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아물지 않은 상처는 자꾸만 덧난다
2017.12.11.
“하아…… 솔직히 그 식당 되게 별로였어.”
태오가 방금 전 식사를 마친 식당에 대해 냉혹한 평가를 내렸다. 비록 나봄이 선택한 식당이었으나 그 부분에 대해선 그녀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보다 음식 맛이 괜찮아서 만족스럽게 식사를 이어 나가던 중에 나타난 천장 위 쥐 한 마리 때문이었다.
“위생 상태가 되게 별로였지?”
나봄은 태오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힘주어 유리문을 열었다.
딸랑―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그들이 들어선 곳은 태오가 공들여 찾아 놓은 분위기 좋은 카페.
이번에도 주차 때문에 애를 먹긴 했으나 그래도 여기서는 쫓겨날 일이 없었다. 예약제도 아니거니와 제일 전망이 좋은 창가 자리에 떡 하니 두 자리가 남아 있었으니.
게다가 이렇게 깔끔한 건물이라면 뜬금없이 쥐가 튀어나올 일도 없을 터였다. 이제야 안심한 태오의 눈빛이 한결 편안해졌다.
“여기 되게 고급스럽다.”
나봄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태오는 그런 그녀의 손을 꼭 붙잡고 창가 자리로 이끌었다.
푹신한 의자에 마주 보고 앉자마자 다가온 직원은 그들을 쫓아낸 레스토랑 직원보다 훨씬 더 친절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손님. 메뉴판 드리겠습니다. 결정이 끝나시면 제게 말씀해 주세요.”
태오는 그가 내미는 메뉴판을 받아 나봄에게 건네주었다. 그걸 펼쳐 본 나봄은 어렵지 않게 음료 하나를 골랐다.
“나는 레모네이드 마실래. 넌?”
“난 얼그레이 티.”
“그럼…… 레모네이드 한 잔, 얼그레이 티 한 잔 이렇게 주세요.”
일사천리로 이뤄진 주문을 받은 직원은 한 번 더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메뉴판을 돌려받았다.
그제야 태오는 두 번째 데이트 코스에 무사히 진입했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도 일이 꼬였으면 심히 절망할 뻔했다.
“아까 딸기 케이크 있던데. 안 먹어도 되겠어?”
한층 여유가 생긴 태오는 나봄에게 디저트를 권유했다.
아까 먹은 식사로도 충분히 배가 불렀던 나봄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고는 자신만 보면 딸기와 관련된 음식을 사다 주는 태오에게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날 보면 딸기가 떠올라?”
“글쎄. 왜?”
“나한테 자꾸 딸기로 된 것만 주길래.”
“저번에 줬던 딸기 무스 케이크?”
“그것도 있고, 5년 전에 나한테 고백할 때도 딸기 우유 줬었잖아. 난 딸기 좋아한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갑작스럽게 꺼내진 5년 전 얘기에 태오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고 보니 그땐 왜 딸기 우유를 주면서 고백했던 걸까. 꽃이나 곰 인형 같은 근사한 선물도 많았을 텐데.
곰곰이 생각해 보던 태오의 뇌리에 어떤 기억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5년 전, 나봄의 선물을 고르던 날. 긴장감을 달래려 생수를 사러 들어간 편의점에서 태오는 이런 광고 문구가 적힌 딸기 우유를 발견했다.
‘달콤한 딸기 우유 한 잔이면 핑크빛 사랑을 시작할 확률도 200%!’
그래, 너무 겁이 많았던 난 그 광고 문구에 희망을 걸었었어. 그렇게라도 해야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고백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솔직한 대답을 하자니 너무 소심한 이미지가 될까 걱정됐던 태오는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니가 딸기 닮아서 그래.”
그 말을 들은 나봄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지금껏 토끼나 햄스터 같은 동물 닮았단 얘기는 많이 들었어도 딸기는 처음이었다.
“내 어디가 딸기 같은데?”
나봄은 딸기의 생김새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러자 태오는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가득 머금고는 짓궂은 대답을 이어 나갔다.
“엄청 작잖아.”
“뭐야, 키 작아서 딸기야?”
“응, 딱 한입거리쯤 되려나.”
태오의 말을 들은 나봄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작은 키는 한씨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콤플렉스인데 이런 식으로 후벼 파다니. 정말 너무하는구만 그래.
“키 커서 좋겠다.”
심술 난 나봄은 뾰로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태오는 그런 나봄을 귀여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싫은 적은 없었지. 이 비율 덕에 인기가 얼마나 많았는데.”
“아아, 그러셨어요?”
“대학 다닐 때 너만 아니었으면 여자 친구 한 트럭을 만들었을걸.”
“그럼 만들지 그랬어. 왜 나한테 쏙 빠져 가지고 헤어 나가질 못하셨나.”
“혹시 니가 무의식적으로 안 놔준 건 아니고?”
“어휴, 말이나 못 하면.”
친밀도가 높아진 그들은 투닥거리는 것마저도 사랑놀이 같았다.
서로에게 던지는 농담도 어쩌면 이리 쿵짝이 잘 맞는지. 한 공간에 있으면 어색하던 때가 까마득히 먼 옛날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달콤한 실랑이를 이어 나가고 있을 무렵.
“레모네이드, 얼그레이 티 나왔습니다.”
직원이 주문한 음료가 올려진 작은 쟁반을 받쳐 들고 다가왔다. 생각보다 빨리 나온 음료에, 나봄은 반가움 가득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감사합……”
그때.
“앗!”
유리잔에 맺혀 있던 물방울 때문에 미끄러져 버린 점원의 손이 나봄 쪽으로 레모네이드를 지나치게 기울인 채 전해 주고 말았다. 덕분에 반쯤 쏟아져 버린 레모네이드는 나봄의 가슴을 순식간에 적셔 버렸다.
“엄마야!”
화들짝 놀란 나봄은 젖어 버린 원피스 가슴께를 황급히 털어 냈다.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사태에 당황한 직원도 서둘러 티슈를 건네며 연거푸 사과를 내뱉었다.
“어떡하면 좋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잘 있다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테이블.
이곳에서 가장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은 레모네이드를 뒤집어 쓴 나봄도 아니요, 실수를 저지른 직원도 아니요, 이 상황을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단태오였다.
현재 그의 드리워진 그늘이 두 사람의 것보다 더욱 짙다.
두 번째 코스만큼은 아무 탈 없이 지나가겠구나, 하고 마음 놓았던 그였기에.
“아니, 이게 뭔…….”
태오는 갑작스럽게 닥쳐온 위기에 황당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 다시금 가시가 돋쳤다는 걸 눈치챈 나봄은 손을 휘저으며 필사적으로 얘기했다.
“아니야! 태오야! 난 괜찮아! 어차피 레모네이드라서 마르면 티도 안 날 거야!”
하지만 지금 태오의 문제는 그녀의 원피스에 자국이 남느냐 안 남느냐가 아니었다. 다른 것보다도 두 번째 데이트 코스에서조차 기어이 불쾌한 일이 생겨 버렸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게 만들 뿐이다.
자리에 앉기만 하면 끝인 줄 알았는데, 역시 위기는 방심하고 있는 새에 찾아오는 모양.
“티슈 더 가져오겠습니다! 레모네이드도 다시 드릴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직원은 연신 고개 숙여 사과하고는 빠르게 자리를 떴다.
나봄이 생각하기에 지금 그는 서슬 퍼런 태오의 눈동자를 피해 달아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 다를까. 미간을 잔뜩 구기고 있던 태오는 멀어지는 직원을 원망스레 노려보다가, 그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나봄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
“응? 응! 괜찮아! 얇아서 금세 마를 거야!”
“아…… 미안해.”
그러고선 이번에도 어김없이 영문 모를 사과를 흘려보냈다.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는 어쩐지 실수를 저지른 직원보다도 자괴감이 깊어 보인다.
그런 태오가 아까부터 의아했던 나봄은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자꾸 사과를 해. 니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래도…….”
“한번만 더 사과하면 벌준다?”
그러고서 내뱉은 말은 피치 못할 상황도 전부 제 탓으로 돌려 버리는 태오를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그는 이번 데이트를 망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과도하게 예민해져 버린 듯하다.
“벌?”
아직 얼굴에서 난처한 기색을 지우지 못한 태오는 나봄에게 되물었다.
나봄은 그런 그를 웃음기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아주 단호한 목소리로 엄포를 놓았다.
“응. 아주 창피하게 만들어 버릴 거야.”
“어떻게.”
“그건 비밀이지. 그렇다고 괜히 궁금해서 또 사과하진 말고.”
어느 정도 젖은 원피스를 수습한 나봄은 티슈를 내려놓았다.
“자, 그래서 이거 다 마시고는 뭐할 거야?”
그런 뒤 꺼내 놓는 질문은 태오의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함이었다.
태오는 아직 눈빛을 정돈하지 못한 와중에도 애써 침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영화는 볼만한 게 없어서 근처 공원에 가려고.”
“아, 공원! 그래, 오늘 날씨도 좋으니까 공원 산책하기 딱이겠다.”
박수까지 치며 좋아하는 나봄은 태오의 마음을 달래 주었다.
레스토랑 퇴짜에 이어 레모네이드 폭탄까지 맞았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녀는 기분이 상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태오는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안도감이 다음 코스를 더욱 더 완벽하게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바뀌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와, 그런데 커피라도 시켰으면 어쩔 뻔했어? 정말 다행이다. 그치?”
눈앞에서 나봄은 웃고 있는데 심장은 자꾸만 불안하게 옥죄여 온다.
여기서 한 번만 더 일이 어긋나면 정말 패닉에 빠져 버릴 지경이다.
이건 내가 생각해도 너무 불안에 휘말리는 것 같은데. 나 그동안 니 앞에서도 태연하기만 하다가 갑자기 왜 이러지…….
“단태오, 그렇지 않냐구.”
“어, 어…….”
태오는 스스로도 납득하기 힘든 초조함을 추스르지도 못한 채 흐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부자연스럽도록 표정이 굳고 자꾸만 가슴이 옥죄여 오는 게, 어쩐지 평정심을 되찾기가 힘이 들었다.
마치 5년 전 그 최악의 날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다.
오늘이 지나면 너의 마음이 어떻게 변해 있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 때문에 머릿속이 어지러워진다.
* * *
딸랑―
청량한 종소리와 함께 유리문이 열렸다.
뒤이어 손을 꼭 붙잡고 나오는 연인은 사사로운 얘기들을 신나게 조잘대며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온 나봄과, 그런 그녀의 얘기를 반쯤 얼빠진 정신으로 듣고 온 태오였다.
“자, 다음 코스는 공원이랬지? 이 근처 공원이라면 혹시 한강 공원?”
나봄은 기대감 가득한 목소리로 태오에게 물었다.
그제야 복잡한 머릿속을 다잡은 태오는 심기일전한 대답을 했다.
“응, 이번엔 진짜 잘할게.”
“이미 나랑 잘 놀아 주고 있는데 무슨 소리야, 하하.”
그녀는 태오의 각오를 장난처럼 넘기지만, 태오는 지금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 비장한 마음이었다.
비록 초입과 중간 과정은 별로였으나 후반부만큼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큼 완벽한 데이트로 만들어서, 결과적으로는 좋았던 날로 평가되게끔 하고 싶다.
한 번 더 각오를 다진 태오는 속주머니에서 차키를 빼 들었다.
그러고선 차를 주차시켜 놓은 골목 쪽으로 손을 뻗었는데…….
“어……?”
이 골목에 있어야 할 차가 보이지 않았다. 세워 둔 곳은 여기가 분명한데 누가 마법이라도 부린 양, 흔적조차 남아 있질 않다.
순간 등골이 싸늘해진 태오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러자 다 늦어 버린 지금에 와서야 눈에 들어온 마크는 불법 주차 단속 구간 표시.
좌절한 태오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 왔다. 아마도 카페에 앉아 있던 그 몇 시간 새에 견인차가 이 앞을 왔다 간 모양이다.
“아, 견인 됐다…….”
절망한 태오는 이마를 짚은 채 힘없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당황한 건 나봄도 마찬가지였으나 그녀는 또다시 태오가 시무룩해질까 싶어 가장 먼저 그부터 달래기로 했다.
“여기 주차 구역이 아니었나 봐. 공원은 지하철 타고 가야겠다!”
그 말은 우리 데이트는 망하지 않았어! 라는 의미와 같았다.
다행히도 시무룩해질 뻔했던 태오의 눈빛은 그녀의 위로에 다시 힘을 되찾는 듯했다.
“그래, 그럼 일단…….”
그러나 그의 입에서 새로운 계획이 꺼내지기도 전에.
후드득후드득.
무심한 하늘에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공원 얘기가 나오자마자 시작된 비는 그야말로 최악의 타이밍이었다.
“오, 오늘 비 온다는 말 없었는데…….”
상황이 이쯤 되니 나봄도 더는 분위기를 돋울 수가 없었다.
태오가 기 좀 세우려고 하면 온갖 사건 사고로 자꾸만 맥없이 꺾어지는 게, 아마 전생에 데이트 한 번 못해 보고 죽어서 한이 된 귀신이 그에게 달라붙어 있는 모양이다.
“아…….”
차는 없어져 버렸고, 비는 오고, 우산은 준비 못 했고, 그래서 혼란스러운 이 와중에도 견인비는 계속 오르고 있고.
누가 봐도 데이트를 끝내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 지금.
나봄은 여기서 작별을 고해야 하는 이유를 전부 제 탓으로 돌려 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주말 업무가 잡혀 버린 이상, 그녀는 데이트를 계속할 수 있는 팔자도 아니었다.
“저기! 생각해 보니까 나 오늘 안에 디자인 수정해 놓으려면 지금쯤 회사로 가 봐야 하는데!”
“…….”
“너무 미안해서 어쩌지! 이건 일하라는 신의 계시인가 봐! 나 때문에 자꾸 일이 꼬이네!”
그래, 태오야.
오늘 우리에게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 건 전부 내 탓이야. 그러니까 축 처진 어깨 좀 풀어.
“그러냐…….”
하지만 그녀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그리 대답하는 태오의 음성에는 유독 힘이 없었다.
저렇게 기운 빠진 모습을 얼마 만에 보더라.
아마 제대로 연애를 하고 난 이후로는 처음일 거다. 언제나 들떠 있던 그는 오늘 제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이렇게 끝을 낼 수는 없었던 나봄은 태오의 기운을 북돋아 줄 만한 무슨 말이라도 건네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적당한 위로가 생각나질 않았다. 하긴, 어지간한 위로와 응원은 아까 상황이 계속 안 좋아질 때부터 계속 내뱉었으니.
그렇게 난처해하고 있는 사이.
“택시 왔네. 타.”
어느새 다가오는 택시를 멈춰 세운 태오가 뒷문을 열며 말했다. 텅 비어 있는 그의 눈동자는 어떤 노력을 해도 되살아나지 않을 것만 같다.
“기사님, 화곡동 한봄 도어락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태오야, 저기…….”
나봄은 태오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택시에 몸을 실으면서도 어떻게든 즐거웠다는 인사를 남겨 보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어진 그의 한 마디는 도저히 흘려듣지 못할 만큼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오늘 잘해 보려고 했는데…….”
“…….”
“미안하다, 정말.”
니가 대체 뭘 잘못했길래 아까부터 미안하다고 그래.
어쩐지 서글퍼 보이는 그의 모습은 묻고 싶은 말을 흘려 내지도 못하게 막았다.
탁―
머지않아 맥없이 닫혀 버린 차 문이 우리 사이를 가르고, 그러기가 무섭게 출발부터 해 버린 택시는 우리의 거리를 떨어트린다.
이대로 헤어지는 건 안 돼. 난 정말 오늘 하루 너랑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이건 꼭 데이트를 다 망쳐 버린 것 같잖아.
결심이 선 나봄은 그가 더 멀어지기 전에 차창을 열었다. 그러고선 영혼까지 끌어모은 목소리로 온 힘을 다해 외쳤다.
“태오야! 오늘 즐거웠어!”
“아가씨! 창밖으로 손 내밀면 위험해요!”
“진짜 진짜 좋았어!”
택시 기사에 잔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손을 흔드는 그녀는 나름대로 필사적이었다. 그녀는 연달아 벌어진 피치 못할 사건 사고로 잔뜩 풀이 죽어 버린 그가 제발 기운 차리길 바랄 뿐이다.
그런 그녀의 마음이 닿은 걸까.
멀어진 거리 탓에 벌써 손바닥만큼 작아진 태오가 축 늘어져 있던 손을 들어 휘휘 흔들었다. 평소처럼 씩씩하진 않았으나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표시 같았다.
그제야 한숨을 돌린 나봄은 창밖으로 내밀었던 손을 천천히 거두어 왔다.
하지만 남겨진 그를 향한 시선마저 쉽사리 떼어 내진 못했다.
이미 멀어질 대로 멀어진 태오의 얼굴은 잘 보이지도 않지만, 그녀는 그토록 기대했던 데이트를 자포자기하듯 끝마쳐 버리는 그가 조금 의아하게 느껴진다.
이유 없이 사과하는 것도, 그냥 넘길 수 있는 해프닝에 무척이나 불안해하는 것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엔 너무나도 이상하기만 하다.
“오늘따라 왜 그러지…….”
나봄은 어쩐지 필요 이상으로 초조해 보였던 태오를 회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엔 낯선 이보다 더 낯선 사이였지만 그래도 요즘은 우리 사이가 꽤 단단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의 넌 계속 내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꼭 내가 너에게 못된 말이라도 할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 * *
“하아…….”
견인 차량 보관소.
거금을 내고 차를 되찾은 태오가 긴 한숨과 함께 보관소를 나섰다.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빗줄기는 물방울만 뚝뚝 떨어지던 정도였는데, 견인비를 치르는 새 제법 굵어져 버렸다.
이렇게 갑자기 쏟아져 내릴 줄 알았으면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일회용 우산을 사 올걸.
“아유, 비가 많이 오네. 여기 손님이 두고 간 우산 많은데, 하나 드릴까요?”
태오의 한숨을 들은 보관소 직원이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태오는 그 호의를 받기 위해 고개를 끄덕거리려다가, 순간 먼저 회사로 보냈던 나봄을 떠올랐다.
걔도 우산 없을 텐데. 택시가 회사 앞에 잘 내려 주긴 했나.
“잠시만요. 통화 좀 하고요.”
태오는 일단 걱정스러운 그녀의 안부부터 묻기로 했다.
잘 들어갔냐는 말은 사실 핑계에 가까웠다. 태오는 지금 데이트 직후 그녀의 기분을 먼저 확인하고 싶다.
오늘의 데이트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5년 전 우리가 가졌던 첫 데이트처럼 하는 일마다 족족 꼬였었으니까.
5년 전, 나봄은 그 데이트가 너무 최악이었던 나머지 짧은 연애의 이별을 고하기에 이르렀다.
그녀에게 잘 들어갔냐고 물어보기 위해 전화했을 때 좀처럼 통화 연결이 안 됐던 걸로 알아챘어야 했는데.
눈치 없는 태오는 다음을 기약하며 그녀의 식어 가는 마음 따위 신경 쓰지도 않고 있다가, 심기일전하고 나간 두 번째 데이트에서 기어이 헤어지자는 말을 들어야 했다.
이번 연애는 그때와 다르다는 걸 알지만, 너는 헤어지는 순간까지 밝게 손을 흔들어 주었지만.
그래도 괜히 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때보다 몇 배는 더 행복한 지금, 같은 이별이 되풀이된다면 난 견뎌 내지 못할 것 같거든.
상처에서 비롯된 그의 불안한 감정을 달래 줄 사람은 오직 나봄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 끝난 데이트를 회상하고 있을 나봄이 그의 전화를 밝은 목소리로 받아 주기만 한다면 태오도 안심하고 다음 데이트를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다.
태오는 휴대폰을 들어 그녀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는 그의 손끝은 조금 경직되어 있었다. 마치 끔찍하게 못 치른 시험의 결과를 확인하는 것처럼.
하지만 지나치게 겁먹은 마음이 들킬까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있던 그때.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어디서 많이 들었던 음성이 그를 반겼다.
다른 사람이라면 ‘전화기가 꺼져 있네’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길 일이었으나, 그걸 들은 태오의 눈빛은 혼란으로 물들었다.
지금 그의 눈앞을 깜깜하게 가리는 기억은 5년 전의 악몽.
‘잘 들어갔어? 더 잘해 주고 싶었는데 미안해.’
이 형식적인 말조차 끝내 묻지 못하게 만들었던.
‘전화기가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그녀의 휴대폰에서 질리도록 흘러나오던, 사랑이 끝났음을 알리는 경고음.
“싫어…….”
불안에서 절망으로 떨어져 버린 태오의 입에서 흐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기, 이 우산 일회용이긴 한데 제법 쓸 만…… 어머! 저기요! 우산 가져가셔야죠!”
이미 패닉 상태에 들어간 태오는 우산을 건네주는 직원의 손길조차 무시한 채 무작정 주차장으로 뛰쳐나갔다.
아문 줄 알았건만, 아물고도 남았으리라 믿었건만. 비슷한 기억만으로 다시금 덧나 버린 그의 상처.
“아, 충전기 자체가 고장 났나. 충전이 아예 안 되네.”
이 시각 나봄은 방전이 된 휴대폰과 고장 난 충전기를 들고 씨름하고 있었지만, 그가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자꾸 나쁜 생각만 하고 있는 그는 또다시 주인에게 버려질까 두려워하는 강아지와 같은 처지였다.
그녀의 따듯한 온기도, 나에게 향해 있었던 미소도…….
한여름 밤의 달콤한 꿈처럼 전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
결국 다시 눈을 뜨면 나 혼자 남아 버릴 것만 같아.
내게는 그편이 더 익숙하잖아.