가만히 들여다보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그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무언지, 조금이라도 일찍 파악하기 위하여.
곧 서 회장의 낮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말이다. 병원 신세 동안 돌봐 주지 못했던 탓인지, 난촉 상태가 영 시원치 않아. 이대로는 꽃이 피어도 그리 아름답지는 못할 것 같구나.”
“…….”
“아무래도 잘라 내는 게 좋겠지? 이 녀석에게는 소중한 것이라고 해도.”
그러한 물음 후에 서 회장은 고개를 들어 차준을 바라보았다.
그의 서늘한 눈빛은 차준에게 무의미해 보이는 대화 속 ‘난’이 누굴 뜻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그 난이 소중하게 여긴다는 시든 난촉까지도.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본론이 드러난 이상, 돌려 말하고 싶진 않았던 차준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자 서 회장은 난초 위로 다시 눈길을 끌어 내렸고 푸른 이파리들을 마저 닦아 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와 달리 평화로워 보였으나.
“너의 썩은 난촉도 어서 잘라 내야 하지 않겠니.”
“…….”
“네 손으로 직접.”
이어서 꺼내진 명령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서 회장이 내민 서슬 퍼런 칼날을 앞에 둔 차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려 왔다.
하지만 이어지는 서 회장의 말은 보다 노골적인 악의를 품고 있었다.
“제 스스로 가치를 포기해 버린 놈이니,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이곳에 해충처럼 달라붙어 너까지 시들어 버리게 만드는 꼴을 더는 두고 볼 수가 없구나.”
“…….”
“물론 내 손으로 처리해 버리는 쪽이 가장 빠를 수도 있지만…… 내 눈엔 그놈을 증오하는 너의 모습도 다른 의미로는 매달리는 것처럼 보여서 말이야.”
“…….”
“내가 섣불리 손댔다가 니가 나를 적으로 돌려 버리면 어쩌니.”
그 말은 다시 말해 차준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말이었고, 이 기회에 그의 충성도를 시험해 보겠다는 뜻이었다.
한때 태준을 태양처럼 여기던 차준의 마음은 그들을 곁에서 지켜본 서 회장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꺼이 준비해 둔 질긴 인연의 낭떠러지.
서 회장은 이미 만신창이가 된 형제를 벼랑 끝에 세워 두었고, 천륜을 거스르는 악독한 명령을 내렸다.
“그러니…… 니가 직접 선우태준을 처리해.”
직접적으로 흘러나온 그의 존재에, 차준의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이번에도 미련하게 굴었다간, 너도 함께 끝을 보게 될 게다.”
이미 하얗게 질려 버린 머리는 자신에게도 겨누어진 협박을 인지하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차준은 숨까지 멈춘 채 가만히 굳어 있다가 질식하기 직전에야 겨우 입술을 떼어 냈다.
“회장님…….”
하지만 흐린 목소리로 서 회장만 부를 뿐, 그가 원하는 대답을 곧바로 꺼내 놓진 않았다.
역시나. 그의 예상대로 아직 제 형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나약한 모습이었다.
그 사실을 확신한 서 회장은 차준을 똑바로 직시했다. 그를 애타게 바라보는 차준의 시선은 평소보다 더욱 형편없는 꼴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붙잡아 줄 수 있는 존재가 무엇인지도 잘 아는 서 회장은 또 다른 이름을 입에 담았다.
“한나봄이라고 했나. 니가 원하는 여자.”
“…….”
“이번 일만 잘 끝낸다면 그 여자 정도는 손에 넣을 수 있게 해 주마. 다른 사람에게 있는 걸 내가 직접 빼앗아 와서라도.”
아니나 다를까.
무너져 내리던 차준의 눈빛이 잠시 떨림을 멈추었다.
아직 일그러진 표정은 정리하지 못했으나, 그는 나봄의 등장으로 인해 겨우 이성을 다잡아 가고 있다.
“한나봄…….”
“그래, 그 애.”
서 회장은 효과가 확실한 그녀의 존재에 흡족해하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넌 내 뜻대로 성장하기만 하면 돼.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 난초처럼.”
그의 뜻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원하는 사람을 곁에 둘 수 있다.
다 바스러져 버린 이성으로 생각해도 해야 할 선택이 명확한 제안.
차준은 고개가 아래로 힘없이 떨구어졌다. 그건 절대 수락의 뜻이 아니었으나.
“순순히 따라 주겠다니 다행이구나.”
그의 의사 따위는 상관없었던 서 회장이 그리 대답해 버린 순간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한 사람이 죽지 않으면 두 사람 다 목숨을 잃게 되는 잔인한 러시안룰렛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