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좋아해 줘서 고마워
2017.12.15.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즐거웠던 시간에 재처럼 뿌려졌던 몹쓸 빗방울이 눈치도 없이 자꾸 떨어진다.
우산을 꼭 쥔 채 하늘을 바라보던 나봄은 건널목의 신호등에 초록 불이 들어오고 나서야 걸음을 움직였다.
지금은 고장 난 휴대폰 충전기를 내다 버리고, 한봄 도어락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마트까지 가서 새 충전기를 사 오는 길.
그놈의 휴대폰 때문에 업무를 시작도 못 한 나봄은 얼굴에 근심 걱정이 가득했다. 클라이언트가 원한 수정 사항은 언뜻 봐도 어마어마하던데, 이대로라면 밤을 꼬박 새게 생겼다.
“태오한테 연락도 해 줘야 하는데…….”
하지만 무엇보다 그녀를 신경 쓰이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잘 있다가 데이트 후반부쯤부터 갑자기 불안한 기색을 띠던 단태오의 눈동자.
나봄은 그게 자꾸 작은 생선 가시처럼 마음에 걸려 찝찝해 죽겠다. 우린 오늘 아무 일도 없었으니 별일 아닐 거라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나도 모르는 새에 너한테 실수라도 저질렀던 건 아닌지…….’
걱정이 배가 된 나봄은 애꿎은 충전기만 손에 꽉 쥔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녀는 공장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휴대폰을 켜고 태오한테 연락부터 할 참이었다.
하지만 공장 정문에 다다를 즈음, 그리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
비도 오는데 닫혀 있는 공장 정문에 딱 붙어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저 남자.
그는 믿기지가 않게도 그는 두 시간 전쯤 헤어진 단태오였다. 지금쯤 차를 찾아 집으로 갔을 태오가 어째서 여기 있는 건지, 나봄은 몹시 당황스러워졌다.
“태오가 왜…….”
놀란 나봄은 저도 모르게 잠시 멈춰 섰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두 발을 더욱 재촉했다.
아쉽게 헤어졌던 만큼 반가움이 더 큰 태오이지만 푹 젖어 버린 그의 모습은 어쩐지 서러워 보였다.
“태, 태오…… 태오야!”
그래서 철렁 내려앉아 버린 심장을 붙들고 거의 달리듯 그에게로 다가가자.
“한나…… 봄?”
계속 빈 공장 안만 바라보고 있던 그의 시선이 드디어 나봄 쪽으로 돌아섰다.
축 늘어진 어깨만으로도 예상은 했지만 똑바로 확인한 그의 눈동자는 하염없는 불안에 떨고 있었다.
“태오야! 무슨 일이야!”
순식간에 태오의 앞까지 다가간 나봄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태오는 위태롭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고, 이내 먹구름처럼 젖어 든 음성을 흘려보냈다.
“어디 갔었어?”
“어?”
“연락이 안 되길래 걱정돼서 왔는데, 분명 여기 온다고 했던 니가 보이질 않아서…….”
그건 언뜻 말도 없이 연락 두절이었던 것에 대한 원망처럼 들렸다.
고의가 아니었던 나봄은 방금 사 온 충전기를 보여 주며 해명을 하려 했으나.
“……내가 미안.”
머지않아 하루 종일 그의 입을 떠나질 않았던 사과가 다시 한 번 꺼내지고 나서야, 지금 태오는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뜨거운 손을 뻗어 나봄의 팔목을 붙잡는 태오는 지금 그녀에게 매달리는 중이다.
그런 그가 걱정스러워진 나봄은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또 뭐가 미안해…….”
그에 대해선 이미 대답을 정해 놓았던 태오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입술을 떼어 냈다.
“내가 부족했어.”
“……뭐?”
“그래서 잘해 보려고 했는데 안 됐어.”
“태오야…….”
“전부 내 잘못이야.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그땐 내가 잘할게.”
앞서 건네졌던 것보다 구차해지고 애절해진 사과.
이쯤 되면 나봄도 답답해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 대체 그가 무슨 잘못을 했었는지, 그로 인해 행복하기만 했던 그녀는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우선 태오의 불안감부터 달래 주고 싶었던 나봄은 팔목을 감싸 쥔 그의 손을 떼어 냈다.
그러고는 그의 찬 손을 그녀의 따듯한 두 손으로 다시 붙잡았다. 파르르 떨리는 태오의 눈빛은 고통을 호소하는 다친 짐승과 같았다.
나봄은 그 상처 많은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나긋한 음성을 흘려보냈다.
“너 오늘 나한테 아무런 실수도 안 했고, 잘못한 것도 없어.”
“그래도…….”
“난 너랑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이번 데이트가 좋았는데 왜 자꾸 부족했다 그러는 거야. 응?”
그리 묻는 나봄은 진심으로 태오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하지도 않은 실수를 자책하는 그의 모습은 아무리 이해해 보려고 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무래도 그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정말로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그 진심을 알아야 겁먹은 너를 달래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태오야, 니가 정말 나한테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해?”
나봄은 좀 더 깊은 시선으로 그를 마주한 채 물었다. 그러자 태오는 고개를 푹 떨어트린 채 가로저었고, 이내 두려움에 젖은 목소리를 새어 보냈다.
“사실은…… 잘 모르겠어.”
“그런데 왜 자꾸 사과를 해?”
“……날 떠날까 봐.”
“뭐?”
“니가 날 떠날까 봐 그래.”
요즘 들어 태오를 향한 마음이 쉬지 않고 자라나는 걸 느끼고 있던 나봄에게 그의 걱정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그동안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은 충분히 달콤했던 것 같은데, 태오는 조금 다르게 느끼고 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도 제 감정을 확신하고 있는 이상, 그가 불안해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 사실을 알려 주고 싶었던 나봄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보야. 니가 생각해도 잘못한 게 없는데 내가 왜 떠나겠어. 말이 안 되잖아.”
그러나 그 얘기에 더욱 더 흐려지는가 싶었던 태오의 숨소리는 이윽고 서러운 대답으로 변한다.
“떠났잖아…….”
“…….”
“우리 처음 헤어졌을 때도 난 잘못한 게 없었는데…….”
“…….”
“너는 내가 인연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전부 없었던 일로 하자고 했어.”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오래된 기억 하나가 선명히 떠올랐다.
5년 전, 태오와의 불편한 첫 데이트를 견디지 못했던 나봄은 내내 연락을 피하다가.
‘우리 만나기로 했던 거 말이야. 그거 없었던 일로 하고 싶어.’
‘조금 더 만나 보고 판단해야 할 문제이긴 하지만, 너랑 나는 너무 안 맞는 것 같아. 내 마음이 누굴 만날 준비가 안 되어 있기도 하고.’
‘그러니까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을 때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두 번째 데이트를 하러 나왔던 태오에게 잔인하리만큼 일방적인 이별의 말을 내뱉었다.
그때 태오는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한나봄, 넌 원래 인생 그렇게 사냐?’
‘다시는…….’
‘다시는 내 눈앞에 띄지 마.’
지금까지는 그날의 태오가 불같이 화를 냈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되새겨 보니 그건 화가 아니라 아파하는 중이었다. 그날 그녀가 낸 깊은 상처 때문에.
어렴풋이 알게 된 불안의 원인은 나봄을 하염없이 미안해지게 만들었다. 아마도 그는 우리의 자꾸만 꼬여 가는 오늘 하루를 보며 5년 전 첫 데이트를 떠올렸었나 보다.
그날을 회상하면 회상할수록 다시 그때처럼 버려질까 봐 두려워서, 넌 그동안 그렇게 사과를 했었던 거구나.
무조건 너의 잘못으로 돌려야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매달릴 수 있었을 테니까.
“하아…….”
이제야 어렴풋이 그의 마음을 깨달은 나봄은 죄책감 어린 눈빛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동안 받았던 사과만큼 나도 미안하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러기는 조심스러웠다.
나봄이 조금만 움츠러들어도 5년 전 이별을 떠올리며 불안해하는 태오는 그런 그녀에게 더욱 더 상처 입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렇게 너의 아픔을 덮어 둘 수는 없으니…….
“태오야.”
고민하던 나봄은 태오의 이름을 불렀다. 발끝으로 떨어져 있던 그의 시선은 그제야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이리 와.”
그리 말한 나봄은 들고 있던 우산을 떨어트렸고,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젖은 등을 끌어안았다.
“다 젖잖아.”
“괜찮아.”
태오는 나봄을 밀어내려 했으나 나봄은 고집스럽게 그를 안은 두 팔에 힘을 더했다.
차가운 몸에 스며드는 그녀의 온기.
태오는 눈을 감았다. 이유 모를 불안감을 이 따스한 온기에 녹여 버리기 위하여.
아직 너와의 이별을 기억하고 있는 가슴은 욱신거리고 있지만, 그래도 나봄을 기다리던 시간만큼 못 견디게 괴롭진 않아졌다.
“하아…….”
나봄의 귓가를 스치는 그의 숨소리는 어느새 한결 편안해져 있었다.
나봄은 그를 끌어안은 두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고, 맞닿은 가슴으로 전해지는 심장박동에 맞춰 그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토닥토닥.
나쁜 생각들은 모두 물러가게끔 만드는 너의 마법 같은 위로.
이제야 이성이 되돌아온 태오는 그녀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늘 그녀 앞에 서면 조심스러워지기만 했던 그는 이번만큼은 욕심껏 사랑을 갈구해 보기로 했다.
“한나봄…… 나 좋아해?”
“응, 좋아.”
“이젠 미워하지 않아?”
“응, 절대로 미워하지 않아.”
그래, 그렇다면 미안하다는 얘기는 하지 않아도 되니까 이제는 그거 말고 이 말을 전하고 싶어.
“고마워…….”
“…….”
“정말 고마워, 나봄아.”
드디어 새어 나온 진심은 나봄의 코끝을 찡해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주책맞게 터져 버리려는 눈물샘을 가까스로 막아 둔 채, 나봄은 한 가지 다짐을 했다.
나는 첫사랑, 첫 이별을 하도 심하게 앓아서 조그마한 불안에도 자책하는 널.
미워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가슴 깊이 고마워하는 널.
천천히 시간을 들여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남자로 만들어 줄 거야.
내가 너에게 두 번 다신 이별을 말할 일이 없을 거라는 걸 믿을 때까지 정말 많이 아끼고 사랑해 줄 거야.
* * *
펄펄 끓어오르는 열이 좀처럼 내려가질 않는다.
병원에 갈 기력조차 없어서 죽은 사람처럼 침대에만 누워 있길 벌써 며칠째.
평소엔 감기도 잘 걸리지 않는 몸인데 왜 이렇게 부서질 것처럼 아픈지 모르겠다. 선반에서 겨우 찾아낸 해열제는 몇 알이나 삼켜 넘겨도 좀처럼 듣질 않는다.
“쿨럭! 쿨럭!”
거친 기침을 토해 낸 차준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당겼다. 몰아쉬어지는 호흡은 곧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미약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가 정말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건, 죽을 만큼 아파도 그 사실을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 쓸쓸한 자신의 삶이었다.
아무래도 이번 인생은 제대로 실패한 것 같다. 이대로 내가 죽어 버린다면 아마 성한 몸으로는 장례를 치를 수도 없겠지.
폭풍처럼 밀려들어 온 절망으로 인해 죽음까지 내몰렸던 차준은 며칠 전 밤, 아끼는 정장을 갖춰 입은 채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에 몸을 담갔다.
그러고는 날이 선 과도를 빼 들었다.
손목에 잡힌 주름을 따라 모든 힘을 다해 깊숙이, 그는 동맥을 잘라 내며 자신을 괴롭게 했던 사람들과의 인연도 함께 잘라 내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칼을 붙잡기가 무섭게.
‘그럼 죽여. 니 손으로.’
왜 애써 지워 두고 있었던 그 얼굴이 떠오르는 건지.
지금까지 그 어떤 모멸감도 내색 없이 참고 있던 그가 처음으로 반격한 순간, 차준의 심장은 일순 멎어 버렸다.
어차피 내 마음에서 버린 사람, 내게 어떤 욕설을 퍼붓던 상관은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속이 편해?! 전부 내 탓으로 돌리고 나면 니 인생이 나아질 것 같아?!’
‘착각하지 마! 아무리 날 원망하고 증오해도 애초부터 망가져 있던 게 멀쩡해지지는 않아!’
그리 말하는 그는 어떻게든 다가오려 했던 그동안의 노력도 잊은 것처럼 날카로워서.
차준은 저도 모르게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래도 형 때문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
‘모든 걸 형 탓으로 돌리기에는…… 내가 너무 형을 좋아했었어.’
그에게 애원하듯 꺼내 놓은 말은 혼란스러운 감정에 동요하지만 않았더라면 죽는 날까지 감춰 놓았을 고백이었다.
다 늦어 버린 지금에 와서야 그 얘길 들어 버린 그는 몇 번 고개를 가로젓다가, 쏟아지는 나의 원망에 이내 입을 닫아 버렸다.
‘그런데 형한테는 내가 어깨를 짓누르는 짐일 뿐이었잖아.’
‘내 존재가 부담스러워서…… 어떻게든 나를 감춰 놓고 싶어서…….’
‘항상 악착같이 노력해 왔던 거잖아.’
그래, 입을 닫았다.
평소엔 내가 무슨 폭언을 퍼부어도 꿋꿋하게 날 위해 주는 척 하다가, 그 말에 대해선 단 한 마디 해명조차 하지 않았다.
차마 아니라고 둘러대기엔, 모든 게 끝나던 그날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본심이 드러나 버렸으니까.
그 마음을 확신하게 되는 게 싫어서…… 그와는 마주치는 일조차 꺼렸었는데.
그날, 차준은 끝내 손목을 긋지 못했다. 그저 뜨거운 물이 차갑게 식을 때까지 가만히 욕조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밤새 그를 생각했다.
차라리 죽음을 바랄 만큼 증오스러운 상대지만 그런 그의 돌아서는 뒷모습만큼은 보고 싶지 않은, 자신의 모순된 마음도.
이런 나를 진작에 알아본 나봄은 다시 그때로 돌아가라 말했지만,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기엔 우리가 너무 멀리 왔어.
그렇게 처절한 마음의 열병이 지나가고, 차갑게 젖은 몸에 지옥 같은 몸살이 찾아왔다.
지금 이 순간, 달아오른 열 때문에 눈앞은 이미 혼미해져 버렸지만 영영 보지 못할 그의 웃는 얼굴은 점점 선명해져 갔다.
‘차준아! 오래 기다렸지.’
저 멀리서,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온 형이 손을 흔들며 내게로 걸어온다.
나는 그런 형이 하염없이 반가워서, 여전히 나를 좋아해 주는 형이 나도 좋아서.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다, 형…….”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괜히 투정을 부린다.
그를 닮고 싶어서 연습했던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