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남친이 내게 반했다-70화 (70/104)

70. 순한 양도 화가 나면 들이받는다

2017.12.29.

“뭔 일 생기지는 않겠지…….”

집에 홀로 남은 태오가 불안한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달콤한 데이트를 즐기고 있던 나봄이 집 근처까지 찾아온 유리를 만나러 가겠다고 나선 게 벌써 10분 전.

지금쯤이면 그녀는 우드레일 퍼니쳐팩토리 여직원들의 회식 장소에 도착했을 터였다. 그걸 깨달은 순간부터 온갖 걱정에 휩싸인 태오는 지금 마치 물가에 애를 내놓은 심정이다.

‘그래서, 유리 씨 어디래?’

‘어?’

‘나 유리 씨 잠깐 좀 보고 와야겠어.’

‘어, 어?’

유리의 메시지를 우연히 확인한 직후, 그저 웃음기만 가득하던 나봄의 눈동자는 일순 딱딱하게 굳어 버렸었다.

‘넌 신경 쓰지 마. 내가 확실히 거절할게.’

그녀의 분노를 눈치챈 태오는 제 선에서 해결을 해 보려 했으나, 나봄의 눈빛은 그 말에 더욱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안 돼. 이건 유리 씨와 나의 문제야.’

‘그래도…….’

‘지금까지 다 받아 줘서 이렇게 나오는 게 아니잖아.’

단호하게 딱 잘라 말한 나봄은 그 길로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열기 전, 신발장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덧바르는 그녀의 모습은 호기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아무리 비장하다 해도, 태오가 알고 있는 나봄은 싸움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반면에 평소엔 호탕하다가도 성질이 나면 불같아지는 허유리는 나봄이 상대해야 할 사람치고는 너무 드셌다.

아마 둘이 맞붙는다면 겁 많은 나봄은 만신창이가 되고 말 거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너 혼자는 절대 못 보내.’

태오는 현관문 잠금장치를 푸는 나봄을 서둘러 따라나서며 말했다. 그러자 나봄은 깊은 한숨을 쉬며 태오를 마주 보았고,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나 못 믿어?’

그러고서 묻는 질문엔 차마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저 일렁이는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만 있으니.

‘웁!’

갑작스럽게 다가온 그녀의 손바닥이 그의 입술을 꾸욱 눌렀다. 그러고는 떼어 내자마자 촉감이 가시기 전에 제 입술로 옮겨 가져갔다.

쪽―!

‘뭐, 뭐하는 거야.’

‘에너지 충전! 이거라면 이기고 올 수 있을 것 같아!’

‘아니, 한나봄 잠깐만…….’

‘다녀와서 꼭 사랑한다고 말해 줄게! 태오야!’

‘……어?’

나봄은 그렇게 파격적인 선전포고만을 남겨 두고 벌새처럼 재빠르게 문 밖으로 나가 버렸다.

붙잡아야 했었지만 그녀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얼어붙어 버렸던 태오는 끝내 나봄을 따라나서지 못했다.

사실 충격은 지금도 아직 가시지 않아서, 그때를 떠올리기가 무섭게 태오의 얼굴은 다시 뜨거워지고 있었다.

“아…… 이럴 때가 아니다. 정신 차리자.”

태오는 붉어진 뺨을 두어 번 때리며 심각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러자 그녀를 향한 걱정은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해서, 그는 아예 앉아 있던 소파에서 벌떡 일어서 버렸다.

그 순간 갑자기 그리 멀지 않은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유리 씨.’

‘전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 드렸어요.’

‘태오는 제가 보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전 연애하고 싶은 사람한테 이렇게 대하거든요.’

그때, 유리를 상대하던 나봄은 제법 씩씩했던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근처에라도 가 있어 볼까.”

걱정이 많은 태오는 주섬주섬 겉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오늘 그녀가 어떤 고백을 하려는 건지 알아 버린 이상, 여기서 더 분위기를 망쳐 버릴 수는 없으니.

* * *

드륵―!

하도 외진 골목에 있어 손님이 뜸한 조개 구이집의 문이 열렸다.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던 유리는 물론이고 여직원들의 시선까지도 단숨에 가게 문으로 모여들었다.

“태오……!”

성질 급한 유리는 간절한 그의 이름을 섣불리 꺼냈으나 그녀의 얼굴에 피어오른 화색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어머, 나봄 씨……?”

“그러네! 진짜 나봄 씨네!”

뜻밖의 등장으로 여직원들을 놀라게 만든 인물.

“안녕하세요, 다들 이런 자리에서 뵙는 건 처음이네요.”

가게로 들어오자마자 정중한 인사부터 건네는 그녀는 다름 아닌 비장한 표정의 나봄이었다.

그녀를 이곳에서 만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여직원들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어머! 이런 데서 만날 줄이야! 나봄 씨도 여기 술 마시러 온 거야?”

가장 싹싹한 성격을 지닌 여직원 한 명이 나봄에게 물었다.

‘여기에 술 마시러 왔겠냐.’

나봄을 보자마자 삽시간에 표정이 굳어 버린 유리는 당장이라도 내뱉고 싶은 대답을 애써 삼켜 냈다.

태오와 통화할 때 초인종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아무래도 그게 한나봄의 기척이었던 모양이다.

지금껏 나봄이 태오네 집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유리는 굉장히 기분이 불쾌해졌다. 그러나 그걸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 놓을 수는 없었기에, 유리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입을 열었다.

“아, 아까 태오가 갑자기 누가 찾아오는 바람에 여기 오기 곤란해졌다고 하더니. 그게 나봄 씨 때문이었구나.”

그건 자신이 해 놓은 거짓말에 대한 수습이었다.

여직원들은 단태오가 먼저 유리를 이 동네까지 부른 줄로만 알고 있는데, 사실은 그가 한나봄과 은밀한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면 꼴이 우스워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런데 태오는 어쩌고 나봄 씨 혼자 왔어요?”

유리는 나봄에게 웃는 낯을 유지한 채 물었다.

그러자 어느새 그들의 곁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나봄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고, 이내 사뭇 진지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태오는 나오고 싶지 않아 해서 혼자 나왔어요.”

왠지 뼈가 느껴지는 나봄의 대답은 여직원들로 하여금 심상찮은 기색을 눈치채게 만들었다.

그 싸한 분위기에 덩달아 신경이 날카로워진 유리는 비웃음 섞인 대꾸를 내뱉었다.

“나오고 싶지 않아 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가 단태오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

“나봄 씨 예전부터 나랑 태오 사이 은근히 질투하더니, 그거 신경 쓰여서 안 보내는 거 아니야? 하하.”

장난 거는 것처럼 호탕하게 웃으며 나봄을 건드리는 건 유리의 주특기였다.

그런 그녀의 묘수에 놀아나고 싶지 않았던 나봄은 맘먹고 있던 말을 내뱉어 버리기로 했다.

“아니라고 대답은 못 하겠네요.”

“…….”

“여자 친구로서 오밤중에 술 먹자고 불러내는 여자 동료 신경 쓰는 건 당연하잖아요.”

이로써 결국 만천하에 드러내 버리고 만 단태오와의 연인 관계.

딱히 비밀로 한 적은 없었지만 절대 눈치는 못 채고 있었던 여직원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지금껏 무의식적으로 철벽남 단태오와 엮일 수 있는 여자는 오로지 유리뿐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들에게 나봄의 발표는 경악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자…… 여자 친구?! 어머! 나봄 씨! 단 팀장님이랑 사귀어요?!”

한 직원의 놀라움이 담긴 질문에, 나봄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만나는 중이에요.”

“언제부터?”

“아, 그게…….”

하지만 솔직하게 대답하려다 말고 말을 멈추었다. 짧은 교제 기간 때문에 그와의 사이가 가볍게 보이진 않을까 싶어서였다.

나봄은 유리에게 책잡히지 않도록 정신을 똑바로 다잡고, 잔뜩 힘을 준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학교 때 사귀었다가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거예요. 어렵게 재회한 만큼 두 번째 인연은 소중하게 이어 나가 보려구요.”

순간 그녀에게 향한 유리의 눈동자가 매서워졌다.

그 옛날, 술에 취한 태오에게서 나봄과의 과거사를 들었던 유리는 그녀의 말이 아름다운 추억보다는 이기적인 욕심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말이 좋아 사귀었다가 헤어진 거지, 사실은 일방적으로 내다 버린 거였으면서.

이제 와서 본인 아쉬우니까 되찾아 가겠다고 하는 건 대체 무슨 낯짝이야. 그 애가 자기 장난감도 아니고.

“하, 듣자 듣자 하니까 정말 너무하네.”

결국 이성을 붙잡지 못한 유리는 날 선 한 마디를 뱉어 냈다.

“파, 파트장님……?”

그녀의 분노를 읽어 낸 여직원들은 한순간에 서늘해진 분위기에 당황했으나, 나봄은 오히려 차분해진 눈빛으로 그녀를 마주했다.

유리의 이런 반응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렵게 재회한 만큼 소중하게 인연을 이어 나가겠다니. 초반에 본부장님한테 딱 붙어 있던 나봄 씨가 할 말은 아니지.”

유리는 머지않아 늘 그래 왔듯 차준의 존재를 꺼냈고, 그와 나봄의 관계를 트집 잡았다.

초반에 차준의 곁에 딱 붙어 있었다는 말.

불편하지만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긴 했다. 나봄은 자그마치 10년 동안 첫사랑 차준만을 잊지 못한 채 살아왔고, 차준과 재회한 뒤부터는 그에게 온 신경을 쏟아붓고 지냈었으니까.

그러나.

“그래서요?”

그렇게 지내는 동안 태오와의 인연을 철저히 외면한 채 지내 왔다고 해도.

“뒤늦게 소중함을 깨달은 만큼 이제라도 더 잘해 주고 싶은데…….”

“…….”

“그러면 안 되는 건가요?”

나봄은 그 시절들이 새로운 사랑을 할 자격마저 앗아 간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말 그대로 새로운 사랑이라는 건 모든 과거를 다 잊고 새롭게 인연을 만들어 나간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나봄의 당돌한 대답을 들은 유리는 가슴이 터질 듯이 답답해져 오는 기분이었다.

태오가 너무 과분해서 감히 욕심도 내지 못하고 뒤에서만 머물러 있었던 유리는 그에게 상처를 준 나봄이 그의 사랑을 가져가는 걸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안 될 건 없지만 나봄 씨같이 구는 걸 뭐라고 부르는 줄 알아?”

“…….”

“헤프다고 하는 거야. 그런 행동이 싸 보이게 만드는 거고.”

그래서 굳이 숨기지 않고 적나라하게 드러내 버린 불쾌한 심정.

“파, 파트장님! 왜 이러세요!”

“진정하세요! 파트장님!”

험한 욕설에 놀란 직원들은 모두 유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 터져 나오기 시작한 그녀의 막말은 도무지 막을 길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난 나봄 씨한테 양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도 모르겠어. 태오를 그렇게 피 말리게 할 땐 언제고 지금 와서 사랑 타령이야? 이기적이라는 생각 안 해?”

“…….”

“게다가 창립 기념 파티 때 보니까 본부장님이랑도 심상찮은 사이인 것 같더니만. 허리에 손 휘어 감고 이리저리 소개시키고 다니고.”

“…….”

“그런 꼴이 본부장님은 결혼 상대고 태오는 엔조이로 갖고 놀겠다는 것밖에 더 되냐고. 몸 더럽게 굴리는 것도 정도가 있지.”

쏟아지는 폭언들은 뒤틀린 관계를 돌이킬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어떻게 하면 나봄에게 더 공격적인 말을 할 수 있는지, 유리는 오랜 시간 연구라도 해 온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의 돌발 행동은 직원들마저 얼어붙게 만들었으나 나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유리의 매서운 눈초리에도 기죽은 기색 하나 없이, 그녀는 가만히 비난의 화살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저런 년한테 놀아나는 단태오만 불쌍하지…….”

반응 없는 나봄에게 퍼붓기도 지친 유리는 비난 섞인 혼잣말로 끝을 맺었다.

“하아.”

그러자 나봄의 입술 새로 새어 나오는 건 짧은 한숨이었다. 그건 얼핏 동요한 것처럼 보였으나, 유리가 마주 보고 있는 그녀의 눈동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지금껏 쌓아 두신 말씀은 다 하셨나요?”

이내 나봄이 흥분한 유리에게 물었다.

가치 없는 질문에 대답하고 싶지 않았던 유리가 그저 살벌한 눈초리로 나봄을 노려보고만 있으니, 나봄은 다시 입술을 열어 본격적으로 제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태오한테는 괜한 얘기 꺼내지 마세요. 저에 대한 뒷말도 삼가 주시구요.”

“뭐?”

“그리고 다 큰 성인들 인간관계에 대해 왈가왈부할 건 아니지만…… 유리 씨의 감정이 친구 이상이라면, 앞으로는 태오하고 사적인 친분을 유지하는 걸 가만 두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건 태오와 유리의 사이에 여자 친구로서 간섭하겠다는 의미였다.

나봄도 마음에 안 들어 죽겠는 이 와중에 태오와의 사이까지 훼방당하게 생긴 유리는 결국 마지막 이성의 끈조차 놓아 버리고 말았다.

“이 미친년이 뚫린 입이라고!”

유리는 험한 욕설과 함께 앞에 있던 물잔을 들었다. 그러고는 직원들이 그녀를 만류하기도 전에 나봄의 얼굴을 향해 찬물을 자비 없이 뿌려 버렸다.

“꺄악! 파트장님!”

예상치 못한 공격에 아연실색이 되어 버린 건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직원들의 얼굴이었다.

“파트장님! 이러시면 안 돼요!”

“제발 진정해요! 대화로 풀자구요!”

직원들은 길길이 날뛰는 유리를 필사적으로 붙잡았지만 유리는 두 팔을 포박당한 와중에도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불같이 타오르는 눈동자도, 숨 쉬듯 쏟아져 나오는 욕설도. 평소 직원들 앞에서의 쿨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거 놔! 한나봄 주둥이 뭉개 놓으려면 아직 멀었어!”

그렇게 소란이 더욱 커지는가 싶던 그때.

뚝뚝 떨어지는 물을 채 닦아 내지도 않은 나봄이 별안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물세례를 맞았어도 눈썹 하나 일그러트리지 않은 나봄은 오히려 차분한 표정이었다.

직원들은 그런 그녀에게 조용히 집중했고, 유리는 그녀를 잡아먹을 듯 계속 주시했다.

하지만 그 살기도 오래가진 못했다.

촤아악―!

다른 사람들이 막을 새도 없이, 나봄이 유리의 얼굴에 냅다 끼얹어 버린 복수의 물세례 때문에.

“꺄악!”

유리의 옆에 있다가 괜히 물을 맞은 직원들은 혼비백산이 되어 테이블에서 물러났다.

그 덕에 붙잡혔던 유리의 몸은 자유를 찾았으나, 그녀는 아까처럼 분노에 날뛰며 나봄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폭발하던 열이 찬물에 식어 버린 듯, 눈빛마저도 싸늘하게 가라앉힐 뿐.

그 모습은 얼핏 사태가 진정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오랜 시간 유리를 지켜봐 온 직장 동료들은 알고 있었다. 유리는 울화가 극에 달하면 달할수록 오뉴월에 서리라도 내릴 기세로 매서운 한기를 띤다는 사실을.

그래서 이젠 더 이상 나서서 말리지도 못하고 모두들 낯빛만 하얗게 질린 채 숨죽이고 있으니.

“유리 씨.”

그 가운데서 홀로 태연한 나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유리 씨 말대로 태오한테 많은 상처를 준 사람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다시 만난다는 것 자체가 너무 과분한 일일지 몰라요.”

이어지는 말은 방금 전의 공격이 무색할 만큼 담담한 고해성사였다.

그러나 나봄은 죄책감이 아닌, 흔들림 없이 단호한 눈빛을 띠고 유리에게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그걸 유리 씨가 비난하고 훼방 놓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건 말 그대로 태오와 저 사이의 일이잖아요.”

“……뭐?”

“그러니까 앞으로는 오늘처럼 무례하게 굴지 말아 주셨으면 해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리 말한 뒤에 까딱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나봄은 누가 봐도 영락없는 승자의 모습이었다.

항상 주눅이 들어 있고 긴장해 있던 평소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새어 나오는 숨소리마저 고요하고 차분하기만 했다.

반면 휘몰아치는 모멸감과 분노를 추스르지 못한 유리는 제 입술을 사정없이 깨문 채 나봄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뒤돌아서는 나봄에게 아까처럼 날뛸 수는 없었다.

이럴수록 비참해지는 건 제 마음뿐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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