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누가 감히 내 남자를 불러내
2017.12.25.
예쁘게 잘린 케이크 조각, 그리고 향긋한 홍차가 커피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잘 먹겠습니다.”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한 나봄은 곧바로 포크를 들어, 맛도 보지 못하고 들고 온 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빵을 조금 태워서 탄 맛이 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케이크는 시중에서 파는 것보다 부드럽고 달콤했다.
“으음! 여기 케이크가 굉장히 맛있네요, 사장님.”
나봄은 바로 곁에 나란히 앉은 태오에게 장난스레 말했다.
“그래요? 케이크 잘하는 집에서 공수해 온 건데, 어디 나도 손님 거 맛 좀 봅시다.”
그러자 태오는 나봄의 장난에 맞장구를 쳐 주며 그녀의 두 뺨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밀어낼 틈도 없을 만큼 빠르게 생크림 묻은 그녀의 입술을 쪽―!
“앗! 립스틱 다 번지잖아!”
갑자기 다가온 태오의 입술에 놀란 나봄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다. 태오는 능글능글 웃는 얼굴로 그녀에게 대답했다.
“안 번졌어. 내가 다 먹었거든.”
작은 일에도 불안해서 사과를 하던 단태오는 어디로 갔는지. 오늘 그는 아무래도 백 년 묵은 구미호 컨셉인가 보다.
야릇한 멘트를 내뱉으며 윗입술을 훑는 모습이 몹시도 자극적이다.
“하여간 엉큼하긴.”
나봄은 그런 태오를 툭 쳐서 밀어내고는 리모컨을 들었다.
사실 이곳에 엄청난 한 마디를 전하러 온 그녀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도록 농도 깊은 로맨스 영화를 틀어 놓을 예정이다.
“무서운 건 싫고, 액션은 너무 정신없을 것 같고…… 둘이 기분 좋게 볼 영화 없나.”
나봄은 영화를 고르는 척하며 밑밥을 깔았다.
“로맨스 봐. 너 그거 좋아하잖아.”
태오는 그걸 덥석 물어 대답했다. 나봄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태오의 IPTV 목록에 있는 영화들 중 미리 점찍어 놓은 영화를 재빨리 선택했다.
“그럴까? 그럼 이건 어때?”
“이미 재생했으면서 뭘 물어.”
태오는 나봄의 제멋대로인 모습마저 귀여운지 그녀의 정수리를 강아지처럼 쓰다듬었다.
그와 동시에 드디어 시작된 로맨스 영화.
그건 나봄이 알기로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엄청 사랑스럽고 귀여운 로코물이었다.
파혼극에 얽힌 여주인공이 남주인공과 어쩔 수 없이 동거하며 진행되는 사랑 이야기인데, 노래 주점에서의 첫 키스신이 그렇게나 달콤할 수가 없다고 했다.
노래방 키스신 하면 우리도 빠질 수 없잖아.
그 씬이 나올 때쯤 나는 그날 우리가 했던 첫 키스 얘기를 은근슬쩍 꺼낼 거고, 그럼 너는 부끄러워서 얼굴이 새빨개지게 되겠지.
그러면 나는 예쁘게 물든 너를 똑바로 마주 보고 이렇게 말할 거야.
‘그땐 내가 널 좋아하는 줄도 몰랐었는데.’
넌 이렇게 대꾸하겠지.
‘그럼 지금은 어떤데.’
바로 그 질문.
나는 딱 그 질문을 기다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너에게 그 말을 꺼낼 거거든. 그리고 앞으로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질 때마다 몇 번이고 들려 줄 거야.
계획을 정리한 나봄은 태오에게 살짝 어깨를 기댄 채 영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태오는 다가온 그녀의 몸을 한 팔로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그걸로는 그의 체온이 부족했던 나봄은 손을 내밀며 물었다.
“우리 손잡고 보면 안 돼?”
그 말에 태오는 피식, 실웃음을 흘려보내고는 순순히 손을 건네주었다.
“왜 안 되겠습니까.”
그러고는 나긋한 대답과 함께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달콤한 그의 애정 표현은 지금 당장 고백하고 싶어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더 영화 같은 순간을 위해, 나봄은 폭발하는 감정을 애써 눌러 보기로 했다.
좋아한다는 말이나 보고 싶다는 말로는 부족해서, 넘치는 마음을 전부 드러내지 못하는 우리 두 사람.
우리의 애정 표현은 이 영화의 첫 키스신 전후로 나뉠 것이다.
그 순간부로 우리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에서,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난 오늘 반드시 너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꺼낼 거니까.
* * *
“유리 씨! 여기가 진짜 단 팀장님네 동네예요?”
“그렇다니까. 우리가 여기까지 오면 태오가 술 사 준다고 했어.”
태오의 집 근처 번화가.
유리는 3차를 따라온 직원들에게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그건 그녀가 만들어 낸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유리는 요즘 따라 자신을 피하는 태오를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억지로라도 편해질 자리를 만들기 위해 이렇게 직접 찾아온 참이다.
그녀의 꿍꿍이를 알지 못하는 직원들은 예상치 못한 태오의 등장에 기뻐하며 박수를 쳤다.
“와아, 그럼 단 팀장님 월급도 많이 받으니까 비싼 거 사 달라고 해야겠다.”
“소고기 어때요? 우리?”
“소고기도 좋지만 나는 회가 더 땡기는데?”
“적당히 빼먹어. 이렇게 많이 데려온 거 알면 나 혼날걸?”
유리는 특유의 시원한 미소와 함께 신이 난 여직원들을 익숙한 곳으로 이끌었다.
그녀가 들어서는 술집은 예전에 태오와 가장 친했던 시절, 둘이 과도한 업무를 저주하며 죽어라 마시던 바로 그 조개 구이집이었다.
“안녕하세요! 이모님! 진짜 오랜만이네요!”
그 추억을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고 싶었던 유리는 들어서자마자 가게 주인을 향해 친근한 인사를 건넸다.
그런 유리를 용케 알아본 주인은 화색이 도는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어머, 이게 누구야! 요즘 얼굴 보기가 뜸하더니!”
“하하, 그러게요.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 머스마는 없네? 오늘은 친구들이랑 온 거야?”
“네, 태오는 바빠서요. 우리 여기서 마시면 이모님 조개탕에 소주 밤새 마시고 그랬었는데.”
“맞아. 그랬었지. 그 머스마한테 여러 번 업혀 나갔잖아.”
주인과 유리의 대화를 듣던 직원들이 눈빛이 반짝반짝해졌다. 나봄과 태오의 연애 사실을 모르는 그녀들은 항상 유리와 태오 사이를 심상찮게 여기던 중이었다.
“파트장님! 정말이에요? 단 팀장님한테 업혀서 어디로 가셨는데요?”
그중 가장 장난기 많은 한 명이 음흉한 눈빛을 띠고 묻자, 유리는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다.
“어허, 자기들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에에이! 표정을 보니까 아닌데? 뭔 일 있었죠!”
“뭐…… 그건 우리들만의 비밀.”
“이거 봐, 이거 봐. 확실하다니까. 이러다가 파트장님이랑 팀장님이랑 청첩장으로 연애 소식 알리는 거 아니야?”
직원들의 너스레에 유리는 수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반응이 분위기를 더욱 묘한 쪽으로 몰고 가는 것이었으나 이게 속이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난 분명 그런 거 아니라고 말했는걸, 뭐. 여기서 더 확실히 해명 안 하는 게 잘못은 아니잖아?
자신의 꿍꿍이 섞인 행동에 당위성을 찾은 유리는 직원들을 넓은 자리 쪽으로 이끌었다.
“자자, 어서 들어가 앉아. 주문은 알아서들 하고.”
그리고 본인은 가게 밖으로 다시 몸을 틀었다.
사전에 전혀 협의가 되지 않은 태오를 불러내려면 구구절절하게 매달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파트장님! 어디 가세요! 이리 오세요!”
“보면 몰라? 직접 단 팀장님 데리러 가시겠지!”
직원 한 명이 그런 그녀를 큰 소리로 불렀으나, 눈치 빠른 다른 직원이 알아서 상황을 정리했다.
“오오, 데이트하느라 안 돌아오시는 거 아니야?”
“아하하, 짓궂긴.”
그리 대답해 버린 유리는 이제 진짜로 태오를 불러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만약 그에게 끝내 거절당해 홀로 이 자리에 오게 된다면, 회사에서 제법 거리가 있는 여기까지 끌고 온 것부터가 이상해지게 된다.
직원들과 완벽하게 차단된 가게 밖으로 나온 유리는 서둘러 태오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는데.
뚜루―
―연결이 되지 않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대기가 무섭게 그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이건 아까부터 질척댔던 그녀에 대한 노골적인 무시였다.
태오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유리는 여기서 한 번 더 전화를 걸 경우, 그가 휴대폰 전원을 아예 꺼 버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아…… 이놈의 성깔머리 하고는.”
작게 불만을 읊조린 유리는 결국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 불러내기로 했다.
평소엔 어지간하면 태오에게 다 맞춰 주는 유리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세게 엄포를 놓아야겠다.
그래야 이놈이 날 더 이상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하지 않지. 이대로 계속 무시당할 만만한 내가 아니라 이거야.
* * *
“전화 받아도 되는데.”
나봄은 아까 전화벨이 울렸던 태오의 휴대폰을 보며 말했다. 벨 소리가 울리기가 무섭게 수신 거부 버튼을 눌렀던 태오는 살짝 짜증이 밴 목소리로 대답했다.
“술 먹자는 연락이야.”
“아, 그래?”
그런 거라면 오늘처럼 중요한 날엔 거절하는 게 맞긴 하지만…….
지잉―
그러기가 무섭게 도착한 메신저는 왠지 전화를 거부당한 그 사람 같았다.
지잉― 지잉― 지잉―
연달아 이어지는 메신저 진동은 너무나도 다급해서, 흡사 전화 올 때의 진동 같다.
“혹시 급히 널 찾는 건 아닐까?”
괜스레 중요한 약속이 있었는데 방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워진 나봄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찾든 말든.”
하지만 단칼에 대답하는 태오의 목소리엔 왠지 날이 서 있었다. 상대가 누군지는 몰라도 어지간히 비호감을 사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봄은 그런 태오를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영화로 시선을 돌려놓았다.
―안아 줄까?
―……뭐?
바로 그때, 타이밍 좋게 등장한 영화 ‘파혼은 어떻게 할까요’의 노래방 키스신.
―안겨요. 등 토닥토닥해 줄게.
이미 술에 취한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에게 빨개진 얼굴로 비틀비틀 걸어가는 순간, 나봄은 느슨하게 풀어졌던 허리를 꼿꼿하게 바로 세웠다.
“태오야, 저거 봐. 여자 주인공 눈이 어쩜 저렇게 예쁜지 모르겠어.”
그리고는 혹시나 싶어 딴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를 태오를 집중시켰다.
하지만 태오는 그 말에 보고 있던 텔레비전에서 눈동자를 옮겨, 그녀의 얼굴을 깊은 시선으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아닌데. 니가 더 예쁜데.”
“아냐, 지금 그럴 때 아니야. 얼른 영화 봐.”
작전을 흩트리고 싶지 않았던 나봄은 능청을 떠는 태오의 얼굴을 무심한 손길로 돌려놓았다.
―얼른 오라니까요.
그러기가 무섭게 터져 나온 여자 주인공의 나른한 목소리.
―……니가 먼저 오라고 했다.
이어지는 남자 주인공의 박력 넘치는 멘트.
머지않아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한껏 머금었다. 깊숙이 얽히는 두 남녀의 호흡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심장을 날뛰게 만들었다.
“크흠!”
점차 짙어지는 키스신이 부끄러운지 태오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바로 지금, 태오가 그들의 키스에 동요했을 때. 이때가 나봄이 첫 번째 대사를 날릴 때였다.
“우리도 노래방에서 첫 키스했던 거 기억해?”
“아…… 어, 기억하지.”
나봄의 질문에 태오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봄은 그런 그를 바라보며 생글생글 미소 지었고, 오늘따라 더욱더 빛나는 눈동자를 고정시켰다.
“그땐 내가 널 좋아하는 줄도 몰랐었는데.”
그리고 흘러나온 두 번째 대사.
태오의 동공이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 당시에도 그에게 마음이 있었다는 얘기는 오늘 처음 듣는 소리이니.
“그, 그러냐.”
태오는 잔뜩 동요한 시선을 어긋낸 채 대답했다. 나봄은 그런 그를 속으로 열심히 응원했다.
태오야, 부끄러워서 그런 식으로만 반응하지 말고.
“크흠!”
괜히 한 번 더 헛기침하지 말고 묻고 싶은 걸 물어! 자, 어서!
“……그럼 지금은.”
됐어!
드디어 다가온 고백 찬스에 나봄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갑작스레 신이 난 그녀의 모습은 태오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으나, 나봄은 한껏 밝아진 미소를 띤 채 입술을 열었다.
“응! 지금은……!”
하지만 중요한 그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지잉―
한 번 더 울린 메시지 진동이 그녀의 신경을 앗아 갔다.
슬쩍 어긋난 그녀의 시선이 태오의 휴대폰에 떠오른 메시지 내용을 순식간에 읽어 버렸다.
팝업창은 금세 사라졌지만 글자는 나봄의 머릿속에 콱 박혀 또렷이 기억되어 버렸다.
[지금 당장 나한테로 안 오면 우린 끝이야.]
아니, 누구신데 내 남자 친구한테 그런 협박을…….
“방금 누구야?”
나봄이 0.1초 만에 딱딱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입술 새로 나올 대답을 기다리는 데 여념이 없던 태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가?”
“지금 톡 보낸 사람 말이야.”
“그런 게 왔어?”
뒤늦게 휴대폰을 확인하는 태오는 시치미를 떼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 그를 추궁하진 않고 가만히 그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으니.
“아, 허유리…… 이게 미쳤나.”
나봄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드는 이름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그녀만큼은 무시할 수 없었던 나봄은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유리 씨가 이 밤중에 왜 보고 싶다고 그래?”
“어?”
“메시지 다 봤어. 얼버무릴 생각하지도 마.”
물론 그녀가 중요한 순간에 그런 메시지를 보낸 게 태오 잘못은 아니었으나, 슬슬 열이 오르기 시작한 나봄은 뾰족한 말투로 물었다.
어차피 유리 혼자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관계. 딱히 숨길 생각은 없었던 태오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오늘 여직원 회식 날인데 우리 동네까지 멋대로 찾아와서 술 사 달라고 조르는 거야. 어차피 이게 술버릇이라 대꾸도 안 할 거니까 신경 쓰지 마.”
“뭐? 여기로 찾아왔다고?”
그러나 그녀의 만행을 전달받은 나봄의 눈빛은 점점 더 타오르는가 싶더니.
“그래서, 유리 씨 어디래?”
“어?”
“나 유리 씨 잠깐 좀 보고 와야겠어.”
“어, 어?”
이윽고 비장한 결투 신청을 내뱉기에 이르렀다.
싸움과는 매우 거리가 멀어 보이는 나봄의 호기로운 모습에 놀란 태오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